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1860년 ~1880년]

[프랑스]Erik Satie

Bawoo 2017. 8. 6. 23:18


Erik Sa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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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May 1866 – 1 July 1925), who signed his name Erik Satie after 1884, was a French composer and pianist. Satie was a colourful figure in the early 20th-century Parisian avant-garde. His work was a precursor to later artistic movements such as minimalism, Surrealism, repetitive music, and the Theatre of the Absurd.[1]

 


[Best of Satie ]



에릭 알프레드 레슬리 사티(프랑스어: Éric Alfred Leslie Satie, 1866년 5월 17일 ~ 1925년 7월 1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884년 그의 첫 작품에 에릭 사티(Erik Satie)라고 c 대신 k를 써서 서명함으로써 그 이름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작곡 이외에도 사티는 가명을 사용해 다다이즘 전문지 391나 대중문화를 다루는 Vanity Fair지등에 많은 글을 투고하였다.

사티는 20세기 파리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인물로 꼽히며, 미니멀리즘이나 부조리극 등 20세기 예술운동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생애

노르망디에서 몽마르트르까지

에릭 사티는 옹플뢰르에서 태어나 네 살때 아버지가 파리에서 번역가로 일을 하게 되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그는 다시 동생 콘라드와 함께 옹플뢰르로 돌아가 조부모와 같이 살게 된다. 사티는 고향에서 한 오르가니스트에게 그의 첫 음악 수업을 받았다. 1878년, 사티의 조모도 세상을 뜨게 되고 사티와 그의 동생은 다시 파리로 가 재혼한 아버지와 다시 같이 살게 된다.


1879년에 사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교사들에게서 재능이 없다는 평을 듣게 된다. 2년 반 동안 고향에 돌아가 있었던 그는 다시 파리 음악원에 재입학하게 되는 데 여전히 그의 교사들은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고 1년 후 사티에게는 의무적인 입영장이 날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티는 군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했고 결국 몇 주 안가 탈영을 해버리게 된다.


1887년, 사티는 고향을 떠나 몽마르트르에 세를 들어 살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Patrice Contamine이라는 시인과 친교를 맺게 된다. 사티의 첫 작품도 그 당시 그의 아버지에 의해 출판되었고 르 샤트 누아르라는 카바레 카페의 단골이었던 드뷔시 등의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사티의 작품 짐노페디, 오지브, 노시엥 등도 이때 잇달아 출판되었다. 1890년, 그는 같은 도시에서 좀 더 작은 방을 구해 이사를 한다. 그 다음해에는 장미십자단에서 작곡과 카펠마이스터를 맡게 되고 이때 《Salut Drapeau!》, 《Le Fils des étoiles》, 《Sonneries de la Rose+Croix》 등의 작품을 쓰게 된다.


1892년 중반에 즈음하여 그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언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사티는 펠라당이 이끌고 있었던 장미십자단을 떠나 그의 친구 드 라뚜(Contamine de Latour)와 함께 발레작 유스푸드를 쓰기 시작했고 그의 생각에 공감했던 동료들은 그를 위해 독특한(마치 새로운 비밀종파의 팸플릿같은) 홍보 책자를 제작해준다. 또한 사티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낭만주의에 상당히 회의를 느끼고 있었으며, 《Le Bâtard de Tristan》이라는 이름의 반-바그너 주의 오페라의 초연을 광고하고 다녔으나 정작 작품은 작곡하지 않았다.

