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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한국의 예술과 낭만, 그리고 섹슈얼리티
박용태
<목차>
1. 기생, 그 특별한 문화에 담겨진 예술과 낭만과 섹슈얼리티
2. ‘게이샤’와 ‘기생’
3. 개화기 서구인에 비친 기생의 예술적 면모와 섹슈얼리티
4. 예능과 섹슈얼리티
4-1. 에로티시즘과 낭만적 사랑의 페이소스
4-2. 학문과 예술 문화의 도도한 교양인
4-3. 지조와 절개의 시대인
5. 나오며: 굴절된 에로티시즘에서 창조적 엔터테이너로
1. 기생, 그 특별한 문화에 담겨진 예술과 낭만과 섹슈얼리티
한국의 역사에는 많은 영웅과 위인, 문인과 예인(藝人), 그리고 기인(奇人)과 가인(佳人)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문인이자 예인이기도 하며 시대를 희롱하며 살아간 대표적 기인은 아마 방랑시인 김삿갓과 송도 기생 황진이일 것입니다. 특히 황진이는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시문(詩文)을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뿐더러 빼어난 미모의 여인으로서 당시 수많은 남자들의 가슴에 연심을 던지는 로맨틱한 가인의 면모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실제 황진이(黃眞伊)만큼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물은 흔치 않습니다.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도 수차례 만들어져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여성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역사상 최고의 미모와 재능, 그리고 도전 정신으로 충만했던 여성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의 역사인물 중에서 일반 여성으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신사임당과 황진이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사임당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거의 없는 반면, 황진이는 매력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세대를 달리하면서 늘 새로운 여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20세기 이후에도 전경린, 김탁환, 최인호와 같은 유명한 작가들도 황진이의 예술과 삶을 중심으로 일대기를 그려냈습니다.
또한 2006년 하반기에는 한국의 국영 공중파 방송사에서 황진이를 소재로 한 24부작의 드라마를 제작하였으며 2007년에는 한국의 유명 한류배우 송혜교가 황진이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가 제작되어 본격적인 한류 작품의 대표 콘텐츠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황진이가 한국역사의 대표적 여성 콘텐츠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녀가 평범한 아낙이 아니라 ‘기생’이라는 매우 특수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 시대인 조선사회는 남녀의 차별과 여성에 대한 억압이 매우 심한 사회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규방의 여성들은 남성과의 접촉에서 제한적이었으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접근 또한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런 사회 상황에서 기생은 어느 한편으로 남자들의 섹슈얼리티에 조응하는 존재이기도 하였으며, 다시 이를 위한 문학과 예술, 그리고 낭만적인 삶을 배우고 영위할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러한 당시 사회의 상충된 제약과 관용을 연결시킬 수 있는 직업이 ‘기생’ 또는 ‘기녀’이었던 것입니다. 기녀는 조선사회에서 남성과 공식적으로 관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기녀 출신인 황진이는 ‘음란’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시와 음악은 기녀라면 갖추어야 할 재능이었고, 아름다운 외모에 재능까지 갖춘 황진이는 남성들의 권력을 무너뜨리지 않는 기녀였습니다. 이것은 전통사회인 조선시대를 지난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관심있고 궁금한 소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생’ 또는 ‘기녀’를 매개로 한국 전통사회의 문화와 예술, 낭만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호기심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문화의 매우 색다른 부분을 섭렵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게이샤’와 ‘기생’
어떤 측면에서 보면 조선의 기생은 종합 엔터테이너이자 전통문화의 계승자였고,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시․서․화 등 남자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 집단이었습니다.
시․서․화는 물론 춤과 노래 등에 능했던 기생들은 사대부들과 시재를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외부 여인들이었습니다. 기생들은 조선시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장악원(掌樂院)1)에 소속되어 집중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구한말까지 이어진다. 관기가 사라진 뒤에는 평양기생학교와 같은 사설 기생학교가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기생수업은 총 3년 과정으로 예술, 산술은 물론 외국 예술까지 섭렵합니다.
그러나 기생 문화는 구한말을 거치며 철저히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생들이 설 무대는 요리집뿐이었으며 특히 일본 식민지 시대의 공창제도는 매춘부와 예인 집단이었던 기생을 함께 묶어버리면서 기생의 이미지를 상당히 왜곡시켰습니다.
