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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편소설]도리화가: 문순태

Bawoo 2016. 12. 24. 22:23

도리화가: 저자 문순태 | 오래 | 2014.12.30.

도리화가

[소감] 내가 선 굵은 작품을 쓰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는 문순태 작가가 실존했던 "신재효"라는 인물에 대하여
어떻게 썼을까가 궁금하여 읽어 본 작품. 수지라는 국민 여동생 애칭을 가지고 있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화도 되었으나 흥행에는 별로 재미를 못 본 것으로 알고 있어 원작의 문제인가도 궁금했었다. 분량은 장편치고는 적은 편으로 생각되었다. 읽어본 소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알고 있는 작가의 역량에 비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작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신재효라는 인물을 검색하여 얻을 수 있었던 내용에 약간의 창작이 가미된 정도. 문학적인 측면으로는 별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신재효라는 인물과 진채선이란 인물 그리고 판소리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된 것은 큰(?) 소득이라 생각되었다. 악서가 아니라면 책은 읽어서 절대 손해될 일이 없다는 산 증명인 셈이다.^^

[아래는 이 작품에 대한 소개글:인터넷 교보문고]


소설 <도리화가>는 신재효가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것에 대해 절망을 안고 방황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진채선과의 이야기 외에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 타령>> 등 여섯 마당을 정리한, 73세까지 판소리에 쏟은 삶에 비중을 두었다. 또한 아전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은 이재의 솜씨,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휼민정신, 풍류적 삶과 당시 신흥 부자 세력으로 등장했던 중인 서리들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다루었다.




<머리말>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좋아하면서부터 소리 광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광대라는 천대를 받으면서도, 명창이 되기 위해 목구멍에서 피를 쏟는 힘든 독공을 쌓아 온 그들의 삶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소리 광대의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 고창읍에 있는 동리 신재효의 생가를 구경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신재효가 살았다는 이 집을 구경하고 나서, 그가 정리했던 판소리 여섯 마당과 <광대가>, <호남가>, <도리화가>, <방아타령> 등의 단잡가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신재효의 지침을 받아 이름을 떨쳤던 이날치, 박만순, 정창업, 김창록, 전해종, 진채선, 허금파 같은 명창들을 알게 되었다 . 특히 59세 된 동리와 24세의 사랑하는 제자 진채선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오간 이야기는 슬프도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신재효가 대원군 곁에 가 있는 채선에게 연모의 정을 느껴, 노래를 지어 보내고 그녀가 돌아올 날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로 시작되는 <도리화가> 가락이 아련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대원군의 사랑을 받은 채선은 동리가 죽고 나서야 고창에 돌아왔다. 신재효는 마지막 눈을 감을 때가지 진채선을 기다렸다고 하니, <도리화가>는 그의 애절한 연가가 된 셈이다.
동리 신재효는 1812년에 경주인과 관약방을 맡아 천여 석을 거둘 만큼 부자가 된 신광흡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열다섯 살쯤에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서를 무불통섭하였으나, 양반 출신이 아니라 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아전 노릇을 해야만 했다. 비록 그는 아전이었으나 음률, 가곡, 창악, 속요 등에 정통하여, 풍류로 일대를 울린 사람이기도 하다.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에 못 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 잘한다고 과거할까…‘라고 읊은 것을 보면, 그가 반상의 신분 차별에 한이 맺혔음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양반이 못된 한을 한으로 삭이지 않고 풍류와 판소리 사설 정리, 명창 배출로 한을 풀어 ‘한량 중 멋 알기는 고창 신 호장이 날개‘라고 할 만큼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고창읍내 홍문거리/ 두춘나무 무지개 안/ 시내 우에 정자 짓고/ 정자 끝에 연못이라…./ 뜰 앞에 벽오동은/ 임신생과 동갑이요/ 아호는 동리오니/ 너도 공부하랴기면/ 가끔가끔 찾어오소/ 에용, 어허 우겨라 방아로구나.

그가 쓴 <동리가>만 봐도 만년에 아전 자리를 그만두고 동리정사에서 얼마나 여유롭고 느긋하게 살았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66세에 이르러 판소리에 일생을 바친 공으로 양반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고, 진채선을 기다리며 73세를 일기로 동리정사에서 눈을 감았다.
소설 <도리화가>는 신재효가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것에 대해 절망을 안고 방황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진채선과의 이야기 외에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 타령>> 등 여섯 마당을 정리한, 73세까지 판소리에 쏟은 삶에 비중을 두었다. 또한 아전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은 이재의 솜씨,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 휼민정신, 풍류적 삶과 당시 신흥 부자 세력으로 등장했던 중인 서리들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다루었다.
혹자는 완판본 ‘춘향전’과 신재효가 개작한 <춘향가>를 비교해 볼 때, 신재효의 개작본이 원래 ‘춘향전’이 가지고 있었던 민중의 발랄성을 상실해 버렸다고도 하나, 동리 신재효만큼 판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그것의 정리에 힘쓴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소설《도리화가》는 1991년 ‘음악동아’에 2년간 연재했고 1993년 도서출판 햇살에서 출판했던 것을 보완하여 이번에 오래 출판사에서 복간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이 21년 만에 다시 햇빛을 보도록 해 준 오래 출판사 황인욱 사장께 감사드린다.

