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 - 파가니니

[스크랩]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이탈리아 1782∼1840)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제노바 출생

Bawoo 2014. 1. 16. 22:19

 

파가니니,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제노바 출생

 

Niccolò Paganini 

1782∼1840

 

 

음악사에서 19C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니꼴로 파가니니(1782~1840)는 음악사에서 19C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밑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1793년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연주회를 가졌으며 1797년까지 롬바르디를 순회하였다. 1805년 그는 피옴비노에서 지휘자가 되었으며, 이 때에 반주음악이 필요 없는 기상곡을 썼다. 이 기상곡들은 새로운 조율기법과 운지기법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피찌카토와 화음을 광범히 사용하도록 했다. 이 새로움은 바이올린 거장의 연주기법을 바꿔 놓았으며 슈만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편곡된 작품인 피아노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파가니니는 또한 바이올린 협주곡, 변주곡, 현악4중주곡을 썼다. 많은 그의 음악은 깊이가 부족하고 몹시 현란한데 이 점은 타가니니 자신이 연주한, 마력을 지닌 내용을 반영한다. 모험, 영애사건, 낭만적 물질현상 등으로 혼효된 타카니니의 “광란적인” 연주는 악마의 영향하에 있는 인간의 통속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의 많은 연주들은 이탈리아에서 행해졌으나, 1828년 그런 류의 “팝” 스타들 가운데 타가니니를 최초로 유럽의 우상으로 치켜 준 비엔나 방문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제노바 출생.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처음 얼마동안은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나중에 제노바의 극장 바이올리니스트겸 지휘자인 G. 세르베토와 산 로렌초 대성당의 악장 G. 코스타 등에게 사사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교회에서 연주하였으나 1793년 첫 공개연주회에서 성공하자, 그 당시 이름을 떨치던 A. 롤라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동시에 G. 기레티에게 작곡을 배웠다.

99년부터 북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등 광범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1804년 제노바로 돌아와 이듬해 연주활동을 재개, 그해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E.B. 바키오키의 초대로 루카에 가서 궁정오페라지휘자로서 3년간 머물렀다. 13년 밀라노로 가서 주로 이탈리아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였으나, 28년부터 국외 순회연주를 시도하여 빈·베를린·파리·런던 등지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파가니니의 연주법은 그 흐름을 직접 잇는 유파가 없어 그 자신의 일대로 소멸하였다. 제자는 단 한 사람 시볼리를 가르쳤을 뿐이었으며, 시볼리에게도 연주법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잘 사용한 기법은 플라졸레토, 왼손의 피치카토와 스코르다투라 등이며, 그 밖에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분리 사용 등 화려하고 곡예적인 연주를 창조하였다.

그 기술적 확충에 따른 소산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를 비롯한 다수의 소품 및 협주곡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은 바이올린곡뿐이며, 모두 어려운 기교와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강렬한 표현성은 낭만주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의 바이올린주자, 비올라주자, 기타 주자, 작곡가. 아마추어 만돌린 주자였던 아버지에게 최초의 음악 레슨을 받고, 이어서 제노바 극장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 세르베토 Giovanni Servetto와 성 로렌초 대성당의 합창대 지휘자 코스타 Giacomo Costa에게 배웠다. 9세 때 카르마뇰 Carmagnole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하여 제노바에서 데뷔했다. 몇 달 동안 롤라 Alessandro Rolla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어서 파에르의 스승인 기레티 Gaspare Ghiretti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797년 아버지를 따라서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1801년부터 1804년에 걸쳐서는 기타에 전념했으며 이어서 로카텔리의 곡을 연구했다. 그 후 루카에서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인 바초키 공주에게 소속된 음악감독이 되었다(1805~13). 1813년 볼로냐에서 롯시니와 만났으며, 1828년부터 1834년에 걸쳐서는 전유럽을 순회하면서 곳곳에서 열광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빈에서 황제로부터 궁정의 거장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작센, 폴란드, 바이에른, 프로이센 및 라인란트 등지를 차례로 방문했다. 1831년 파리로 가서 3월 9일 오페라 극장에서 최초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5월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1831년 6월 3일 런던에서 데뷔한 그는 1832년 6월까지 영국에 체류했다. 1834년 1월에는 베를리오즈를 만나 비올라를 위한 독주곡을 작곡해 줄 것을 의뢰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의 하롤드가 만들어졌으나 파가니니는 끝내 이 작품을 연주하지 못했다. 1840년 5월 27일 건강을 회복할 목적으로 갔던 니스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대는 다르지만 파가니니는 바이올린 주자, 피아니스트, 작곡가, 화가, 작가를 불문하고 낭만파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그 중에는 쇼팽, 슈만, 리스트, Th. 고티에, 괴테, 하이네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실루엣과 그의 삶을 둘러싼 신비적인 분위기,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전설, 거기에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기교가 가세하여 낭만파 예술의 한 측면인 사람의 의표를 찌르고 싶어하는 경향과 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탄할 만한, 환상적인, 초자연적인이란 말이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쓴 글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가령 페티스는 1831년 3월 12일의 르뷔 뮈지칼 Revue musicale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바이올린이 파가니니의 손에 쥐어지면 더 이상 타르티니나 비오티의 악기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특별한 그 무엇인 것만 같다. 호프만의 작품의 등장인물같은 파가니니는 그 연주에 의해서 거의 마술적 매력에 가까운 열광을 불러 일으켰다.