수잔 발라동과의 사랑

1893년, 사티는 화가이자 그림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사티는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 후 수잔은 사티가 살고있던 곳의 옆 방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사티는 점점 더 그녀에게 깊은 사랑을 느꼈다. 사티는 연애기간중 종종 흥분에 휩싸여 그녀에 관한 글을 쓰거나 "심신의 평화"를 찾기 위해 《Danses Gothiques》라는 작품을 썼고 수잔은 그의 초상화를 그려 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수잔 발라동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며 그를 떠났을 때 그는 아주 큰 비탄에 잠기게 되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사티의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연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죽음

사티는 1925년 7월 1일, 간경병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는 아르케이(Arcueil)에 있는 묘지에 묻혀있으며 아파트 건물 앞 잔디밭에는 작은 석고 기념물 'Pack Erik Satie'가 놓여져 있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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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는 1866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옹플뢰르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며, 13살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교수로부터 '형편없음. 앞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학교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1882년에 퇴학을 당했고, 그로부터 3년 후에 다시 학교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886년, 마지못해 군에 입대한 사티는 몇 달 후 일부러 기관지염에 걸려 제대했다. 그 후 아버지 집에서 나와 집시들이 많이 사는 몽마르트르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생계를 위해 〈검은 고양이〉라는 이름의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888년에 대표작 〈세 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를 발표했으며, 1890년에는 드뷔시를 만나 음악의 혁명가로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1891년, 사티는 장미십자교단 운동의 개척자 조세핀 펠라당에 감명을 받아 이 교단의 신자가 되었다. 한때 이를 위해 〈별의 아들들(Le fils des étoiles)〉, 〈장미십자교단의 3개의 종소리(Sonneries de la Rose+Croix)〉, 〈천국의 영웅적인 문의 전주곡(Prélude de La Porte héroïque du ciel)〉을 작곡할 정도로 열성이었으나 나중에 교단 사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교단에서 탈퇴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예수예술의 수도교회라는 교단을 창설해 이 교단의 유일한 신자가 되었으며, 직접 교구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1898년, 경제적으로 더 궁핍해진 사티는 방값이 싼 파리 남부 아르퀴유로 이사했다. 스스로 '미천한 우리의 여인'이라고 이름 붙인 초라한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이 무렵 그는 작곡가로서 기법적인 한계를 느꼈다. 보다 전문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1905년 댕디가 운영하는 스콜라 칸토룸에 들어갔다. 파리 음악원 때와는 달리 열심히 공부한 결과, 1908년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912년, 작곡가 라벨이 사티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사티의 새로운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젊은 작곡가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프랑스 6인조로 발전했다. 이들의 정신적 지원으로 사티는 음악적 신념을 고수할 수 있었다.

1915년에 시인 장 콕토를 만났다. 본래 은둔형 외톨이었던 사티는 장 콕토를 만나면서 다른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1917년, 사티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피카소가 무대 장치를 맡은 〈퍼레이드〉라는 발레극에 음악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평면적인 오케스트레이션과 기계적인 리듬, 기본적인 테마의 반복, 타이프라이터와 사이렌 소리 같은 잡음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를 참지 못한 사티는 평론가에게 욕설이 든 편지를 보냈으며, 이 때문에 고소를 당해 8일 동안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반감에도 젊은 예술가들은 사티를 음악적인 스승으로 받들었다. 사티 역시 이들에게 자신의 정신을 물려받은 새로운 음악의 탄생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그 후 젊은이들의 관심은 당시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트라빈스키로 옮겨 갔다. 사티는 체념한 듯 자신의 운명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이렇게 좌절을 맛보며 사티는 누추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고 혼자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화로 1925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티의 음악은 과거에 대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대를 풍미하던 낭만주의 음악은 물론, 바그너, 드뷔시, 인상주의에도 반기를 들었다. 그는 복잡하고 현학적인 음악, 아카데믹한 음악, 웅변적인 음악, 감정 과잉의 음악, 감각만을 앞세운 음악을 싫어했다. 그러면서 그가 추구한 단 하나의 이상은 바로 '단순함'이었다. 그는 음악 속에서 일체의 군더더기를 몰아내고 간결하고 명쾌함을 추구했다.

옹플뢰르에 있는 사티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사티의 음악을 가구음악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흘려버리듯 듣는 음악을 의미한다. 카바레의 손님이 자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연주를 멈추고 "제 음악은 집중해서 듣는 음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에서 그의 음악관을 알 수 있다.