기녀가 가지고 있는 전통예술의 전문가라는 측면은 도외시되고 점차 유녀(遊女)라든지 천대받는 사람들로 기생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다. 일본에서 게이샤가 오늘날까지도 예인 집단으로 추앙받으며 살아남은 것과 비교가 됩니다.
기생문화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대중예술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생의 신분은 엄연한 천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면서도 하나의 우상으로 연예인처럼 따라 하고픈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성문화를 선도하는 패션리더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기생제도는 남성중심적 성문화의 산물이었으며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기생은 본질적으로 특권층 남성의 사치노예이자 성적 대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를 짓고 예술을 익히는 것이 허용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것과 기생을 통해 이어온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1)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종 제사와 의례에서의 음악과 음악교육, 악공(樂工)의 관리 등을 담당하던 관청입니다. 1422년 고려의 관제를 계승하여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합해 장악서(掌樂署)로 개편하였고, 1458년 이후 장악원(掌樂院)이라고도 합니다. 연산군 때에는 기생과 악수(樂手)를 두어 왕의 향락을 위한 관청으로 변모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기생에 대한 오해는 일본의 ‘게이샤’에 대한 서구인의 오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중국의 유명배우 장쯔이가 주연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게이샤의 추억>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어느 한국 영화 평론가의 글을 통하여 예술과 섹슈얼리티의 혼재에 대한 20세기의 왜곡된 환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스필버그도 때론 구할 수 없는 게 있다.
2006년에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만들어지는가 싶어 웃을까 울을까 망설이며 극장 문을 나섰다.
딱 한번 만난 사람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사는 미모의 게이샤 사유리. 춘향이 뺨치는 미모와 춤 솜씨로 단번에 뭇 남성들을 녹여내는 그녀는 이상하게도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 눈을 가졌다.
부채춤을 추고 살짝 손목을 보이며 사케를 따르고 가부키 화장에 붉은 입술로 남자의 거친 손끝에서 기모노 끈을 풀며 나신을 드러내는 여자.
장쯔이가 주연한 <게이샤의 추억>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미국 남자들의 동양 여자에 대한, 그 중에서도 일본 기생 게이샤와 기모노에 대한 모든 환타지와 페티쉬(성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물)를 모아서 비단으로 채색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 아래 1940년대 교토의 퇴폐적인 유곽을 담은 카메라는 관능적이고 탐미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1급 장인들이 만든 이류영화가 되어버렸다.
이 영화는 온갖 색채와 비단으로 치장했지만, 서양인들이 바라본 이국적인 일본을 겉핥기식으로 따라간다. 전쟁이 나서 게이샤에서 양공주로 변신한 여성들의 비애나 전쟁통에서 살아남았던 게이샤들의 애환은 통째로 없어지고, 대신 남성들에 의해 보호받아 깊은 산골에 은신해있던 사유리의 눈으로 박제된 일본만이 판을 친다.
특히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울부짖던 장쯔이가 가장 높은 값을 받으려 순결을 경매하는 장면을 보자. 여성의 순결을 값으로 환산하여 가장 높은 값을 받는 것이 마치 그녀의 고결함의 척도가 되는 양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여성의 상품화를 시대와 제도에 빗대어 합리화하는 반여성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온 전체의 삶이 한 남성에게 바쳐진다는 스토리라인은 아름다운 육체와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동양 여자에 대한 할리우드의 열망이 동양 여자의 육체에 투사되는 진귀한 경험마저 하게 되는 것 같다.
모든 예술의 기교를 다 습득했으면서도 돈을 받고 성을 팔 수 밖에 없는 동양 여자야말로 서양 남성들의 전형적인 판타지 아닌가. 또한 영화 속의 게이샤들 간의 시기와 질투 역시 공리와 사유리의 대결로 압축함으로 게이샤가 가지는 역사적 고찰이나 제도적 모순에 대해 일고의 언급도 없이 여성의 문제는 그저 여성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아주 단선적인 역사의식만을 드러낸다.
영화의 마지막, 마메하와 사유리 간의 자매애 역시 회장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조작된 것이었다는 설정은 이 영화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여성주의적인 싹을 모두 도려낸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에 대한 고민도 배경도 없는 이 기이한 감각의 제국은 결국 향기가 없는 플라스틱 조화의 세계이고, 그 세계에는 전형적인 남성들의 섹슈얼 판타지를 게이샤라는 고급 코드로 포장한 새삼스러운 할리우드의 속 비치는 전략만이 남아있다.
