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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실안인윤씨행장>, <삼한습유>, <복선화음가>의 경우
경화벌열의 경우는 그 물적인 토대를 권력에 두고 있었던 관계로 여성들의 관심 또한 권력의 향배에 민감했고 그것이 장편 대하 가문소설의 향유 형태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향촌사족층의 경우는 권력은 물론 관직 임용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가는 추세 속에서 그 물적 기반 자체가 근본적으로 동요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신분적 교양의 유지와 생계적 기반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아야만 하는 형국에 놓여 있었고, 여성들의 삶과 관심 또한 이 둘을 동시에 뒷받침해 내는 데 두어지게 된 연유로 그들이 향유 전승해 온 문학은 女範을 축으로 삼고 도는 여성가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평민층의 경우는 신분적 강제에 얽매인 정도를 따라 천차만별의 차별상을 드러내고 있어 일률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생존 번영의 물적 토대를 오직 자신들의 몸과 노동력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남녀를 막론하고 착취없는 세상을 꿈꾸며 ‘정당한 몸값’을 요구하였고, 그것이 여성적 관심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서사민요 시집살이노래였다고 할 수 있다.
중심이 되는 대상자료는 여성가사 중 하나인 <福善禍淫歌>인데, 이 작품이 산출되어 나온 사회사적인 맥락과 주제적 관심의 토대인 ‘의견의 풍토’를 살피기 위해 <亡室安人尹氏行狀>과 <三韓拾遺>를 아울러 검토해 보기로 한다.
<亡室安人尹氏行狀>은 18세기 초반의 여성행장 가운데 하나로서 巍巖 李柬(1677-1727)이 40에 早死한 아내 윤씨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고, <三韓拾遺>는 19세기 초반 竹溪 金紹行(1765-1859)이 그 유명한 향랑전설을 토대로 창작한 한문소설이다.
그러면 <亡室安人尹氏行狀>과 <三韓拾遺>를 차례로 살핀 후에 <福善禍淫歌>를 검토하고 이를 종합하여 매듭을 짓기로 한다.
<亡室安人尹氏行狀>은 京師의 부유한 벌열가 가운데 하나였던 坡平尹氏의 따님이 호서의 대표적인 산림학자였던 이간에게 시집을 와서 20년 결혼생활 동안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살다 간 사연과 행적을 남편 이간이 애처롭게 여겨 기록한 것이다.
" 안인은 어려서부터 단중하여 그 부모와 여러 형들이 享福安德의 그릇이라고 기대하였다. 좀 자라매 여공이며 음식조리에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16세에 어머니가 오랜 병고 끝에 돌아가시매 근심하고 슬퍼함이 지극하여 보는 이마다 감탄하였다.
이십에 시집을 오매 舅姑가 자녀 없이 늦게사 조카를 얻어 후사를 삼은 경우여서 며느리된 자가 설사 어질지 못할지라도 舅姑의 사랑하고 감싸심을 입었으련만 안인의 깊은 사랑과 지극한 정성은 性分에서 나온 것이어서 좌우에 承順하고 변함없이 敬謹하여 舅姑께서 깊이 愛重하셨다.
그러나 그 남편된 자가 본디 혹독하게 가난한 데다 성품 또한 우활하여서 가사에는 일찍이 한번도 마음 쓴 적이 없었기에, 무릇 제사며 노친 봉양, 가정사의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까지 안인이 실로 혼자 스스로 담당하여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밤낮으로 수고롭고 곤하였다.
곤고함의 극에서 혹 때로 슬피 탄식하는 말도 있었으나 그 마음은 늘 가정 일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세간의 속된 일들이 남편의 뜻을 방해하여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기에 늘 남편의 미간을 살펴 근심이 있는가 싶으면 문득 위로하여 해명하기를 “있고 없고 주리고 부른 것은 오직 내게 달린 일이니 장부께서 간여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제사엔 豊潔함엔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廢闕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고 노친 봉양엔 甘溫에까지 다다르지는 못했어도 얼고 주리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니 모두가 안인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 늘 이르는 말은 “제사하되 豊潔에 다다르지 못하니 廢闕함과 무엇이 다르며, 봉양하되 甘溫에 다다르지 못하니 얼고 주리게 함과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남편이 해지지 않은 온전한 옷 한 벌이 없을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어린 것이 병들어 맛있는 것을 먹이지 못할지라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자기 몸은 겨울에 솜옷을 입지 못하고 여름에 갈옷을 입지 못하며, 먹음에 든든치 못하고 잠자리에 침구를 갖추지 못하며, 머리에 다리를 얹지 못하고 발에 신이 없어 나들이를 못할 지경이었지만 터럭만큼도 괴로워하지 않고 이른 아침 늦은 밤 늘 급급하여 노친의 안색에 주린 빛이 있음을 至恨으로 여겨 아침 저녁 드릴 것이 있으면 저윽이 안도하였지만 그렇지 못하면 방과 뜰에서 골머리를 앓으며 동동거리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것만 같이 하였다.