2014년 12월
문 순 태

<저자 : 문순태>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추천
1974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소설 <뱍제의 미소> 당선으로 작가 등단
소설집 <징소리>·<철쭉제>·<된장>·<울타리>·<생오지 뜸부기> 등
장편소설 <걸어서 하늘까지>·<41년생 소년>·<타오르는 강> 등
한국소설문학작품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요산문학상, 채만식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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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신재효(申在孝)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1812~1884)

조선 후기에 판소리는 광대들의 생동하는 목소리로 시장터에서 공연되었고, 양반가를 거쳐 구중궁중까지 침투했던 매우 특별한 예능이었다. 신재효는 그런 판소리의 후원자이며 지도자로서, 이론가이자 논평가로서, 또한 수많은 단가와 잡가의 창작자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신재효


전라북도 고창의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소리꾼들을 후원하고 가르치면서 구전되어 오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여섯 마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으며,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례를 마련함으로써 판소리를 광대들의 기예가 아닌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 결과 신재효는 ‘어전 광대가 되려면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 와야 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수많은 명창들의 스승이 되었고, 그가 살았던 고창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그는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소리판에 진채선이라는 여성 명창을 데뷔시키고, 그녀와의 사이에 〈도리화가〉라는 애틋한 연가까지 남김으로써 대가의 풍모에 로맨티스트의 이미지까지 갖추었다.

19세기 중후반의 조선 사회를 솔직담백하게 묘사하고 있는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은 섬세한 줄거리와 예리한 풍자를 통해 사회 비판의 한계를 넘어 문화적 카타르시스까지 이끌어낸다.

오랜 세도정권의 그늘 아래 학정과 수탈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던 그 시절, 아전들은 지방 수령과 함께 ‘탐관오리’라고 불릴 정도로 백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행패가 오죽했으면 유학자 조식은 “우리나라는 이서(吏胥) 때문에 망한다.”고 통탄하기까지 했다.

그런 시기에 신재효는 실천적인 지식인이자 교육자로써 괴리되었던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간극을 좁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문화적 욕구는 물론 신분 상승이라는 가외의 목표까지 달성했다.


고창에서 태어나 아전이 되다

신재효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다. 1812년(순조 12년) 11월 6일 전북 고창에서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경주 김씨는 마흔 살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인근에 있는 정읍의 내장산 영은사에 가서 치성을 드린 끝에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본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신광흡이 서울에 올라가 종7품 직장(直長)을 지내다 같은 성씨로 연고가 있는 신광택, 신성, 신백록, 신약문 등이 고창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했다. 경주인이란 중앙과 지방의 연락사무를 맡기기 위해 수령이 서울에 올려 보낸 아전을 말한다. 그 후 신광흡은 아예 가솔을 이끌고 고창으로 이사하여 아전 노릇을 하다가 관약방(官藥房)을 운영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신광흡은 느지막이 얻은 자식으로부터 효도를 받고 싶었는지 아들의 이름을 ‘재효(在孝)’라고 지었다. 과연 신재효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매우 총명하여 근동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학문은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날 그는 고창현의 형방을 지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1852년(철종 3년)에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 이익상 밑에서 아전 노릇을 했고, 말년에는 관속이나 광대,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戶長)의 직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재효는 평소 판소리나 춤 같은 기예에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신재효의 가정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26세 때 첫째 부인 진주 김씨가 자식도 없이 죽었고, 둘째 부인 밀양 박씨도 결혼 2년 만에 외딸만 남기고 죽었다. 셋째 부인 당악 김씨는 아들 신순경과 두 딸을 낳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56세까지 세 명의 아내를 잃은 그는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천석꾼 중인, 신분상승을 꿈꾸다

신재효는 40대 때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근검절약하면서 불린 끝에 천석지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재산을 움켜쥐고 거들먹거리는 샤일록이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던 장발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대가 없이 남의 신세를 지면 의타심이 생긴다면서 자잘한 물건이나 헌옷가지라도 가져오게 했다. 그런 다음 각각의 물건에 이름을 붙여 두었다가 훗날 당사자가 갚으러 오면 본전만 받고 되돌려주었다.