게이샤의 추억, 어떤 여자의 마음도 그러모으지 못한 단편의 모자이크화 같은 영화, 다시는 이런 시대착오가 없길 바랄 뿐이다."
- 한국의 어느 평론가가 쓴 영화<게이샤의 추억>의 평론문에서
3. 개화기 서구인에 비친 기생의 예술적 면모와 섹슈얼리티
스필버그의 위와 같은 오해는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조선의 기생을 처음 본 서구인의 눈에도 조선 기생은 신기하고 신비하며 또한 섹슈얼리티의 대상이기도 한 연모와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인의 시각으로 본 기생에 대해 연구를 해온 문순희에 의하면, 실제 서구인들은 한국문화나 민속학의 하나로 조선의 ‘기생’에 관해서도 기록했고 귀국 후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였습니다.
그들이 직접 듣고 보고 경험한 기생에 관한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된 당시 외국인 기록저서 중에서, 비록 저술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나, 짧게든 길게든 많은 저서에서 꼭 소개되는 사항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외교관들은 쉽게 기생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생들과의 스캔들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영사 프랑뎅은 본인의 저서 “En Coree”에서 기생 리심(Li-Tsin)과 제1대 프랑스 공사인 콜랭 드 프랑시의 사랑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그랩스트의 저서 “I Korea” 속에서는 한 독일 외교관과 기생과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20세기 초 한국에 입국한 겐테(1901년 입국, 독일기자), 셰로셰프스키(1903년 입국, 러시아 작가), 그렙스트(1904년 입국, 스웨덴 기자)는 외교관들과 달리 개인적으로 통역관을 데리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습니다. 겐테는 1901년에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 기자인데 약 반 년 동안 서울과 강원도, 금강산을 횡단한 후에 제주도 한라산까지 등반하였습니다. 겐테가 기생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세로셰프스키와 그렙스트는 둘 다 본인들의 스스로 기생과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쓴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가인 세로셰프스키는 그 짧은 체류기간에 통역을 맡아준 신문균에게 부탁을 하여 서울에 있는 기방을 찾아갑니다. 그는 귀국 후 1906년에 “기생 월선이”2)라는 소설을 출판하였는데, 이 소설은 폴란드에서 큰 호평을 받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1992년에는 재판까지 인쇄되었습니다. 이처럼 그에게 기생과의 만남은 매우 의미있는 추억이었으며, 기생을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 것입니다.
"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지더니 한 명의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화사한 옷으로 말끔히 차려입은 젊고 아
름다운 여인이었다. 자연과 예술의 조화 속에서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몹시 수줍은 듯 걸어 들어오던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은 순간 그녀는 유령을 본 것처럼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보호를 바라듯 구석으로 물러났다.(루웰)
궁중에 직속된 기생들은 그 빼어난 미모로 인해 다른 여인네들과 금방 구분되는데, 유럽인의 눈으로 보더라
도 그네들은 정말 아름다웠다.(프랑스뎅)
용모가 아리땁고 자태가 우아하기 그지없답니다.(그렙스트)
조용히 앉아 그들을 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즐거움이었다.(그렙스트)"
이러한 그들의 인상은 기생을 표현한 기록의 일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기생을 표현할 때 ‘아름답다’, ‘빼어난 미모’라는 수식어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도 기생의 외모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프랑뎅의 기록을 보면 궁중에 직속된 소위 관기들은 서구인의 눈으로 보아도 정말 아름다웠다고 하고 있습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기생의 미모는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2)『기생 월선이』는 구한말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입니다. 시골 노비 출신으로 서울에서 기방을 여는 기생 월선이는 당시 한국정치를 쥐고 있는 권력층에 영향을 주는 역할로 나오는데, 여기서 월선이는 예쁜 마음을 가지고 한 남자를 믿으며 사랑하는 기생으로 등장합니다. 국내에서는 1994년 남지출판사에서『대나무는 스스로 자신의 잎을 떨군다(Wydawnictwo Literackie)』(양정숙 역)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외모와 동시에 서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 기생들의 자태였습니다. 대체로 기생들의 자태는 ‘점잖다’, ‘우아하다’, ‘얌전하다’는 말로 표현되는데, 이런 기생들의 모습은 서양여성에게는 없는 동양여성 특유의 여성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기생에 대한 외모에 대한 평가와 달리 몸매, 곧 복식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 또한 특징입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특별히 좋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 복잡한 옷에 둘러싸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상의는 신체의 황금비율을 잔인하게 무시하는 얇은 비단 저고리로 감싸 가슴 바로 아래 커다란 옷고름으로 묶여 있었다. 튼튼한 명주로 정성스럽게 공을 들여 만든 치마를 여러 번 겹쳐입은 탓에 엉덩이 주변의 불룩한 모습은 마치 북부 헤센 지방 농가의 처녀들을 연상시켰다. 엉덩이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 신체의 자연스러운 윤곽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겐테)"
겐테는 기생들을 처음 봤을 때 그 의상 때문에 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상의는 신체의 황금비율을 잔인하게 무시하고 있으며, 하의에 입은 치마는 마치 북부 헤센지방 농가의 처녀를 연상시킨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미모와 우아한 자태, 그러나 몸의 곡선을 망가뜨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의상이라는 것이 서구인들의 기생을 본 첫인상의 특징입니다.