이같이 조심조심 20년을 하루 같이 하다가 안인은 급거히 사라졌나니, 아아 슬프도다! 어찌 그리 궁핍했던고! " 1]
첫째의 문제는 자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타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산림학자의 길은 이 당시 지식인에게 주어진 코스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간은 송시열의 적통을 이은 수암 권상하의 수제자 가운데 하나로 강문팔학사의 하나였다. 과거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생계 문제에도 신경을 꺼 두고 오직 성리학의 깊은 경지를 개척해 들어가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코스였다.
여기서 명망을 얻어 산림으로서의 지도적 지위를 얻게 되면 여러 가지 명예직을 얻거나 실직에 나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을 거느리거나 길러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코스를 인정하고 또 기대했기에 윤씨는 현실적 노고의 극점에서도 남편의 心志를 빼앗지 않으려고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인용 대목에 후속하여 남편의 과거 응시를 스스로 만류하는 것도 그러한 연유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토록 궁핍의 문제가 발등의 불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로도 나아가지 않고 영농이나 다른 생계수단의 강구에도 눈을 감고 있어야만 하는 ‘기로에 선 知識人 家長의 문제’는 이 당시 수많은 班家 婦女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사회문제의 하나임을 알게 해 준다.
둘째의 문제는 좀더 특수한 경우지만, 이를 身分과 財富 사이의 편차 문제로 일반화한다면 이 당시 양반층 일반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간의 서술대로만 이해한다면 윤씨는 天性[性分] 자체가 어질어서 이 가난이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따라가 본다면, 豊潔을 결한 제사나 甘溫을 다하지 못하는 봉양을 내심에 늘 불안해하는 것이나, 飢寒에 떠는 老親들을 차마 보지 못하고 좌불안석하는 상태는 친가에서의 기준이 시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현상으로서, 아마도 이런 미흡에 대한 불만은 겉으로 발현되지 않는 대신 내심의 깊은 우울로 침전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간은 후속하여 아내 윤씨가 富裕 奢侈한 친가의 일족들과 어울리면서도 끝내 검박을 지키며 의연했던 사실을 다소 장황하게 특기하고 있지만, 늘 받기만 하고 갚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구천지하에 응당 負累之鬼가 되고 말겠구나!” 2]하고 깊이 탄식했다는 기록을 통해 보면 평생 윤씨의 내심에 쌓인 수모와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경사의 벌열가에서 산림학자의 淸名을 택하여 혼인이 이루어진 경우이겠지만, 빈부의 격차가 시집살이를 어떻게 규정해 주고 있는가의 생생한 한 실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凡人有所贈遺 不計多少 輒懷愁歎曰 平生未嘗遺人 而每受人遺 是豈人心之所安者 如是寒乞無償還之日 則九地之下 當爲負累之鬼矣 其心痛楚 不啻若疾疢 噫 其狷介潔濯 有如此者 而安人之今亡矣”
셋째의 문제는 문면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지만, 윤씨가 이토록 舅姑 섬김에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것은 세대간의 윤리적 기대지평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간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윤씨의 효성이란 천성에서 말미암는 측면이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이 시대 대부분의 부녀행장이 드러내고 있는 바와 같이 이전 세대에서 공고하게 규정된 윤리적 관습이란 측면이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무릇 바람직한 윤리란 시대가 달라지고 문명적 조건이나 물적인 토대가 변하는 것을 따라 경우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는데, 이 시대 班家 一般의 풍토는 상하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전시대의 규범을 묵수하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알고 융통의 여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윤씨의 고통과 불행은 더욱 가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윤씨가 죽고 나서도 舅姑는 버젓이 좋은 세월을 누리고 있음을 보아서도 이 시대 윤리의 姑息性은 그 矛盾의 斷面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3] 위의 책, 522-523면.