 

1832년 파리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뒤 리스트는 이미 뛰어난 피아노 테크닉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아노 테크닉을 더욱 연마하기 위하여 은둔해 버리기도 했다. 파가니니의 사후 1세기 이상이나 되었지만, 그는 그 자신만의 가장 어려운 주법을 창안하여 연주함으로써 여전히 비르투오소 바이올린 주자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바이올린의 테크닉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범한 조합력을 타고난 그는 그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 테크닉 중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을 통합하여 19세기 전반의 사상이나 감상에 어울리는 한 예술의 총합체로서 보여주었다. 그는 바이올린의 기술에 새로운 비약을 가져왔으며 여러 악파의 아카데미즘 밖에서 형성된 창조적인 재능에 의해서 이 기술을 개화시켰던 것이다.

 

남달리 뛰어난 손의 신장성(伸張性) 덕분에 그는 가장 까다로운 엑스텐션주법*도 잘 처리해 냈으며, 옥타브에 의한 트릴*과 동일음에 의한 트릴*의 최초의 예를 보여주었다. 활의 도약을 이용한 스타카토*, 2중 아르페지오, 3중 아르페지오, 4중 아르페지오 및 화음*을 템포가 빠를수록 더욱 어려운 미묘한 운지, 손가락의 교차나 신장(伸張)을 필요로 하는 조합에 대담하게 사용하였다. 또한 배음(倍音)*의 사용을 확대하여 새로운 조합을 발명했고, 양손으로 급속하게 피치카토*를 사용하여 활로 켠 노래의 반주처럼 이것을 콜라르코 coll'arco로 혼합시켰다.

 

뛰어난 기교의 도달점(슈만에 따르면)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의 어려운 기교, 특히 24개의 카프리치오의 어려움은 슈만,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카젤라, 카스텔누오보 테데스코, 루토슬라프스키, 달라피콜라 등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파가니니는 자신이 편애하는 악기인 기타, 비올라, 특히 바이올린용 곡만 작곡했다.

 

악마의 화신이라 불린 파가니니

 

누군가 파가니니의 가르침을 받아 뛰어난 음악가가 되면 그건 파가니니의 마법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파가니니가 결혼하면 그들은 악마부부였다. 로마 교회도 파가니니가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며 공격을 퍼부었다. 로마 교회는 그가 악마의 제자로서 이 땅에 태어나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 연주로 대중들을 유혹해 큰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파가니니는 선천적으로 특별한 신체 조건을 부여받았다. 물론 천재성의 원천은 엄청난 연습량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어깨뼈와 아래팔, 손목뼈까지 매우 부드러웠다. 그리고 손바닥의 관절과 각지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고 한다. 연주시 손바닥은 평소 상태의 2배까지 벌어졌다. 고막도 매우 민감해서 누군가 곁에서 큰 소리를 내면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 선천적으로도 바이올린의 악마로 행세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바이올린의 줄이 하나든 두 개든 청중의 입을 벌어지게 하는 데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내면의 진실과 음악인의 우의를 중시하던 슈만조차도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 저녁 때 나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놀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마치 먼 곳 어디에선가로부터 다가오는 음악 같기도 하고, 침대 위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하는 음악 같기도 했다."