그들의 기생에 외모와 치장에 대한 관심은 한복을 차려입은 기생 사진이나 그림들을 꼭 자신들의 저서에 본문과 관련되는 아니든 무조건 삽입하였던 점에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궁정에서 (기생이 참여한 연회를 보낸) 이 저녁에 대한 인상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똑같은 것을 대해도 같은 미적 감흥을 얻기 어려운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즐거움을 주고자 그들이 쏟은 정성만큼은 우리 모두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로제)"
서구인들은 기생에 대한 설명을 직접 보고 느낀 것과 함께 이미 한국에서 혹은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들은 지식, 혹은 이미 출간된 다른 견문록을 참고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소개하였습니다.
기생을 설명하는데 기본적으로 언급되는 공통사항은 ① 일본 게이샤와 비슷하다 ② 기생이 연예활동과 매춘을 동시에 겸한다 ③ 가난한 집안에서 외모가 뛰어나면 어려서 기생으로 팔려 나라에서 음악과 무용 그리고 손님을 접대하는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 세가지입니다.
그 외에도 평안도 혹은 평양이 미인의 본고장이며 기생들도 이곳 출신이 많다는 것과 부유한 벼슬아치나 관리의 첩이 될 수 있다는 것들이 추가되어 언급합니다. 그들의 정보는 확실하며 일치하지만, 자칫 편견과 주관적 해석이 삽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명한 일본의 게이샤와 일치하는 점이 매우 많으며 일본의 게이샤들이 몸을 파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둘 다 많은 민중문학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로제티)
일본 게이샤와 마찬가지로 코레아의 기생들도 일종의 노예라 할 수 있다. (그렙스트)"
위에 제시한 두 인용처럼 서구인들은 주로 기생을 설명할 때 “일본 게이샤와”라는 방식으로 일본 게이샤를 비교 대상으로 놓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일본 게이샤와 한국의 기생들을 매우 주관적인 관점에서 비교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일본의 ‘게이샤’들은 훨씬 더 품위가 있는 부류의 무희들”3)이라거나, “한국의 기생들은 여성미가 없다”4)며 일본의 게이샤보다 열등하다고 평가합니다. 조선에서 그리고 일본에서도 공식적으로는 기생과 게이샤는 매춘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게이샤들이 몸을 파는 것과 거리가 멀다고 하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는 매춘을 겸하고 있었던 두 나라의 게이샤와 기생을 두고 기생에 대해서만 매춘을 겸하는 무희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게이샤는 고상한 무희라는 편견을 가진 잘못된 해석입니다.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는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조선은 이것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때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특산품으로 기생을 출품할 준비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기생들은 조선의 특산품으로 출품될 정도로 외국인에게는 매력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때 ‘파리만국박람회’에 기생을 출품할 계획을 세운 것에 프랑뎅이 관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생에 대한 관심을 볼 때 그럴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1910년에는 일본에서 열리게 될 일본박람회에도 기생의 출품이 제기됩니다. 1910년 4월 황성신문에는 ‘박람회의 기생’이라는 제목으로 기생 8명과 악공 6명을 일본박람회를 위해 기생조합소와 교섭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립니다. 이 시기 기생은 조선을 세계로 알리기 위한 명물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즉 당시 기생은 서구 남성들에게 충분한 관심거리였으며 또한 그것이 국가정책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코레아의 기생은 일본의 게이샤와 비슷한데, 제가 보기에는 가수․무희․배우를 합쳐놓은 것 같습니다. 제가 다
말해버리면 김이 빠지니까 직접 보신 후에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놀라실 거에요.