본고에서는 초점을 달리하여 작품의 초두에 논쟁적인 형태로 길게 전개되고 있는 擇壻談論과 그 因果的 歸結이라 할 수 있는 시집살이의 실제에 초점을 맞추어 혼인의 문제와 관련한 작가의식의 실체를 구명해 보고자 한다. 작가 김소행은 벌열가문의 하나인 안동김씨로 文才가 뛰어나고 기골이 장대한 호남자였지만, 庶孫이란 멍에에 묶여 청풍의 능강동에 묻혀 살았고 평생을 강호를 주유하며 문장으로 세상을 조롱했던 것으로 보인다. 6]
특히 가난의 문제에 대한 자의식이나 콤플렉스가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나이 50세는 자녀들의 혼사 및 결혼생활과 관련하여 한층 더 이 가난의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였을 것으로 보인다. 7]
삼한습유를 통해서 첨예하게 다뤄지고 있는 가난의 문제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작의 변이라 할 수 있는 작품 말미의 <誌作記>에도 이 擇壻와 관련한 빈부의 문제는 글 전체의 절반에 걸쳐 진지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는 결혼생활의 성패 문제를 남자의 賢否에 달린 것으로 보고 “嫁女必擇賢者”를 못 박은 후에 후속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4]박일용, 삼한습유를 통해서 본 김소행의 작가의식, 한국학보, 제42집, 1986 봄.
5]박일용, 삼한습유를 통해서 본 김소행의 작가의식, 한국학보, 제42집, 1986 봄./ 조혜란, 삼한습유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1993./ 장효현, 삼한습유에 나타난 열녀의 형상, 조선시대의 열녀담론, 한국고전여성문학회, 월인, 2002.6.
6]道軒 金雲淳(1798-1870)의 문집인 道軒遺稿에 그의 三從祖였던 金紹行에 관한 일화와 행적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으며, 그의 글 <山中閒話幷序>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그의 호가 竹溪가 아닌 石溪로 되어 있는데 행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석계공께서 늦게 사람의 간청에 못 이겨 향랑전이라 하는 소설 한 권을 지으셨는데 반 나절에 붓을 들고 부르며 지어쓰셨다. 그 당시 조야를 막론하고 선비들이 이 저서를 큰 문장이라 일컬었으며, 마침 중국에 가는 사신이 이 저서를 가지고 가서 중국 사람에게 보이니 중국에서 이렇다 하는 문장 대가들이 보고는 천하 문장이라 경탄하면서 은전 300량을 주고 사 갔다. 수는 구십 오세를 사셨으니 天爵이라고 하는 수는 받았으나 평생 가난하게 사셨다. 선생께서는 부모에게 효행은 물론이요, 도에도 돈독하셨다. 해어진 베옷에 추한 신을 신고 세상을 떠돌며 부귀영화에 얽매여 사는 자들을 조롱하셨으되 누구 하나 감히 상대를 하지 못하고 모두 그 비난하는 말에 복종하였다. 육십여 세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바위틈 굴 속에서 세상을 마치셨다. 내 나이 열 둘에 마침 선생께서 오시어 뵙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신장이 8척 남짓 되고 비범하게 생기셨으며 소리 또한 웅장하셨다. 집안 어른들게 듣자오면 용맹과 힘이 뛰어나 누구도 그 힘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7]이와 관련하여 도헌유고의 후속 언급도 참고가 된다.
“지금 선생께서 지으신 서문을 보니 선생의 배위이신 삼종조모께서도 정숙한 덕과 억양 반복하고 변화무쌍한 법도와 행실이 선생과 같아 군자와 숙녀의 어진 배필이시다. 그런데 이름이 묻히고 전해지지 못했으며, 자손도 번성하지 못하고 가난하여 높으신 덕을 계승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내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서문을 베껴다 이 책에 기록하여 후손에게 보여주어 선조의 이러하신 분이 있었다 함을 알게 하고 또 본받게 하는 것이다.”
"대개 천하에 不賢者가 많은데 富란 천하가 다 흠모하는 것이요 貧이란 천하가 다 혐오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도 “가난해도 즐거워하고 부해지더라도 예를 좋아하거라” 말씀하셨지만, 예로부터 이제까지 능히 이리 할 수 있는 자가 그 몇이나 되겠는가? 대저 부자란 淫逸에 습관이 되어버려 늘 먹고 입는 것으로써 남을 무시하고 사람의 도리가 있는 것을 아지 못한다.