사티의 음악은 짧고 간결하다. 전곡의 연주 시간이 3분 남짓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대표작인 〈세 개의 짐노페디〉도 길이가 짧다. 이 곡은 사티가 1888년 플로베르의 소설 《살랑보》를 읽고 작곡한 것이다.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졌던 의식 중 하나인데, 이 의식에서는 젊은이들이 나체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제1곡과 제3곡은 드뷔시에 의해, 제2곡은 리처드 존스에 의해 관현악곡으로 편곡되어 널리 연주된다. 사티는 각각의 곡에 템포와 분위기를 지정해 놓았는데, 제1곡은 느리고 비통하게, 제2곡은 느리고 슬프게, 제3곡은 느리고 장중하게 연주하도록 했다. 세 곡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음악적으로 볼 때 세 곡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리듬, 박자, 선율 진행, 형식, 분위기에서 서로 차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왼손의 반주는 미묘한 화음을 느린 템포로 계속 반복하고, 오른손의 멜로디는 단선율을 느리게 연주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리듬과 단순한 멜로디가 단조로운 인상을 주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곡이다.


사티는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와 '클루'라는 선술집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여기서 연주할 수 있는 가벼운 살롱음악이나 샹송을 많이 작곡했다. 오늘날 널리 불리고 있는 샹송 〈당신을 원해요(Je tu veux)〉도 이런 곡 중 하나이다.


당신을 원해요.
금빛 천사여, 도취된 열매여, 마력의 눈동자여,
나에게 그대 몸을 맡겨요.
당신을 원해요.
당신은 반드시 내 것이 될 거예요.
나의 여인이여, 어서 와서 내 고독을 봐 주세요.
우리는 최고의 행복을 맞을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을 기다리기가 힘들군요.


멜로디 어디에서도 클래식 음악의 고상함이나 고급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으며, 누구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가벼운 샹송이다.


사티의 작품 중에는 기발한 발상으로 주목받는 곡이 있다. 1893년에 발표한 〈짜증(Vexation)〉이라는 피아노곡이다. 이 곡의 악보는 한 페이지밖에 안 된다. 하지만 사티는 이것을 840번이나 반복하라고 악보에 써 놓았다. 이 지시에 따라 연주하면 전곡을 연주하는 데 대략 13시간 40분이 걸린다. 그래서인지 사티가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전곡이 연주된 적이 없다.


사티는 음악을 통해 풍자와 해학을 즐기기도 했다. 그는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犬)를 위하여〉, 〈배(梨)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끝에서 두 번째 사상〉 등 작품에 기발한 제목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1913년에 작곡한 피아노곡 〈바싹 말라버린 태아(Embryons desseches)〉도 특이한 제목을 갖고 있다. 제1곡 〈해삼〉은 돌멩이나 바위 위에 붙어 고양이처럼 그르렁대는 해삼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사티는 생 말로에서 해삼의 모습을 관찰했는데, 이것을 암시하기 위해 생 말로의 노래 선율로 곡을 시작한다. 제2곡 〈갑각류〉는 쇼팽의 〈장송 행진곡〉을 패러디한 것이다. 하지만 사티는 악보에 이 곡을 슈베르트의 마주르카라고 써 놓았다. 빤한 사실을 살짝 왜곡함으로써 뜻밖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려는 것이다. 제3곡 〈게〉는 개펄 위를 빠르게 걸으며 능숙하게 사냥하는 게의 모습을 빠른 템포의 경쾌한 터치로 그렸다. 뒤로 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다가 나중에 단호한 코다로 끝난다.

그 밖의 작품으로 〈그노시엔느〉, 〈가난한 자를 위한 미사〉, 〈까다로운 귀부인을 위한 세 개의 왈츠〉, 교향적 극음악 〈소크라테스〉 등이 있다.