용모가 아리땁고 자태가 우아하기 그지없답니다. 우리 젊은 외교관들 중에는 이들에게 홀딱 반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뻔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렙스트)"
4. 예능과 섹슈얼리티
조선시대 기생의 섹슈얼리티와 사랑의 담론을 연구해 온 한국의 연구자 서지영에 의하면 조선시대 기녀는 실제 전근대시대 예인(藝人)과 매춘부의 모호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식 기록물 속에서 기녀는 공중의 의례나 연향, 양반 남성들의 연회에서 악(樂), 가(歌), 무(舞)를 연행하는 ‘여악(女樂)’으로서 그 존재근거를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녀는 비공식적인 성적 봉사의 의무를 부여받았으며, 이로 인해 기녀는 섹슈얼리티를 자신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매력으로 가꾸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온 서지영에 의하면, 조선시대 기녀는 궁중예례 및 연향에서 가무를 담당하는 집단으로서 공식적으로 ‘여악(女樂)’이라 불리는 특수기능직 종사자였습니다.
이들은 장악원 소속의 경기(京妓)와 지방 교방 소속의 외방기(外方妓)로 나뉘는데, 궁중에서 활동하는 경기는 대부분 지방에서 정규적으로 선상(選上)된, 재색과 기예가 뛰어난 일급 여기(女妓)들로서 지방 여기들과는 그 격을 달리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리학적 이상 국가 건설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로서 여악을 구성하는 기녀의 위상은 전문적 예능인의 이미지와 함께 관기로서의 그들의 입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서울 장악원과 지방 교방 소속의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여기 외에도 여악은 필요에 따라 궁중의 의료 기관인 내의원과 혜민서 소속의 의녀(醫女)와 궁중 의복 및 군인의 의복을 담당하는 공조․상방 소속의 침선비(針線婢)들을 포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악에 있어 보다 문제가 되는 측면은 따로 있습니다. 조선시대 여악은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신역으로 악가무를 공연하는 여자예능인으로서, ‘여공인(女工人)’․‘여령(女伶)’․기악(妓樂)․여기(女妓)․기생(妓生)․기(妓)․창기(娼妓)․창기(倡妓)․관기(官妓)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女工人’, ‘女伶’, ‘女妓’의 용어와는 다른 함의를 지니는 ‘창기’, ‘기생’은 여악이 지니는 또 다른 일면을 보여줍니다. 이들 용어는 바로 여악이라는 표면적 직함과 겹쳐있는 당시 기녀들의 성적 봉사의 기능을 암시합니다.
조선시대 공식적 담론에서 경기(京妓)의 활동은 공식적인 궁중 연향과 왕실의 소소한 모임에 참여하고, 사악(賜樂)의 경우나 궁중진하, 양잠을 권장하는 친잠의식, 교방가요를 바치는 것들로 설명되지만, 실질적으로 서울기들은 비공식적으로 베풀어지는 상층 양반들의 사적 모임에 참석하면서 연향 이후의 성적 봉사의 수행을
요구받게 됩니다.
외방여기들 역시, 사신 접대를 위한 연향, 변방군사를 위로하기 위한 악(樂)․가(歌)․무(舞) 연행과 빨래․바느질 등의 봉사, 지방관아에서의 연향 참여 등을 표면적 임무로 떠맡지만, 실질적으로 방기(房妓), 수청기(守廳妓)라 하여 지방 관리나 군인 및 사신들을 위한 성적 봉사가 또 다른 중요한 임무로 주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기녀는 고도의 기예를 갖춘 궁중 여악의 공식적 권위 뒤로 상층 남성들의 성적 대상인 ‘중세적 매음부’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배층 양반 남성과의 정신적 교유를 하는 재예를 갖춘 일급 문인 기녀에서 지방 관아 소속의 일개 성적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계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원천적으로 지배층 남성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었다는 측면에서 권력과 여성 섹슈얼리티의 함수관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일방적인 착취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설사 ‘중세적 매음’업무가 그들에게 강제되었다 하더라도 조선의 기녀들은 그 속에서도 낭만과 지조, 그리고 문화적 자존심과 페이소스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몇 가지 일화를 살펴봅시다.