그는 지배층의 수탈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늘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간교하고 이기적인 일면도 직시했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표현 양식을 판소리 사설에 실감나게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는 평생 집안의 노비들에게 ‘해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애정으로 대하면 배반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런 따뜻한 심성은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그가 양반과 동행하던 길에 천민인 갖바치를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에 양반이 왜 상것과 말을 섞느냐고 하면서 짜증을 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양반들은 갓을 쓰고 뽐내면서도 정작 갓 만드는 사람은 얕잡아 본단 말이오. 그건 양반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요.”

그처럼 신재효는 평소 양반들의 허세에 비판적이었지만 그 자신 신분의 굴레 때문에 타고난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지은 〈자서가〉에는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 댁에 못 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 잘한다고 과거할까.’라는 대목이 있다. 중인으로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몹시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평소에 뛰어난 학문과 교양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창의 향반들과 사귀었고, 훗날 조정으로부터 빈민들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란 품계를 받아 명목상 양반이 되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통혼권이 향리 가문에 국한되었고, 암행어사 어윤중으로부터 저택의 기둥이 신분을 벗어났다고 지적 받아 고쳐 짓는 등 현실적인 신분의 제약을 경험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신재효는 대문 앞에 들츩나무를 심어 덩굴이 사랑의 섬돌까지 이어지게 한 다음 자신을 찾아오는 양반들이 몸을 구부리고 집안에 들어오면 정자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동리정사를 세우다

중인이었던 신재효가 천민들의 기예였던 판소리에 천착하게 된 동기는 분명치 않다. 아전으로서 관아의 연회에 소리꾼이나 기생을 동원하며 판소리의 색다른 문화를 접했고, 그 과정에서 소리꾼들마다 중구난방이었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표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전 생활을 마친 50대 중반부터 신재효는 본격적으로 판소리 세계에 뛰어든다. 널따란 집을 자신의 호를 따서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 짓고, 그 안에 소리청을 만든 다음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조리 없이 부르는 판소리 사설을 일일이 채록하고,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제자들에게 인물이나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 등을 강조함으로써 판소리의 공연적인 측면을 일깨워주었다. 아울러 그때까지 어른들만 익힐 수 있었던 판소리 교육의 허점을 직시하고, 어린 광대도 판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대본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의 소리꾼에 대한 남다른 지원과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이 세간에 알려지자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박만순, 전해종, 김창록 등 서편제와 동편제의 유명짜한 명창들까지 앞 다투어 동리정사에 들어왔다. 그들 외에도 신재효는 80여 명의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장차 여류 명창의 출현을 예고했다.

신재효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다

1910년대 송만재가 지은 《관우희(觀優戱)》에 따르면 판소리는 본래 〈춘향가〉·〈심청가〉·〈홍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타령〉·〈왈자타령〉·〈강릉매화타령〉·〈가짜신선타령〉 등 열두 마당이 있었다. 신재효는 그 가운데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 여섯 마당의 사설을 고쳐 쓰고 그 내용을 제자들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개작 과정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과감히 뜯어고쳤다. 일례로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춘향의 집에 찾아갔을 때 풍성한 음식상이 나오는 대목이 현실적으로 가당찮다고 여기고 향단이의 대사를 통해 집안에서 손쉽게 차려낼 수 있는 소박한 술상으로 바꾸었다.

그는 또 판소리 사설에서 비속적이거나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일정 부분 걸러내 품격을 갖추면서도 극의 진행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더욱 생생한 육담으로 그려냈다. 〈심청가〉에 나오는 심봉사와 뺑덕어미가 나누는 아슬아슬한 음담패설이나, 〈춘향가〉에서 이도령과 춘향의 뜨거운 첫날밤, 〈변강쇠가〉에서 옹녀와 변강쇠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성애를 통해 관객들은 더할 수 없는 재미를 만끽하게 된다.

사설의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교훈적인 의미를 일관성 있게 끌어나갔다. 선행으로 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악인처럼 보이거나, 선행의 과정에서 흠결이 생기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춘향은 이별하는 임 앞에서도 의젓했고, 심청은 죽음에 임하면서도 효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렇듯 신재효에 의해 합리적이며 윤리적이고 흥행성까지 갖춘 판소리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양반 계층의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국민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다.