파가니니가 이탈리아 니차에서 죽었을 때 그이 유해는 성 레파라타 거리에 있는 별장에서 방부처리된 후 입관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유해를 매장하는 데 필요한 수속을 고의로 늦추었다. 니차의 주교가 파가니니를 기독교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파가니니의 매장 수속은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리에주에서 발간되는 잡지 '역사와 문학'에 실린 카톨릭계의 기사는 당시 그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을 보여준다.

" 파가니니는 지난해에 니차에서 죽었다. 그는 신앙에 냉담했고 도덕적 퇴폐의 화신으로도 악명 높던 사나이다. 부활절 때 그는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 그래서 니차의 주교가 그의 매장을 거부한 것이다."

파가니니의 친지들은 이러한 처사에 불복했다. 그리고 제노바의 추기경에게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니차의 주교가 취한 조치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파가니니의 유해는 관 속에 넣은채로 몇 달 동안이나 니차의 별장에 방치되었다. 파가니니의 유해가 관대에 올려져 있는 동안 귀신 같은 연주자의 주검을 보려는 사람들이 별장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갈바노 주교에게 항의라도 하듯 니차로 몰려들었다. 사체의 악취도 부근 일대에까지 풍기게 되었다. 그래서 니차의 주교는 파가니니의 유해를 지하실로 옮기도록 명했다.

결국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시의 위생 당국이 적절한 조치를 강구했다. 마침내 유해는 니차의 묘지에 매장되지 못한 채 빌라 프랑카 근처의 위생 병원에 보관되었다. 그의 이름은 교회 기록부에서도 말소되었다. 그런데 파가니니는 죽기 3년 전 그의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은총에 맡긴다고 썼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어 고백 성사를 베풀 신부가 왔을 때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교회에다 위안을 구하고 싶음을 고백했다. 그럼에도 니차의 주교는 파가니니를 사교도라고 격렬하게 탄핵했는데, 이는 파가니니가 악마이거나 악마의 사제라는 인식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파가니니의 시신은 파르마에 매장되어 있다. 1940년 고향 제노바로의 이장이 거론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자료참조 : (월간객석 1998년 9월호)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서는 악마의 화신이라 불린 대음악가가 태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그 대가로 불세출의 연주력을 얻었다고 쑥덕거렸다. 그의 이름은 니콜로 파가니니였다. 사람의 능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란한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듣는 이들을 기절초풍케 했다. 파가니니가 악마로 불린 데는 그의 괴이한 행동거지가 한 몫했다. 끊임없는 방랑벽과 각종 연예 사건은 물론이고 몇 년씩 사라져버리곤 하는 괴이한 행태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외모도 독특했다. 깡마른 몸과 이글거리는 눈, 가는 목선에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은 그를 다른 세계와 통하는 인물로 여기게 했다. 그런 그가 일단 연주에 들어가면 미모의 소녀들과 부인들은 단번에 기절하곤 했다.그는 바이올린을 선양시켰으며 그 표현상의 가능성이나 가장 높은 포지션*을 강조하여 데망셰를 대담하게 활용함으로써 저음역에서 고음역으로, 또는 그 반대방향으로 바이올린의 기교를 탐구해 갔다. 넷째 현의 풍부한 가능성을 최초로 활용했으며, 이 넷째 현을 위하여 많은 곡을 만들었다(소나타 마리아 루이자, 나폴레옹, 군인, 감상적인 당당한 소나타, 3개의 변주된 테마). 그는 스코르다투라*를 구사하여 반음계법*에 의한 긴 악구를 작곡했다.

 

 

출처 : 클래식 사랑 그리고 인생
글쓴이 : 클래식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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