4-1. 에로티시즘과 낭만적 사랑의 페이소스
매우 엄격한 윤리가 지배하는 한국의 전통사회인 조선시대는 그 금욕적 도덕윤리로 인하여 역설적으로 매춘의 에로티시즘이 가지는 해방적 기능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유교의 도덕 원리가 공식적으로 지배했던 조선 시대에도 여타의 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녀의 사랑의 풍습을 반영하는 문학작품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성이 여성 자신을 표현하는 시 창작이나 사대부가 여성에 관하여 언급하고 표현하는 시 창작은 공식적으로 권장되지 않았으며, 남녀간의 사랑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는 자료들 중에서, 양반들이 기생을 소재로 하여 쓴 연시(戀詩)나 기생에게 주는 향염시(香艶詩), 기생들이 직접 남긴 연시들은 양반과 기녀 간의 특수한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어 주목을 받습니다.
양반 사대부 여성이 대상이 되는 몇 편의 연시들이 유교적 원리에 입각하여,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을 억제하는 평담한 미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기녀와 양반간의 사랑을 담은 시편들은 육체적 사랑을 직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정감의 표현이 매우 노골적인 것을 특징입니다.
“부상관 안에서 한바탕 즐기는데
자는 손은 이불 없고 촛불은 가물가물
열두 봉우리 무산이 새벽 꿈에 어른거려
역루의 봄밤이 찬줄을 모르겠네”
(扶桑舘裡一場驩 宿客無衾燭燼殘
十二巫山迷曉夢 驛樓春夜不如寒)
姜渾 「성산기생에게 주다(奇星山妓)」『국조시산 권2』
위 시는 1508년 11월, 영남 안찰사(按察使)로 가 있었던 강혼(姜渾)이 1509년 경상도 여러 고을을 순시하다가 성주(星州)의 기생 은대선(銀臺仙)을 만나 서로 사랑하였으며, 성주를 떠나게 되자 성주 부근의 부상역(扶桑驛)에까지 따라 나온 은대선과 보낸 하룻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 시는 특히 수졸들이 침구와 짐을 가지고 먼저 떠난 상태에서 이불도 없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밤 동안 추위도 못 느낄 정도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기녀와 양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출산으로부터 분리된 섹슈얼리티의 영역인 에로티시즘의 발현입니다.
조선시대 양반의 철학적 사유와 미의식의 산물인 ‘풍류’라는 기호 속에는 ‘주색(酒色)’, ‘가무(歌舞)’가 중요한 구성요소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기녀는 풍류의 또다른 이면인 유흥 및 성적 쾌락의 부문에 깊이 개입됩니다. 기녀에게는 공식적으로 충류 공간에서 여악(女樂)의 기능 외에도, 성적 봉사의 의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사대부가 가장 경계해야할 ‘여색(女色)’을 역설적으로 구현해야했던 기녀는 매춘과 에로티시즘, 낭만적 사랑의 모호한 경계에서 관능의 기술과 사랑을 파는 직업적 연행꾼이었습니다.
4-2. 학문과 예술 문화의 도도한 교양인
조선시대의 기생은 위와 같이 관능적인 사랑과 에로티시즘의 매개자일 뿐만 아니라, 당시 남성중심사회의 주류인 사대부들과 학문과 문화 예술을 교류할 수 있는 전문 교양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녀들이 시와 서, 그리고 그림 등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다는 것과 같이 매우 오래전부터 알려져온 사실입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있는 기녀들의 문화예술 교육프로그램은 20세기초 일제시대의 ‘권번(券番)’ 교육 자료입니다.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敎坊)의 후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기적을 올리던 조합이며 일제시대 탄생한 명칭입니다. 조선조 말 한일합방 이후 조선의 국가기관인 교방이 폐지되고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우리의 예술은 점점 쇄락하고 급기야는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인 상황에 부딪쳐 우리의 예술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권번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예술은 어렵게 그 맥을 이어갔습니다. 지방의 큰 권번인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동래권번의 기녀들의 입학시기는 일찍 들어가면 7, 8세 때부터였고, 보통의 기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인 13세~15세 정도 입학을 했습니다. 입학생 수는 대략 200명이나 되었으며, 또한 예기의 수는 약 150명 정도였는데, 이 인원수로 보아 그 당시의 동래권번의 적지 않은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의하면 경성부에는 한성권번, 대정권번, 한남권번, 경화권번이 있었고, 지방에는 대구, 김천, 동래, 창원, 광주, 수원, 평양, 진남포, 개성, 안성, 연기 등에 권번 내지 조합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기들의 숫자는 경성부 곧 지금의 서울이 470명이므로 전국적으로 거의 80%를 차지하고 있었고, 지방의 기생조합에 소속된 기생들은 20%에 해당됩니다.
