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 1406년? ∼ 1469년, 피렌체 출생)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개요
마사초의 유일한 수제자라고 하는 그는 어린 시절에 양친을 잃고 피렌체의 카르미네회(會) 수도원에 맡겨져 수도 화가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프라 안젤리코와 달라서 종교화를 현실적으로 그린 최초의 화가인데, 당시 유행한 의상과 머리모양을 그림에 대담하게 채용하였다. 또 운동 묘사(특히 옷이 접힌 주름의 표현)와 섬세한 색채로 널리 알려졌다. 수녀 루크레치아 부티의 유괴사건은 그의 만년을 먹칠한 추문이었으나(1456년),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피노(1457년∼1504년)도 뛰어난 색채화가였다. 또 발도비네티(1425년∼1499년)와 멜로초 다 포를리(1438년∼1494년) 등도 색채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유려한 선과 인간 감정의 정묘한 표현으로 알려진 화가들이다.[위키백과]
개요
그의 작품은 마사초의 영향(예를 들면 1437년의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생애는 전설과 구전에 둘러싸여 있다.
생애와 작품
필리포 리피는 어린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수년 동안 피렌체에서 이모와 함께 살다가 1421년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수도원에서 카르멜 수도회 수사가 되기로 서약했다.
이무렵 이 수도원에 딸려 있는 브란카치 예배당에서는 마사초가 프레스코 벽화로 예배당을 장식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예술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영향력있는 그림이 된 이 프레스코를 통하여, 리피는 처음으로 미술과 중요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리피는 교회와 수도원 회랑에 몇 점의 프레스코를 그린 뒤, 1432년 수도원을 떠났다.
이 화가의 면모를 생생하면서도 다소 가공적으로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리피는 몇몇 동행자들과 함께 아드리아 해 연안의 무어족에게 납치되어 18개월 동안 노예로 붙잡혀 있다가, 주인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풀려났다고 한다. 1434년에 리피가 파도바에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파도바 시절에 그린 작품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곳에 살았던 만테냐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 그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1437년에 리피는 피렌체로 돌아와 유력한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았고, 수도원과 교회를 위해 몇 점의 작품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가 여행중에 얻은 자질은 그가 파도바에서 돌아온 직후인 1437년에 그린 2점의 작품 〈성 프레디아노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The Virgin and Child Between SS. Frediano and Augustin〉·〈성모와 아기 예수〉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2점의 제단화에는 마사초의 영향이 아직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만, 그것이 다른 표현양식에 흡수되어 평부조와 같은 생생한 효과를 내고 있다. 이 효과는 윤곽선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있어서, 도나텔로나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 같은 조각가들의 부조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들을 보면 색채가 따뜻하고 명암으로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어서, 같은 시대의 위대한 화가인 프라 안젤리코의 투명한 색채와 비슷하다.
리피의 발전을 그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수태고지 Annunciation〉이다.
옛날에는 이 그림을 그의 후기작품으로 생각했지만, 오늘날에는 1441~43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그림은 새롭게 발견한 원근법의 효과 및 색채와 형태의 교묘한 대조를 이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겁먹은 얼굴로 문간에 서 있는 두 소녀의 얇은 옷자락의 움직임을 표현한 섬세한 감각은 뒤이어 나타날 보티첼리를 보는 것만 같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성모의 대관식〉은 인물로 가득 차 있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유명한 제단화는 겉모습이 너무나 호화로워서, 안젤리코와 경쟁하기 위해 그린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폴립티크(4폭 이상의 패널화를 이어붙인 것)의 여러 패널을 하나의 장면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피렌체 회화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룬다. 그의 제단화들은 장엄한 구도가 특징인데, 15세기 피렌체 미술의 전형적인 주제, 즉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를 다룬 그의 그림에서는 이런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그림들 가운데 대표작은 오늘날 피렌체의 피티 궁에 소장되어 있는 원형 그림 〈성모자상과 마리아의 생애 Madonna with Child and Scenes from the Life of Mary〉이다. 이 그림은 성서적 소재를 인간적으로 변형시키고, 일상생활의 모습을 명쾌하고 사실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르네상스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445년경에 제작된 2번째 〈성모 대관식〉은 리피의 표현양식이 뚜렷하게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마사초에 대한 연구에서 얻은 조각과도 같은 조형적 가치에서 벗어나 안젤리코의 차분한 색채로 관심을 옮겨갔다. 1442년에 리피는 레냐이아에 있는 산퀴리코 교회의 주임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사건의 연속이었으며, 그가 연애에만 몰두하고 조직적이거나 차분한 행동을 참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평판(이런 평판은 대부분 기록문서로 남아 있음)이 나돌았다.
그의 모험은 1456년 프라토에서 한 수녀와 함께 도망친 낭만적인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프라토의 산타마르게리타 수녀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 수녀원의 젊은 수녀 루크레치아 부티와 함께 도망친 것이다. 교황은 나중에 전직 성직자이자 화가인 리피가 그 수녀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필리포(필리피노라고 불렀음)는 15세기 후반에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피렌체에서 약간 떨어진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프라토는 필리포 리피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그는 자주 프라토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머물며 여러 프레스코와 제단화를 그렸다. 리피는 젊은시절부터의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프라 디아만테와 함께, 1452년 프라토 대성당 성가대석의 벽을 다시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1463년에 프라토를 방문했고, 1464년에 다시 돌아가 이번에는 1467년까지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프라토에서 그가 벌인 활동의 핵심은 대성당의 프레스코로, 이 벽화에는 4명의 복음서 저자, 그리고 세례 요한과 성 스테파누스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다.
성 스테파누스의 생애 가운데 가장 장엄한 장면은 아마 안장 장면일 것이다. 성자의 장례침상 양쪽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고위 성직자와 유명 인사들이 서 있는데, 그중에는 카를로 데 메디치 추기경과 프라 디아만테 및 리피 자신도 함께 있었다.
1467년에 리피와 프라 디아만테는 메디치 가문을 통해 또 하나의 방대한 일을 주문받고 스폴레토로 떠났다. 이번에 받은 주문은 스폴레토 대성당의 성가대석을 장식하고 프레스코를 그리는 일이었는데, 이 그림들 중에는 〈예수 탄생 Nativity〉·〈수태고지〉·〈마리아의 죽음 Death of Mary〉, 그리고 성가대 뒤쪽 둥근 천장 한가운데에 있는 〈성모 대관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프레스코는 그의 죽음으로 중단되어 리피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는데, 그가 죽은 날짜는 2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는 수도사들의 사망 기록부와 스폴레토 기록 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공문서의 날짜가 다르다. 메디치 가문은 리피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설계한 호화로운 묘소를 스폴레토 대성당에 만들어주었다.
평가
필리포 리피가 죽은 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모험적인 생애에 대한 전설 때문에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다른 화가들을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미술은 그가 마사초와 프라 안젤리코한테서 받은 영향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올라갔으며, 더욱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도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이상과 새로운 착상을 실현하기 위한 기법을 끊임없이 모색했으며, 그 점이 그를 당시의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되었다.
20세기 비평가 버나드 베런슨은 예술가로서의 리피가 마땅히 '천재 화가들'에 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성을 드러내며 내용을 풍부하게 표현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를 '일류 소묘'라고 불렀다.
후세의 비평가들은 당시의 생활을 반영하고 르네상스 시대 초기의 이상을 일상적인 용어로 바꾸어 표현한 리피의 '서술적'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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