그는 단가와 잡가 창작에도 열중하여 〈도리화가〉·〈치산가〉·〈호남가〉·〈성조가〉·〈광대가〉·〈오섬가〉·〈어부사〉·〈방아타령〉·〈괘씸한 양국놈가〉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 제목이 특이한 〈괘씸한 양국놈가〉는 1866년에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벌어진 병인양요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기념으로 지어졌다. ‘괘씸하다. 서양되놈,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라고 천주교를 포교하려는 서양인들을 비난하며, ‘남은 목숨 도생하려고 바삐 도망친다.’라 하여 허둥지둥 철수하는 프랑스 군대를 조롱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남긴 단가에는 자신의 기질과 사업, 지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본인의 정체성이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다

신재효는 평소 제자들에게 판소리는 우아한 표현의 사설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음악적 기교 역시 뛰어나야 하며,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력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몇 가지 요건만 제대로 갖추면 판소리가 한시문학과 어깨를 겨눌 수 있으리라 단언했다.

판소리 이론가로서 신재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 〈광대가〉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상 최초로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반드시 준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이른 바 판소리의 4대 법례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기고 맵시 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유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 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발근달이 구름 밖에 나오난 듯 새눈 뜨고 웃게 하기 대단이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속판이 소리하는 법례로다.

여기에서 신재효는 판소리를 소리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요건, 즉 ‘인물 치레·사설 치레·득음·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다. 판소리 공연이 소리꾼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고, 관객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광대의 요건 중에 첫 번째는 인물 치레이다. 그것은 판소리 하는 소리꾼이 잘 생겨야 한다는 뜻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광대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인물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은 좌중을 이끌어가는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시절 소리꾼들은 용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품격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사설 치레이다. 소리꾼은 판소리의 사설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이 판소리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판소리의 사설은 엄청나게 길고 난해하다. 때문에 이전에 소리꾼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신재효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소리꾼이 정확하고 멋들어지며 그럴 듯한 사설을 구사해야만 서민에서 양반가지 전 계층을 망라하게 된 판소리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득음이다. 판소리에서 득음이란 타고난 목청을 가지고 오랜 훈련을 거쳐 마침내 사물이나 사건을 자유자재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신재효는 소리꾼이라면 마땅히 오음(五音. 궁·상·각·치·우)을 분별하고 육률(六律. 12율 가운데 양성에 해당하는 태주·고선·황종·이칙·무역·유빈)을 변화시켜 오장육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로 관객들을 농락할 수 있어야 하며, 깨끗하게 정련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이 곱디고운 말로서 칠보단을 두른 선녀가 병풍 속에서 나오듯 하거나, 삼오야 밝은 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듯 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에도 소리꾼들은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 폭포수 아래서 피를 토하면서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는 이런 득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양조는 달아두고 놓아두고 걸리다가 둘치다가, 청청하게 도는 목이 단산의 봉의 울음, 청원하게 뜨는 목이 청천의 학의 울음, 애원성 흐르는 목 황영의 비파 소리, 무수히 농락변화 불시에 튀는 목이 벽력이 부딪는 듯, 음아질타 호령 소리 타산이 흔드는 듯, 어느덧 변화하여 낙목한천 찬바람이 소슬케 부는 소리······.’

광대가 구비해야 할 마지막 요건은 너름새다. 중요도로는 맨 뒤에 있지만 어려움에서는 맨 앞이다. 너름새란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 가장 중요한 극적 장치이므로 그 ‘맵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대가〉에서는 이 외에도 ‘가객’이란 명칭과 함께 ‘시김새’, ‘조’, ‘장단론’ 등에 대하여 비교적 초기의 이론을 피력함으로써 판소리 역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시해준다. 아울러 역대 판소리 명창들의 특징을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유명 문인들의 작품 세계와 대비하여 설명한다. 이전의 명창들이 도달했던 판소리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한문학의 대가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견주어 품평한 것이다. 이는 그가 판소리의 예술성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재효는 그렇듯 난마와 같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법칙을 세웠지만 자신은 소리꾼이 아니었으므로 제자들에게 실기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편제의 명창 김세종을 동시정사의 소리 선생으로 영입하여 함께 이론과 실전이 결합된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동편제 소리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가 단조로운데 비해 서편제 소리는 잔가락이 많고 박자가 변화무쌍했다. 두 사람은 그렇듯 상이한 동편제와 서편제 소리를 조화롭게 어울린 것이다. 일종의 표준화였다. 이론가 신재효와 실력자 김세종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진정한 명창으로 거듭났고, 반가의 연회는 물론 궁중에까지 들어가 실력을 뽐냈다.


