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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팔산[八山]

Bawoo 2017. 1. 12. 21:52



도자기는 정말 매력적인 상품이다. 아시아에서 유래되었으나 지금은 전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양한 재질의 그릇들이 나오고 있지만 도자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은 유럽의 명품 도자기들에 열광하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는 반대였다. 동양 도자기에 유럽 사람들이 열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중국과 일본 도자기가 있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도자기를 생산했던 나라로 이미 유럽에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반면 일본은 17세기인 1616년에 첫 경질자기를 생산하였다. 중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늦은 시기였다. 하지만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가 유럽에 소개되자 유럽에는 일본풍이 유행이 될 정도로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주게 된다. 이처럼 빠른 기간 내에 일본 도자기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때 납치한 조선의 사기장들 때문이다.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들은 왜군의 조직적인 납치 작전에 의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 중 몇 명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후쿠오카 현 아사쿠라 군 도호무라 고이시와라의 다카토리 종가
 
팔산
 
일본 규슈 북부 후쿠오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쇼핑하러 가거나 온천 여행의 출발점 정도로 인식되는 평범한 도시다. 그래서 후쿠오카에도 아리타나 가라쓰에 뒤지지 않는 유명한 가마가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가마 이름이 바로 다카토리 가마이다.
 
이 가마는 임진왜란 당시 구로다 나가마사가 경상도에서 끌고 간 팔산이라는 인물에서 비롯한다. ‘팔산’은 원래 사람이름이 아니라 지명이다. 오늘날 경북 고령군 운수면 팔산리에서 사기장을 끌고가 ‘팔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팔산 가족은 일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끌려온 매우 드문 경우다. 전쟁이 발발하자 팔산은 아내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지만 아내와 장인 역시 왜군에게 붙잡힌 것이다. 이를 알게 된 팔산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청원하여 부인과 감격적인 재회를 할 수 있었다.
1600년 팔산 일가를 지금의 노가타시 동쪽 다카토리산 기슭에 정착하게 했다. 이때 나가마사는 팔산을 사무라이 계급에 책봉하고 50석의 녹봉과 다카토리(高取)라는 성을 주고 이름도 하치조(八藏)로 바꾸게 했다. 이후 1614년 에이만지 인근 우치가이소로 이주해 10여 년동안 도자기를 구우며 생활하게 된다. 다른 사기공들과 달리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던 팔산은 탈출 기회를 엿보았고 1624년 온 조선통신사를 통해 귀국하고자 했다. 그래서 탄원서를 써 통신사일행과 접촉하려 했으나 그를 감시하던 병사들에게 들켜 실패로 돌아간다.
 
이에 화가 난 당시 번주 구로다 주겐은 그를 죽이려 했으나 녹봉을 몰수하고 유배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7년 후 당대 최고의 다도 스승인 코보리 엔슈의 다기를 만드는 관요를 맡게되며 신분이 복원된다. 코보리 엔슈의 미의식과 다카토리의 기술의 융합은 엔슈-다카토리 찻잔을 만들었다. 그 덕에 당시 일본의 7대 가마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칭호는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다카토리 가마는 이후로도 민간의 일상 식기는 거의 만들지 않고 다도와 영주가 사용하거나 선물하는 그릇만을 제작하는 전문 가마로 명맥을 이어 간다.
 
11대 팔산의 작품 ② 12대 팔산의 작품
 
팔산의 몰락
 
이렇게 잘나가던 다카토리 가마에도 불운이 찾아 온다. 메이지 유신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번에서 현으로 바뀌는 폐번치현 정책이 실시된 것이다. 이는 지방의 사족 세력에 대한 꺾고 중앙 집권화를 하기 위한 정책으로 1871 274명의 다이묘들이 영지를 반환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따라 다이묘들이 운영하는 관요가 폐쇄된다.
이로 인해 기존 전통을 고수하자는 9대 팔산 다카토리 세이지로와 변화를 주장하는 10대 다카토리 도미모노 부자는 의견 차이로 갈등이 심해진다.
 
결국 아버지 몰래 예전에 일하시던 사람에게 일을 배운 아들로 인해 9대 팔산은 부자의 인연을 끊고 칩거에 들어간다. 이에 아들은 석고대죄를 하나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결국 석고대죄를 푼 그날 아버지는 세상은 떠난다. 통한의 장례식을 치룬 10대 팔산은 어려워진 가계 사정에도 불구하고 다카토리 전통 기법을 재현하기 위한 최선을 다한다. 마침내 1938 7월 도쿄에서 작품전을 연다. 하지만 전품전 개막 며칠 전 그는 영양실조와 과로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며 유작전이 된다.
 
다카토리 도자기의 재현은 큰 뉴스가 되어 다카토리 가마는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았으나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가마의 불은 다시 꺼진다. 그 가마를 살려낸 것은 11대 팔산 다카토리 세이잔 여사였다. 그녀는 10대 팔산 다카토리 도미모노의 딸로 아버지가 전통 기법 재현 작업을 도왔고 가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후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보험사원이 되어 보험 판매업을 했으며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1957년 경제적 여유가 생긴 세이잔 여사는 아들과 함께 가마를 열게 된다. 그리고 선대문서를 정리하는 중 대대로 물려오던 비전서를 발견하고 다카토리야키의 전통 기법을 알게 된다. 1959년 마침내 전통 다카토리야키를 완벽하게 재현했으며 1961년 미쓰코시 백화점 본점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며 다카토리 가마의 부활을 세상에 알렸다.
북한 회령 자기의 특색이 그대로 묻어나는 13대 팔산의 접시들
 
팔산의 조선혼
 
종가 뒷산에는 한국식 봉분묘가 있다. 바로 초대 팔산 부부의 묘다. 원래 묘소는 두 번째 가마를 연 이즈카시 사치부쿠로 시라하다야마에 있었다. 하지만 시의 방침으로 공영주택 건설이 예정되며 묘소 이장을 권하게 된다. 세이잔 여사는 반대했지만 결국 이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종가 뒷산에 이장하게 된다. 이장을 마치고 법요식을 가질 때 구로다 가문의 당주가 찾아와 근처 조경을 하는데 보태라며 금일봉을 전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팔산을 일본으로 끌고 온 장본인이며 팔산을 후원하고 비호했던 그 인연이 결국 여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세이잔 여사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1967년 한국일보 특파원 이원홍씨의 기사 덕분이였다. 여기에서 세이잔 여사는 조국의 땅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겠다는 열망을 보였다.
마침내 1973년 서울 신세계백화점에서 세이잔 여사의 작품전이 열린다. 이 자리에서 세이잔 여사는 도예기술을 전수할 제자로 한국에서 받겠다고 했고 2명을 제자로 받아 들였다.
세이잔 여사의 혹독한 교육으로 10년을 배워야 사기장 소리는 듣는다고 했지만 1년 만에 그들은 회전대에 앉아 술잔, 접시, 호리병 등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3년째 되는 해 후쿠오카에서 작품전을 열었다. 하지만 군문제로 두 명의 제자는 일본에서 계속 사기장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팔산의 전통을 한국에 이어지겠다는 계획은 결국 막을 내린다.
현재 13대 팔산 다카토리 에이조에 의해 다카토리야기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카토리 화병
 
일본 <!HS>도자기<!HE> 여행 [예술/대중문화]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 도도
201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