대저 색을 기뻐하고 돈을 좋아하는 마음으로써 그 勢가 족히 널리 구하여 그 適意하기를 힘쓰니 골짜기나 큰 구렁이라도 메울 지경이다. 대저 사람의 도리를 아지 못하고 욕심 채우기만을 마음을 써서 한 지어미에게 갖추 구한다면 비록 莊姜의 아름다움, 班姬의 어짐이라도 보존키가 어려울 터인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자랴! 古人이 이르시기를 “가난하면 아내를 가리지 않는다” 또는 “어미가 친히 물긷고 절구질할 정도면 아내를 고르지 않고 얻는다” 하였으니 그 형세가 그런 것이다. 형세의 어떠함에 따라 그 실정도 달라지는 법이다. 인심이 제각기 다르니 내가 감히 부자는 모두 淫하고 빈자는 모두 材라 할 수는 없지만, 부부가 서로 등져 떨어지는 일은 부자들에게 많고 빈자들에겐 드무니 그 형세가 시키는 바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작기>의 택서담론은 부자 사위를 강력히 배격하고 현자 사위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首尾雙關의 수사적 장치까지 동원해가며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此義’ ‘此理’로 지칭해 가면서 확고부동의 기준이나 원리처럼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삼한습유>의 가장 중요한 창작 동기 가운데 하나는 擇壻訓의 제시라 할 수 있겠고, 이는 김소행으로 대표되는 향촌 한사층의 현실인식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혐오에 가까울 정도의 富에 대한 부정적 인식, 양반 지식인으로소의 교양이며 예, 덕성, 재능 등에 관한 꼿꼿한 자존심; 이것이 이 작품에서 ‘향랑’이라는 여주인공을 통하여 김소행이 형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내심의 실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우려 속에 시발된 혼인은 신랑의 무례와 시어미의 질시 모욕 속에서 점점 더 꼬여만 간다.
시어미는 첫대면에서 복식이며 기명이 없음을 이유로 노기를 띠고 사당 참배를 시키지 않은 채, ‘신부의 이름(새애기)’으로 호칭하지를 않고 ‘貧家女(가난뱅이집 딸내미)’라 부른다.
“내 집의 이만한 부라면 어디서 아리따운 며느리를 얻지 못하겠는가? 폐백을 이리 터무니없이 하여 큰 챙피를 끼치다니 진작에 이럴 줄을 알았으면 누가 인물만 보고 취했겠는가?”
공언하고 있는 것은 시어미의 가치관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친정어미의 ‘羨富 低姿勢’와 시어미의 ‘恃富 高姿勢’가 기묘하게 맞물려 있는 양상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작가 김소행 자신의 擇壻論을 위한 전략적 배치로 이해될 수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소행 당대의 부녀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물질적 가치관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현상으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 양자는 동떨어진 별개였다기보다는 작가의 의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우랩되면서 산출되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 동원되고 있는 부녀들의 말씨나 행태가 비록 한문으로 표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연 그대로의 생생한 육성과 실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아마도 김소행 자신이 갈수록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는 자기 계층 아내들의 행태를 일상의 현실로 수용할 수밖에는 없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는 징표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삐걱거리며 출발한 富家 시집살이는 향랑이 아무리 禮로서 몸을 가누고 행동거지를 바로 해도 도리어 혐오와 반목의 골을 깊게 할 뿐 개선의 계기를 얻지 못한다. 12] 그러다가 하루는 남편이 대낮에 술이 취해서 狂悖히 내당으로 들어와 동침을 요구했을 때 향랑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바른 말, 쌓인 말을 쏟아 놓는다.
이에 사내는 격분하고 시어미가 맞장구를 쳐서 며느리를 성토하고 숨겨온 情人이 있는 것이라 모함까지 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몬다. 이 때에 이루어지는 시어미와 향랑 사이의 대거리가 매우 흥미롭게 그려져 있고, 여기서 우리는 향랑의 인물형상이 지니는 사회사적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포착해 낼 수가 있다. 입에 게거품을 물고 눈에 불을 쓰며 지팡이를 탕탕 쳐 대는 시어미에게 보이는 향랑의 반응을 먼저 보기로 한다.
" 그녀는 물러나와 뜰에 서서 참아 똑바로 마주 보지를 못하고, 시어미의 기세가 점점 더 급박해지는 것을 괴로이 지켜 보다가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몸은 대문을 향하고 얼굴만 돌려서 한숨을 쉬고 웃으며 이르기를 “죄를 덮어 씌우시려면 무슨 말인들 못하시겠어요? 가난이 죄라면 전들 어쩌겠어요? 그 實情 밖의 말씀은 규중 여자로서 감히 들을 수도 없으니, 鄘風에 읊었듯이 ‘이르려 들면 도리어 말이 추해지고, 되뇌인다면 오히려 말이 욕되다’는 격이네요. 죽음이 있을 따름 어찌 감히 非禮之言으로 제 혀를 더럽히겠어요?”"
한 수 아래의 사람을 지도하거나 훈계하는 투에 가깝다. 이 광란의 와중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조리정연하게 따지고 드는 며느리는 마침내 이 단순한 시어미를 광란의 지경으로 몰고 간다.