여제자에 대한 애틋한 연서 〈도리화가〉

신재효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지닌 기생이나 무당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소리꾼으로 육성했다. 그들을 위하여 특별히 여창 사설을 쓰기도 했다. 그때까지 남성 예인의 그늘에서 소극적으로 활동하던 여성 예인들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관객들에게 색다르고 수준 높은 공연을 선사하는 동시에 고답적이었던 판소리 문화를 남녀가 대등한 차원으로 조화롭게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일찍부터 여성의 고운 목소리가 판소리로 실현될 때 또 다른 미적 정서가 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과 창의적인 실험은 진채선이라는 뛰어난 여성 명창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한데 그로 인해 신재효는 권력과 애증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1867년 11월, 신재효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고 경복궁의 경회루 낙성연에 명창 김세종과 여제자 진채선을 올려 보냈다. 그때 도포 차림에 갓을 쓴 진채선은 흥겨운 몸짓으로 〈방아타령〉과 〈춘향가〉 등을 불러 좌중의 감탄을 자아냈다. 미모에 득음의 경지에 오른 진채선을 보고 한눈에 반한 흥선대원군은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하여 운현궁에 잡아 두었다.

신재효는 그 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3년 뒤인 1870년(고종 7년)에 이르러 〈도리화가〉라는 사모곡을 지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 흴사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당시 신재효의 나이 59세, 진채선의 나이 24세였다. ‘도리화’란 ‘붉은 복숭아꽃과 흰 오얏꽃’이니 붉은 복숭아꽃은 젊고 활기찬 진채선을, 흰 오얏꽃은 늙어버린 신재효 자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으므로 언뜻 보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지만 예인들의 분방한 세계에서는 가능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진채선의 입장에서 보면 천민으로서 지방의 가기였던 그녀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의 대령기생이 되었으니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화가〉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알게 된 진채선은 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이란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하향을 허락하자 고창으로 돌아와 신재효를 모셨다고 한다. 일설에는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실각한 대원군이 양주 땅에 은거하자 그녀 역시 서울을 떠나 김제 땅에 살면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1876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신재효는 가산을 풀어 빈민들을 보살폈다. 그러자 2년 뒤인 1878년(고종 15년) 조정에서는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라는 무관직을 하사했다. 오위장은 중앙군인 오위의 최고 책임자인 종2품 무관직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오위를 혁파하면서 정3품으로 격하시켜 이름만 남겨둔 명예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상관으로서 종종 궁궐에 입직하는 벼슬이었으니 일개 호장 출신의 판소리 선생에게는 실로 파격적인 영예였다.

그렇듯 졸지에 중인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신재효는 1884년(고종 21년) 11월 6일, 73세의 나이로 태어난 집에서 태어난 날짜와 똑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고, 평생 품고 있던 신분의 굴레마저 벗어 던졌으니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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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채선 (陳彩仙) 1847(헌종 13)∼? 여류 판소리 명창

 

19세기 중반,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판소리계에 진채선이라는 여성 소리꾼이 나타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창현의 비천한 관기였던 그녀는 동리정사에서 신재효김세종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등장으로 여성도 판소리 연행의 주체로 활약할 수 있음이 증명되면서 소리판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진채선

 

당시 신재효는 열두 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다섯 마당을 개작했고, 판소리 이론을 확립한 다음 명창 김세종을 영입하여 함께 제자들에게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때맞춰 판소리 애호가였던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박유전, 박만순, 정춘풍 등 당대의 명창들을 불러들여 판소리를 감상함으로써 판소리 보급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양반 사대부들은 각종 연회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소리판을 벌이게 했고, 종종 저택의 사랑방에 둘러앉아 소규모의 공연을 즐겼다. 그렇듯 판소리의 저변의 확대되자 양반이었던 정현석이 판소리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판소리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 양반들이 판소리를 애호하면서 후원자로 나서자 몇몇 뛰어난 소리꾼들이 ‘명창’으로 대접받으며 사회적으로 공인된 전문 예술인으로 자리잡았다.

공연예술의 하나로 판소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기생이나 세습무 출신의 여성들이 판소리에 뛰어들었다.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기생의 판소리 연창도 허용되었다. 이전에 기생들은 음률과 가무에는 능숙했지만 잡가나 판소리 같은 속악은 부르지 않았다. 한데 그 무렵에는 기생들이 잡가와 판소리를 자유자재로 불렀고, 개중에는 명창에 버금가는 기량을 갖춘 사람도 나타났다. 이에 발맞춰 기생들의 판소리 학습은 자연스러운 문화 현상이 되었고, 여성 명창이 출현할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급변하는 시대 조류 속에서 신재효는 문하에 80여 명의 기생을 받아들여 판소리를 가르쳤고, 마침내 진채선이라는 여류 명창을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데뷔시킴으로써 여성 판소리의 서막을 열었다.

