詠雪(영설)
閉戶何妨高臥客 폐호하방고와객
牛衣垂淚未歸身 우의수루미귀신
雲深山徑飄如席 운심삼경표여석
風捲長空聚若塵 풍권장공취약진
渚白非沙欺落雁 저백비사기낙안
窓明忽曉却愁人 창명홀효각수인
江南此月應梅發 강남차월응매발
傍水連天幾樹春 방수연천기수춘
숨어 사는 사람이니 문을 닫은들 어떠하리
쇠옷에 눈물지며 돌아가지 못하는 몸
깊은 구름은 산길에 돗자리처럼 나부끼고
바람은 말아서 긴 하늘에 티끌처럼 모인다
하얀 물가에 기러기는 모래인 줄 속아서 앉고
창이 밝자 문득 새벽 되니 도리어 시름 겹네
강남에는 이 때 응당 매화 피었으리니
♣이옥봉(李玉峰)
이옥봉은 조선 선조대왕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충북 옥원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났다. 옥봉은 호이고 이름은 원(媛)이었다. 일찍 출가했으나 남편을 여의였다. 조선시대 때는 한번 결혼했던 여자는 재혼할 수 없었으므로 옥봉은 수절하면서 고독을 달랬다. 다행히 시문에 능했기 때문에 시를 짓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녀의 시가 우연히 승지벼슬을 지낸 조원(趙瑗)에게 알려지게 되어 조원은 그의 시를 좋아 하게 되었다.그러던 어느날 옥봉이 조원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늠늠한 모습에 반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홀로 있던 옥봉은 조원에게 첩이 되길 간청했지만 선비의 법도에 충실했던 조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조원의 장인이 조원에게 권하여 옥봉을 첩으로 맞이하도록 한 것이다.
옥봉을 첩으로 맞아들인 조원이 삼척부사(1583-1586)로 부임할 때 옥봉이 따라와 부중에 살았다. 그런 연유로 삼척부사의 첩이던 그녀가 삼척부의 기생이라 와전되기도 했다.
한 번은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관가에 잡혀갔다는 하소연을 듣고, 옥봉이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다. 그 시를 본 파주목사가 산지기를 풀어주었다. 이 사실을 안 조원이 부녀자가 공사에 관여한다고 옥봉을 쫓아냈다.
옥봉은 뚝섬 근처에 방을 얻어 지내면서 조원의 마음을 돌려 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그 뒤 옥봉은 잠적하고 말았다. 그 후 40년 조선 인조 때 조원의 아들이 승지로 있을 때 중국에 가서, 중국의 원로대신으로부터 이옥봉의 시신을 찾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옥봉은 종이로 몸을 여러 겹으로 감고 물위에 떠 있었는데, 종이를 벗겨 보니 안에 감긴 종이에는 시가 빽빽히 적혀 있었고 '조선국 조원의 소실'이라 적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허난설헌이 규수시인 가운데 으뜸이고, 매창이 기생 가운데 첫째 시인라면, 옥봉은 부실(副室) 가운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작품이 전해졌고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 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작품으로 《영월도중(寧越途中)》 《만흥증랑(謾興贈郞)》 《추사(秋思)》 《자적(自適)》 《증운강(贈雲江)》 《규정(閨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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