출처:악사를 움직인 100인 | 저자진회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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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동시에 때로는 재기가 엿보이는 그의 양식은 20세기 프랑스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나 낙제하여 카페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890년경 장미 십자 교단과 관계를 가지면서 그 영향으로 〈빈자(貧者)의 미사 Messe des pauvres〉(1895)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1893년 27세 때 화가 쉬잔 발라동과 열애에 빠졌으며, 1898년부터 파리 근교 아르쾨유에서 혼자 비정상적으로 살면서 누구도 자신의 아파트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40세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3년간 뱅상 댕디와 알베르 루셀에게 배웠다.

1917년경에는 '프랑스 6인조'로 알려진 젊은 작곡가들이 사티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그후 그를 기려 다리우스 미요, 앙리 소제, 로제 데조르미에르와 같은 작곡가들이 포함된 아르쾨유 악파가 결성되었다.

사티의 음악은 프랑스 음악에서 19세기 낭만주의와의 분명한 단절을 처음으로 보여주며 아울러 인상주의와도 반대 입장에 선다.

다다이즘·초현실주의 미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그의 음악은 과장된 감정이나 초월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전통적 형식이나 조성 구조도 버리며, 패러디 형식을 취해 기괴한 제목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배 모양의 3개의 소품 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비틀린 태아 Embryons Desséchés〉 같은 제목을 가진 곡이 등장하며 '중병에 걸리듯이', '계란처럼 가볍게'와 같은 연주 기호를 붙여 인상주의자들을 놀리기도 한다.

그의 음악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박하고 괴상한 그의 성격은 때로 충격적이지만 하나의 통일된 인격으로 예술과 삶을 통합시킨다는 아방 가르드의 이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음악에서 과장된 감상을 벗겨내고, 엄격한 정수(精髓)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주고 있는 피아노 소품 〈3개의 그노시엔 Trois Gnossiennes〉(1890)에서는 마디선이나 조(調) 기호가 등장하지 않는다. 〈3개의 사라반드 Trois Saraban-des〉(1887)·〈3개의 짐노페디 Trois Gymnopédies〉(1888) 같은 또다른 초기 피아노 소품들은 새로운 화성을 시도하고 있으며 화성 개척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발레 음악 〈파라드 Parade〉(1917:레오니드 마신 안무, 장 콕토 대본, 파블로 피카소 무대장치·소품)는 타자기, 사이렌, 비행기 프로펠러, 시계 소리 녹음 테이프, 회전식 추첨기 등이 등장하고 있어 스트라빈스키나 다른 작곡가들에 의한 재즈 요소 사용을 예견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아폴리네르가 〈파라드〉에서 표제어로 썼던 말에서 유래한다.

사티의 걸작 〈소크라테스 Socrate〉(1918)는 4명의 소프라노와 실내 관현악단을 위한 음악으로 플라톤의 대화에 토대를 두고 작곡되었다. 5개의 〈야상곡 Nocturnes〉(1919)은 최후의 피아노곡으로 대단히 심각하다. 발레 〈휴식 Relâche〉(1924)은 피카비아와 공동 작업한 것으로 이 작품에는 르네 클레르의 초현실주의적인 영화 화면이 등장하고 있다. 영화 음악 〈영화 Entr'acte〉(또는 〈Cinéma〉)는 사티가 이상으로 삼았던 배경음악('가구'음악)의 일례이다.

그러나 사티는 그의 무례한 태도와 위트를 오해했던 다른 음악가들로부터 사기꾼으로 매도당했다.

그들은 사티의 인생에서 음악 외적인 영향, 예를 들어 마지막 10년 동안에도 가장 친하게 지낸, 카페 피아니스트 시절에 만났던 화가들의 영향에 대해 개탄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미요, 모리스 라벨, 클로드 드뷔시 같은 일류 작곡가들에게도 깊은 칭송을 받았으며 드뷔시와 30년 가까이 친교를 유지했다. 인상주의에 대해 조소하기는 했지만 영향을 주었으며 나중에 신고전주의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