 

무당의 딸, 소리에 눈 뜨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명창으로 알려진 진채선의 생애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불확실한 구전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항은 그녀가 1847년에 고창에서 태어난 기생으로 음률과 가무에 능하고 판소리를 잘했고, 경회루 낙성연에서 노래를 부른 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운현궁에서 살았으며, 스승 신재효가 연정을 듬뿍 담은 〈도리화가〉를 지어 보냈다는 것이다.

최근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는 그녀의 성씨가 여양(驪洋) 진씨(陳氏)이며, 선대는 무장에서 건너왔는데, 고향은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포라는 것이다. 그녀의 신분에 관해서는 기생과 세습 무당의 딸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진채선의 이질녀 김막례에 따르면 무장에서 살던 진채선의 할아버지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검당포로 건너가 과부였던 김단골과 함께 살면서 진씨 일가가 현지에 뿌리내렸다고 한다. 진채선의 어머니 역시 단골이었는데 굿보다 소리를 더 좋아하여 이곳저곳으로 배우러 다녔다고 한다. 진채선 역시 신재효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소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단골이란 남쪽 지방의 세습무를 지칭하는 말이므로 어머니는 음률에 뛰어난 무당이었음에 분명하다. 남도의 세습무는 내림굿을 받고 직접 신을 모시는 한강 이북의 강신무와 달리 일정한 지역의 단골판을 운영하면서 뛰어난 가창력과 연희성을 바탕으로 제의를 주관하는 예능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강 이남, 특히 전라도 지역의 단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는 씻김굿 공연에서 볼 수 있듯이 판소리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판소리가 서사무가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주대사습사》에는 진채선이 관기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어머니의 무업을 계승하지 않고 일찍부터 고창현의 관기가 되어 동기 때부터 체계적으로 기생의 학습 과정을 밟았다면 50대 중반까지 고창현의 아전으로서 만년에 호장의 직임을 맡았던 신재효의 관리를 받는 과정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았음에 분명하다. 호장은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관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나 연회에 소리꾼들이나 기생을 동원하는 직분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강력한 신분제도가 느슨해진 시대 분위기 속에서 소리꾼의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런 변화의 시기에 기생이었던 진채선은 신재효가 세운 동리정사에 들어가 그의 판소리 이론을 습득하고, 동편제 명창 김세종의 소리를 전수받았다.

판소리의 전수 방법은 전통적으로 도제식이었다. 사제가 숙식을 함께하며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통해 스승의 소리를 제자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육 방식을 감안한다면 진채선의 소리는 김세종의 동편제 계보를 이어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진채선

 

기생에서 여류명창으로 거듭나다

1867년, 21세 한창 꽃피는 나이의 진채선은 김세종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경향의 고관대작들이 운집한 경회루 낙성연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여 여류 명창의 출현을 알렸다. 경회루 낙성연이 공식적인 국가 행사였던 만큼 그녀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당시 진채선은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남자 복장으로 무대에 서서 신재효가 개작한 〈춘향가〉에 이어 흥겨운 〈방아타령〉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성조가〉를 불렀다. 〈방아타령〉은 본래 하층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민중가요로 자유롭고 발랄한 성 의식을 드러내지만 그녀가 부른 〈방아타령〉은 신재효가 개작한 것으로 왕실에 대한 찬양과 축원을 담고 있었다.

〈성조가〉는 역시 〈성주풀이〉 형식으로 집 안팎을 관장하는 여러 신들에게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노래인데, 신재효가 경복궁 중건을 기념하고 왕실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사설을 바꾸어 진채선이 부르게 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당시 진채선의 활약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음의 웅장한 것과 기량의 다단한 것은 당시 명창 광대로 하여금 안색이 없게 되었다.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불려 올라와서 만록총중홍일점으로 명성이 일세를 경동케 하였더라.’

판소리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매우 흡족해 하면서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진채선은 졸지에 운현궁의 여악을 담당하는 궁녀가 되었다. 그때부터 진채선은 고종 임금의 친정 선언으로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6년 여의 세월을 운현궁에서 보내야 했다.