"시어미 더욱 화가 나서 기둥을 차고는 고꾸라지며 느린 소리로 ‘아아…’ 빠른 소리로 ‘호오…!’ 짧은 소리로 ‘으윽…!’ 긴 소리로 ‘우우…’ 하니, 목소리가 언 듯 미끌어지다가 혓소리가 선뜻 나오며 중언부언하다가는 소리가 얽혔다 풀렸다 하면서 곰이 포효하듯 여우가 울듯,
“이년! 이년! 시에미를 능멸하고 남편을 속이는 년이 예의를 들먹이다니 네 필시 저자 거리에 어울하게 매달린 숙손통의 후신이렸다! 내 네년 볼 때마다 심장과 간담이 땅에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 이처럼 내게 무례하니, 천한 여편네가 어찌 감히 禮도 알고 義도 알고 주둥이 날카롭고 혓바닥 긴 傾國 傾城의 艶妻 哲婦의 시어미 노릇을 한단 말이냐!” 하고는 즉시 아들을 명하여 가마를 메워 돌려 보내라 일렀다."
이렇게 모질게 내침을 당하지만 향랑은 堂에 올라 그 실성한 시어미 앞에 再拜를 하고 온유한 음성으로 정중한 하직 인사와 축원의 말까지를 다 갖추고 비로소 가마에 오른다.
박절하게 내침을 당한다는 점에서는 최초의 향랑전이나 여타의 향랑전과 다름이 없지만 쫒겨가는 향랑의 형상은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향랑은 돈만 알고 예와 덕을 모르는 시어미와 그 아들을 도덕적으로 심판하고 징치하는 위치에 있고, 모든 부딛침에서 항상 한 수 위의 경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문면에 명시된 것은 없지만, 향랑의 가문은 문한의 전통이 이어져 온 전통사족에 가까워 보이고 媤家의 경우는 부를 토대로 신분상승을 이룬 겨우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아마도 재부와 신분 사이, 재물과 덕성 사이, 衣食과 교양 사이에서 신분, 덕성, 교양의 쪽을 더 중시하는 김소행의 관점이 서술의 실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삼한습유>의 향랑은 작가 김소행 자신의 택서담론을 입증해 내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富裕한 媤家에 투입되었다가 다시 귀환시킨 존재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삼십에 장가를들어 아내를 둔다고 공자가 하신 말씀이 꼭 예에 맞는다고 본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골격이 튼튼하게 이루지 못하고 심지가 확고히 서지 못하며 학업도 넓이 성취하지 못하고 물리도 밝지 못하여 건곤천지의 도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강유의 덕이 순하지 못하며 주역에서 말한 咸恒의 의에 밝지 못하여 사람의 기강이 서지 못하고 가도가 이루지 못한다. 그리하여 부부 간에 욕심이 발동하여 지켜야 할 부부유별의 의리를 상실하고 그저 정으로만 살게 된다.”
9]어미는 開口 劈頭에 “天下之惡 莫甚於貧”이라 전제를 해두고 조목 조목 그 이유를 열거하고 있는데, 체험적 실감이 배어있는 현실주의 논리라 할 수 있다. 그는 가난 때문에 수모를 당한 수많은 역사인물들을 열거하고, 子路와 太史公의 말을 이끌어 어질다는 東家之子의 곤경과 한계를 西家之子의 富가 줄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에 비겨 논한 후에, ‘어질기만 하면 후일에 부귀케 될 수도 있다’ 는 것이 헛된 기대일 뿐임을 강조하고 딸을 결코 ‘弱國之大夫’ 신세로 만들 수 없다고 완강히 배수진을 치고 있다. 이는 가난에 찌들리고 가난살이에 물리고 가난고생에 데어버린 향촌사족층 아내의 뼈저린 외침일 것으로 보인다.
10]明日 당장 富家 쪽으로 통첩하기로 결정이 된 그 불면의 밤에 향랑은 병풍의 원앙을 보면서 고시 한 편을 짓는데, 특히 그 마지막 두 구절 “豈有他故兮 哀余時之不當, 假毛羽於丹靑兮 羨禽鳥之翶翔”이 눈물겨운 바가 있다. 모든 것을 때를 만나지 못한 운명에 돌리고 병풍의 새처럼 날개를 얻어 도피해 버리고 싶다고 하소연하고 있는데, 원치 않는 시집으로 내몰리는 처녀의 심정이 대개 이와 같으리라 여겨진다.