진채선은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남성 명창들과 겨루어 손색이 없었으며, 독자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더늠이란 명창들이 직접 사설과 음악을 독특하게 새로 짜서 자신의 장기로 삼아 부르는 대목을 말한다. 진채선이 사설 창작 능력과 출중한 연창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다음과 같은 진채선의 더늠 ‘기생점고대목’은 박헌봉의 《창악대강》에 나오는데,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낙춘이의 용모와 행색이 앞서 우아하게 등장하던 여러 기생들과 대비되어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시킨다. 이것은 동리정사의 실기 선생이었던 김세종이 부르던 〈춘향가〉나 이론 선생이었던 신재효이 개작한 〈춘향가〉 사설과 매우 다르다. 즉흥적으로 소리판을 장악하는 그녀의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낙춘이가 들어오는데, 제가 잔득 맵시있게 들어오는 체하고 들어를 오는데, 시면한단 말을 듣고 이마박에서 시작하여 귀 뒤까지 파재치고, 분 성적한단 말을 들었던지 개분 한 냥 일곱 돈 엇치를 무지금하고 사다가 성 같에 회칠하듯 반죽하여 온 낯에다 맥질하고 들어오는데, 키는 사그내 장승만한 년이 초마자락을 훨신 추어다가 턱 밑에다 떡 붙이고, 무손의 곤이 걸음으로 껑충껑충 엉금엉금 들어오더니, 점고 맛고 ‘나오.’ 운운.”

 

〈도리화가〉의 연인이 되다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신화적인 존재인 신재효는 일찍이 세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차례로 사별하고 56세 때부터 홀아비가 되었다. 때문에 그가 길러낸 여류 명창 진채선과의 관계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59세 때 진채선에게 지어보낸 〈도리화가〉에는 사제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한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채선이 대원군의 명을 받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 된 후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다소나마 추측할 수 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흴사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웃음 웃고 말을 하니 수렴궁의 해어환가.
해어화 거동 보소 아릿답고 고을시고.
현란하고 황홀하니 채색채자 분명하다.
도세장연 기이한 일 신선선자 그 아닌가.

신재효는 진채선과 이별한 지 3년 만에 그녀가 인근 고을의 관아에 내려와 소리판을 열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그 시기는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그녀의 나이 24세, 연분홍으로 물든 복숭아꽃처럼 여성으로서 농익어가는 나이였지만 자신은 호호백발로 오얏꽃처럼 언제 질지 모르는 노인이었다.

더군다나 진채선은 운현궁의 대령기생으로서 아무리 스승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에 상사병에 걸린 스승은 공연이 벌어지는 내내 먼 발치에서 구름같은 머리털, 나비눈썹, 앵도 같은 입, 흰 잇속, 백옥 같은 얼굴, 버들 같은 허리, 고운 살결, 연꽃 걸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자태를 낱낱이 훑어보면서 그리움의 실체를 확인할 뿐이다.

아리따운 제자는 너른 마루 비단자리에 은초를 켜놓고 붉은 부채를 휘두르며 노래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장수, 범, 학, 기러기, 서리바람, 꾀꼬리, 빗소리 같았고, 그녀의 태도는 제비처럼 날렵하거나 미풍처럼 부드럽다. 제자의 그처럼 화려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고운 몸짓은 이전의 어떤 명기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런 와중에 신재효는 진채선 역시 자유로운 삶과 연인에 대한 자신에 대한 연정으로 번민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녀는 상전이 허락하기 전에는 새장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신세이다.

이윽고 그녀와 마주한 신재효는 고생 끝에 영화가 올 터이니 믿고 참아야 한다며 타이르다가 마침내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외롭고 쓸쓸해진 자신의 신세 타령을 늘어놓는다. 요즘에는 점점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가며 이가 빠져 고기조차 제대로 씹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제자의 판소리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 스승의 입장으로 돌아온다.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신재효는 그날부터 상사병이 더욱 깊어진다. 급기야 칠월 칠석 날이 되자 도저히 견딜수 없는 심정이 되어 〈도리화가〉를 지어 운현궁으로 보냈다. 노래의 말미에 그는 한글로 ‘증 선낭’이라 썼다. 곧 ‘채선 낭자에게 준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제 관계는 선명한 남녀 관계로 바뀌었다.

〈도리화가〉의 내용으로만 보면 진채선은 내내 운현궁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때때로 지방 관장의 초청을 받아 판소리를 공연했고, 3년 만에 공연 차 남쪽 지방에 내려갔을 때 신재효가 찾아와 만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원군이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가야 하는 대령기생으로서 일개 지방 수령의 부름에 응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때문에 〈도리화가〉는 상사병에 걸린 신재효가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만남의 장면을 상상하여 그려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어쨌든 신재효는 이 노래에서 “강호 위의 호걸들이 왕래하며 하는 말이 ‘선낭의 고운 얼굴 노래 또한 명창이라. 듣던 바에 으뜸이니 못 들으면 한이 되리. 그 중에 기묘한 이 쌓인 병이 절로 났네.’ 이 말 듣고 일어 앉아 어서 바삐 보고 지고. 주야로 응망하니 하룻날이 여삼추라.”라 표현함으로써 미인에다 명창인 제자 진채선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후 진채선의 판소리 실력은 안타깝게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라는 한계 상황에 가로막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름만은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서 여성 판소리사의 첫 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바람의 흔적을 남기다