11]이러한 특징은 조혜란이 적실히 잘 잡아 지적한 바 있다.[조혜란, 삼한습유 연구(이화여대 박사논문, 1993), 160-172면. “향랑의 어머니와 시어머니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대사는 마치 말을 옮겨 적어 놓은 듯이 자연스럽고도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161면]
12] 그 구체적인 서술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다만 공경히 婦道 지키기를 마음에 두고, 쓰설이며 난방 살피기를 거르지 않고, 좋은 음식 극히 맛있게 만들어 내기를 날로 더욱 힘써 세월을 보내매, 참을 인자를 살 길로 여기며 몇 개월을 보냈으나, 남편은 狂悖함이 더욱 심해지고 시어미까지 그것을 북돋워서 두 사람의 怒가 번갈아 공격하더니 危辱이 한꺼번에 이르러 부엌 일마저 간여치 못하게 하고…”
그동안 작품의 주제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둘러싸고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맞서 있는 형국이다. 하나는 이 작품이 여성들의 도덕성에 낭만적인 보상을 안기는 형태일 뿐 가부장제적 유가이념의 강고한 틀을 그대로 강제하고 있다는 면에서 여전히 여성억압적으로 작용한 것임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15]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사의 장르운동에 비추어 이 작품의 진보적 의의를 인정하거나, 16] 계녀가의 전통윤리를 外皮化해 두고 텍스트의 내부나 이면이나 행간 속에 여성들 자신의 욕망이나 꿈을 다양하게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진보적인 의의를 찾는 견해이다. 17]
그리고 최근에는 이 작품의 대중적인 소통에 따른 교양물화 양상을 주목하고 “<계녀가>류 가사는 이념적 세뇌 기능을 수행했다는 혐의를 받기 쉽지만 작품소통의 실질은 이와 달리 고난을 헤쳐 나온 여성의 자긍이나 올바른 행실에 관한 품위있는 교양의식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고 다소 중립적인 견해를 제출하는 연구자도 있다.18]
14]성무경, 복선화음가류 가사의 이본현황과 텍스트 소통, 신발굴 자료를 통해 본 가사문학의 재인식(2002년 민족문학사학회 공개학술발표회 자료집), 2002.12.
15]장정수, 복선화음가 연구-여성형상과 치산의 의미를 중심으로, 19세기 시가문학의 탐구, 고려대학교 고전문학 한문학 연구회, 집문당, 1995.
16]서영숙, 복선화음가류 가사의 서술구조와 의미, 한국여성가사연구, 국학자료원, 1996.
17]이동연, 조선후기 여성치산과 <복선화음가>,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4집, 2002.6.
18]성무경, 복선화음가류 가사의 이본현황과 텍스트 소통, 신발굴 자료를 통해 본 가사문학의 재인식(2002년 민족문학사학회 공개학술발표회 자료집), 2002.12.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를 존중하면서 방향을 좀 달리하여 이 작품의 초기적 산출이라 할 수 있는 계녀형으로부터 좀더 변형 발전된 형태로서의 전기형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의 산출 변형에 관여하는 근본적인 추동력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모든 이본군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김부인 자신의 시집살이 서사에 관련된 대목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우선 서두를 보면 다음과 같다.
2 不幸하다 이내 몸이 女子가 되어 나서
3 김익주의 孫女 되어 班閥도 좋거니와
4 金玉 같이 貴히 길너 五六歲 자란 후에
5 女工을 배와 내니 재주도 非凡하다
6 月下에 수 놓기난 姮娥의 手法이요
7 月支에의 깁 짜기난 織女의 솜씨로다
8 烈女傳 孝經篇을 十歲에 외와 내니
9 行動擧止 處身凡節 뉘 아니 稱讚하리
10 錦衣玉食 쌓였으니 飢寒을 어찌 알리
11 百花芳草 花園上에 春景도 구경하고
12 淸風明月 玉閨 中에 달빛도 구경하고
13 新新別味 茶啖床도 입맛 없어 못다 먹고
14 鴛鴦衾枕 紅閨 중에 冊子도 구경하고