진채선의 행적은 스승 신재효가 남긴 〈도리화가〉의 여운을 끝으로 미궁 속에 빠져든다. 속설에 따르면 그녀는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과 함께 실각한 대원군이 양주 땅으로 내려가 칩거하자 운현궁을 떠나 김제에서 살았고, 1898년 대원군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채선은 27세 때 궁을 나와 50세가 넘도록 살면서 필생의 업이었던 판소리를 외면하고 제자를 기른 흔적조차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속설로는 신재효로부터 〈도리화가〉를 전해받은 진채선이 흥선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을 불러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자 그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귀향을 허락했고, 마침내 고창으로 돌아온 그녀가 신재효와 함께 살았다는 해피엔딩이다.

〈추풍감별곡〉은 평양의 김진사 댁 무남독녀 채봉이와 선천군수의 아들 강필성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노래 속에서 채봉은 연인 필성과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아버지의 실수로 집안이 망하자 평양의 기생이 된다. 그녀는 수시로 관장에게 수청을 들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필성에 대한 애절한 연모의 정을 버리지 않고 추풍감별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러자 평안감사가 그녀의 사연을 알고 감동하여 마침내 강필성과 짝을 맺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도리화가〉와 〈추풍감별곡〉이라는 두 개의 애틋한 가사 내용이 교묘하게 어울리며 그럴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너무나 잘 짜여진 각본이라서 그런지 신빙성이 들지 않는다.

그밖에도 진채선의 행적에 대한 여러 속설이 나돌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나라의 최고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모셨던 궁녀 출신으로서 운현궁을 나온 뒤에는 더 이상 세상을 울고 웃기는 소리꾼 노릇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일본의 침탈로 인한 망국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늙은 스승의 바람대로 마음 편하게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완성했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듯 진채선의 후반기 생애는 그녀가 소리판에서 신명나는 대로 마음껏 휘둘렀던 부채 바람처럼 허공에 스러졌고, 후세인들의 허튼 상상 속에서 한 편의 판소리 사설처럼 천변만화의 낯으로 그려지고 있다.

 

판소리의 미래를 열다

판소리는 매우 긴 줄거리와 독특한 기교 때문에 단기간에 익히기가 불가능한 기예이다. 판소리 한 마당을 완창하려면 길게는 여덟 시간이 걸린다. 그 동안 소리꾼은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부채 하나만을 휘두르며 오로지 자신의 소리와 몸짓으로만 무대를 채워 나간다. 더군다나 기나긴 사설을 일정한 계보에 맞춰 정확하게 새겨내야 하므로 보통 남성의 체력으로도 견디기 어렵다.

그처럼 극한적인 난이도를 갖고 있는 판소리의 주역인 소리꾼은 단순한 암기와 표현의 차원을 넘어 소리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 그러기에 소리꾼이 처음 판소리를 배울 때는 의식주를 스승과 함께 하며 그가 품고 있는 소리의 영혼까지 쓸어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제간에 관계는 부모자식 사이보다 더 가까워진다. 그런 과정에서 보면 신재효가 여제자 진채선에게 그토록 집착했던 까닭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당대에 많은 여성 소리꾼들이 등장했지만 남성들처럼 전문 명창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신재효는 진채선을 조련하면서 여성 소리꾼도 남성 소리꾼 못지 않게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울러 그녀를 통해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결과 진채선은 경회루 낙성연이라는 특급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한껏 뽐냈고, 경향 각지에 공식적으로 여류 명창의 출현을 알렸다. 이런 그녀의 성공 신화를 바탕으로 여류 명창들이 속속 배출되었고, 이들의 공연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냄으로써 장차 재기발랄한 여성 예인들이 판소리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리판에 여성적인 판소리가 성행하면서 남성 중심의 판소리에 담겨있던 음란하고 비속한 사설이 사라졌고, 여성 소리꾼들의 세련되고 우아한 발림을 통하여 판소리는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 덕분에 정체되었던 판소리는 창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구한말 혜성처럼 등장한 진채선이라는 여류 명창이 열어놓은 판소리의 미래였다.

 
 

이상각 | 직업시인, 작가.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펼쳐보기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관이나 화원 등의 전문가 집단과, 백정이나 광대, 노비 등 핍박받던 천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민항공사를 정리한 〈대한민국항공사〉를 집필했다. 저서로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효명세자》,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꼬레아러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팔천》, 《조선역관열전》, 《조선노비열전》, 《조선정벌》 등이 있다.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
한국사 인물 열전 저자이상각 | 출판사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