이상과 같이 친정에서의 생활은 화려할 정도로 유복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반벌을 가려 강호로 출가한 이후 시집살이의 고생은 가난의 문제와 겹쳐 매우 극난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항목의 가감이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36 甘旨의 父母供養 무엇으로 하잔 말가
37 銀竹節 전당잡혀 쌀을 팔고 반찬 사고
38 四五日 지낸 후에 이식이 장식이라
39 婚需한 것 많건마는 글로 어이 支撑하며
40 親家의 약간 구제 글로 어이 지탱하리
41 天皇씨 서방님은 글 외에 무얼 알며
42 年晩하신 媤父母난 다만 妄靈 뿐이로다
43 암상한 시누의는 없는 謀害 무삼일고
44 듣고도 못 듣는 체 보고도 못 보난 체
45 말 못하난 벙어린 체 노음 없는 병신인 체
46 無罪코 애매한 말 고개 숙여 잠잠 들어
47 年晩하신 父母 마암 행여 혹시 거사릴까
48 親庭 생각 하난 마암 어대 가 辭色하며
49 舅姑 앞에 웃난 낯이 저 즐거워 그러할까
50 저 개떡 보리 죽을 耽耽하야 甘食하며
51 六升木 四升布를 가느니 곱다 하며
52 기울고 푸른 사발 눈에 들어 곱다 할가
53 일곱 되 팔아온 쌀 꾸어 온 콩 두어 되를
54 조심하야 받아놓고 뜻을 순케 하오며
55 破器皿 추슬키난 媤家 尊重 하옴이라
56 날고 기난 개 닭인들 어룬 앞에 감히 치며
57 婦人의 音聲이 門밖에 감히 나며
58 해가 저 黃昏되면 罪아니 지은 것이 多幸이며
59 닭이 울어 새벽 되면 오날 해를 어찌하리
60 兢兢戰戰 하난 마암 시각인들 잊을손가
61 행여나 눈에 날까 조심도 무궁하다
62 親家의 書辭에도 서러운 事緣 부질없다
63 신신찮은 달란 소리 한번 두 번 아니여든
64 번번히 어찌하리 자식 된 이내 마암
65 父母를 조르기난 뉘 죄라 하잔말가
66 雪梅를 급히 불러 동녘 집에 보냈더니
67 돌아와 하난 말이 먼저 꾼 쌀 아니 갚고
68 廉恥없이 또 왔나냐 두말 말고 바삐 가라
70 錢穀을 몰랐더니 一朝에 貧賤하니
71 이대도록 되얐난가 耳目口鼻 같이 있고
72 手足이 성성하니 제 힘써 治産하면
73 어내 누가 是非하리 저런 욕을 免하리라
74 분한 마암 깨쳐 먹고 治産凡節 힘쓰리라
75 金富者 李富者난 씨가 근본 부자리요
76 밤낮없이 힘써 벌면 낸들 아니 그러할까
77 五色唐絲 五色 실을 줄줄이 자아 내여
78 육황기 큰 베틀에 匹匹히 끊어 내니
79 翰林 注書 朝服이며 兵使 水使 戎服이며
80 綠衣紅裳 處女治粧 靑絲幅巾 少年 衣服
81 어린 아해 色옷이며 팔십 노인 핫옷이며
82 鴛鴦衾 繡놓기와 鳳凰緞 紋采 놓기
83 낮이면 두 匹이요 밤이면 다섯 가지
84 뽕을 따 누에치며 田畓 얻어 농사하기
85 때를 좇아 힘써 하니 家産이 稍成이라
86 고은 衣服 던져두고 몽당치마 둘러 입고
87 가지 외 굵게 길러 東市에 팔라 하며
88 닭을 치며 개를 쳐서 市場에 팔아 오며
89 저녁에 불을 써서 새벽밥을 이워 하고
90 알알이 하여 먹고 푼푼이 모아 내니
91 兩이 모여 관이 되며 관이 모여 백이 된다
92 앞들에 논을 사고 뒷들에 밭을 사고
93 울을 헐고 담을 싸며 띠를 걷고 기와이고
94 가마솥이 죽죽이요 廚廳하님 雙雙이라
95 안팎 中間 소슬 大門 노새 나구 버려 섰고
96 오려 타작 一白石은 天字庫에 쌓아 두고
97 늦벼 타작 三百石은 地字庫에 쌓아 두고
98 돈도 거의 千餘兩은 要用所致 餘足하다
99 시집온지 十年만에 家産이 十萬이라
100 때때로 소를 잡아 父母를 奉養하고
101 綾羅錦繡 옷을 지어 철철이 갈아입고
102 떠난 사람 옷을 주며 주린 사람 밥을 주며
103 婚姻 葬事 못 지내면 돈을 주어 救濟하고
104 窮交 貧族 못 사난 이 내 힘대로 救濟하고
105 가간하다 하는 要用 日用이 百金이라
106 아들 兄弟 及第하야 벼슬도 爀爀하다
107 內外 偕老 富貴하니 팔자도 거룩하다
108 딸을 길너 出嫁할 제 손을 잡고 이른 말이
대개 이와 같이 영농이나 길쌈 중심의 치산을 통해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한 후에 구제도 하고 자식 공부를 시키고 이본에 따라서는 잔치나 풍류를 거창하게 벌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절정의 끝에서 딸의 출가 문제를 등장시키고 있다. 이후의 구도는 참으로 다양하여 1차 계녀훈으로 매듭을 짓는 경우에서 1차 계녀훈 뒤에 괴똥어미 사적을 덧붙이고 다시 2차 계녀훈을 첨가하는 경우, 계녀훈 없이 바로 괴똥어미 사적을 자신의 행적에 덧붙이어 병렬하고 나서 마지막에 계녀훈을 두는 경우 등등 편차가 심하다.
마지막에 붙는 계녀사의 끝은 대개 울먹이는 어조에 가까울 정도로 교술로부터 서정으로 급한 경사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245 어미 行實 본을 받아 괴똥어미 警戒하라
246 딸아 딸아 아기 딸아 어미 마음 심란하다
247 女子의 有行에 父母兄弟 멀었으니
248 明春 三月 봄이 되면 너를 다시 만나리라
19]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家傳 <우암선생계녀서>를 베껴 주고 誦習을 명했던 宋秉珣(1839-1912)의 경우가 특할 만하다. 그는 1891년 3월 자부를 맞으면서 손수 이 계녀서를 베껴서 주고 가문의 구규를 준수할 것을 명했다하는데[宋曾憲, 後菴文集(한국역대문집총서 449, 경인문화사) 卷之十 <皇考府君行狀>, 327면.
“辛卯正月 行不肖冠禮 三月 子婦于歸 先君手抄文正公戒女書 授子婦曰 誦習此訓 毋失吾家舊規“], 이 경우 경제적인 빈궁으로 말미암아 班家의 며느리 노릇 아내 노릇이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상동, 342면. ”家甚貧寠 備嘗酸寒 爲供賓客 至鬻銀環 不使夫子知之 先君嘗曰 吾之安貧讀書 得於內助者多“]
20]권순회에 의하면 <초당문답가>의 경우도 초기 이본인 <오륜행록>의 경우 대화의 짝을 이루는 <백발편>, <역대편>, <지기편>, <붕우편>, <개몽편>, <경신편>, <낙지편> 등이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초당문답가>는 다른 교훈류 가사와 같이 명령형 서술형태에서 점차 문답구조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밝히고 있다.[권순회, 초당문답가의 이본양상과 주제적 의미, 19세기 시가문학의 탐구, 고려대학교 고전문학 한문학 연구회, 집문당, 1995. 353면.]
백발노인은 초당주인에게 자신을 비웃지 말라고 하며 자신도 본래는 양반으로 의식 걱정을 안해도 될 처지였으나 청춘시절을 허랑하게 보낸 결과 수신제가에 실패하여 오늘과 같이 비참한 꼴이 되었다고 자탄하면서 전편에 걸쳐 헛된 공명의식을 멀리하고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자족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헛된 공명의식은 부질없는 것이니 가정을 조정같이 여기고 수신제가에 힘쓸 것을 당부하는데, 이에 맞게 오륜 중 사군, 붕우는 극도로 축소되고, 부자와 부부가 확장되어 있으며 특히 <치산편>은 여타 교훈류 가사의 그것에 비해 분량이 훨씬 길뿐만 아니라 내용도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유구즉 필식허고/ 유식즉 필현이라/ 예절도 의식이요/ 셰도 의식이요/ 친구도 의식이요/ 공명도 의식이요/ 의식이 유족허면/ 식 나셔 글 일키고…” 등의 구절을 보면 예절이나 교양 등 일체의 관념을 후차적인 것으로 돌려 버리면서 의식이 해결된 연후에야 나머지가 가능한 것임을 거듭 거듭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특히 “선빈천 후부귀을/ 남의 불음 더욱 죠며/ 선부귀 후빈천은/ 남의 우슘 더욱 슬타…”하는 구절, 즉 빈천화냐 부귀화냐의 문제를 대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선빈천 후부귀’의 사례와 ‘선부귀 후빈천’의 사례를 병립시킨 <복선화음가>의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모두가 동일한 의식, 동일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同根異枝的 산출로서, 이 시대 의견의 풍토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농가월령가>의 경우도 훈민 이데올로기나 중농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파악하기에 앞서 다산의 후속 세대 사대부들의 귀농추이와 관련하여 파악해 둘 필요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存齋全書』 25권 상 하 2질(경인문화사 영인본), <自悔歌>
<紅閨勸獎歌>를 비롯한 <복선화음가> 이본들.
李柬, <亡室安人尹氏行狀>, 巍巖遺稿 권16, 한국역대문집총간 190.
金紹行, <三韓拾遺>, (필사본, 서울대도서관 소장본).
金紹行, <山中閒話幷序>, 道軒遺稿[金雲淳 저, 김석진 역, 대전, 1996) 수록.
宋曾憲, 後菴文集(한국역대문집총서 449, 경인문화사) 卷之十 <皇考府君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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