경성부의 권번 중에서도 대정권번의 예기들이 181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한성권번 175명, 그 다음으로 한남권번이 75명, 경화권번이 39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방 권번들 중에서 예기의 수는 수원조합이 33명, 대구조합이 32명, 그 다음으로 동래권번이 13명이었는데, 1918년 당시의 동래권번이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래권번의 입학 당시의 입학금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동래권번의 입학은 7, 8세부터였고, 3년 동안 기예를 닦아야 졸업을 시켜주었다. 보통 15, 17세쯤 되면 졸업을 하는데 졸업하고 나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예기가 되었습니다.
가무학습은 동래권번 뿐만 아니라 다른 권번 기생들의 특기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기생의 학습 내용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써 권번의 모든 기생들이 학습받는 것이 가무입니다.
이 가무에서 가에 해당하는 것은 가사와 수신시조, 잡가이고, 무에 해당하는 것은 상삼무, 승무, 입무, 남무, 검무, 춘앵무, 무산향, 남무바지, 남중속무(상풀이춤), 정재무, 서양무도, 내지무(일본무) 등입니다.
그러나 동래권번에서 제일 으뜸으로 치는 기예는 판소리였습니다. 기생들이 놀음을 나오면 제일 많이 하는 것 또한 판소리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권번 입소 후 제일 먼저 배운 것이 판소리며, 판소리 학습을 하고 나서야 무용이나 다른 음률을 배울 수 있었다. 판소리의 경우에는 판소리 5바탕인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적벽가, 수궁가를 불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외에 안중근 역사가나 유관순 역사가도 배웠다는 것입니다.
동래권번에서는 판소리가 제일 먼저 학습되었으며, 판소리를 배운 후 무용이나 음률 등의 다른 예기를 배울 수 있었다. 판소리는 동래권번의 기본적인 학습과목인 동시에 필수과목이었다. 판소리를 배우고 나면 각자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기예를 학습했습니다.
성주풀이,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양산도 가락을 모태로 한 민요 또는 타령 종류의 민요가 많이 불리어지고 학습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무학습을 마친 후에는 음률학습을 하였습니다. 음률이란 기악을 가리키는 말로서 거문고,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 샤미센이 해당됩니다. 음률 악기 중 일본 전통 악기인 샤미센을 가르친 것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음악교육이 끝나면 예절, 한자, 서화 학습이 이어졌습니다.
예절은 기생의 기본적인 필수조건이며 사항입니다. 기생의 경우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은 놀음의 일부였기 때문에 손님 접대 예절을 철저하게 하였습니다. 손님 접대 예절뿐만 아니라 선생에 대한 예절도 무척이나 엄격했습니다.
또한 예법을 가르치는 예지원이라는 곳도 조선시대의 기생들에 의해서 비롯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권번에서도 예법 교육은 엄격하고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예법을 모르면 기생을 할 수 없었으며 예법에 어긋난 일을 하면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권번의 학습내용중의 하나인 예법교육은 기생이 되기 위한 하나의 필수과정이었으며, 진정한 예기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동래권번에서는 예법만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묵화 치는 것과 붓글씨도 배웠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동래권번의 기생 중 김계월(金桂月)의 특기에서는 붓글씨와 서화를볼 수 있었음으로 많은 기생들에게 학습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동래권번은 기예만을 익히는 학습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기로써 당연히 지녀야할 가무와 음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예절과 서화 그리고 한문공부까지 하는 학교이자 학원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동래권번에서 이루어진 학습은 가무가 주를 이루었는데 가장 기본으로 학습되어 진 판소리를 기본으로 여러 민요와 승무, 살풀이, 입춤, 검무, 화관무, 소고춤, 고무와 음률에 해당하는 거문고와 가야금, 양금, 생황, 샤미센과 예절 학습인 붓글씨, 서화 그리고 일본춤까지 학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기녀들은 당시 사회의 지역별 지방의 특색을 살려 고유의 문화와 시, 학문 등을 계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방의 역사와 환경에 대한 특수성을 살린 특기를 갖고 있어야 고급 기생 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당시 기녀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령 안동지역의 기생, 즉 안동기는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하여야 하는데, 그 유래는 명종조 유학자 주세붕이 청량산에 기생과 함께 놀이를 나갔다가 취흥이 도도하여 기녀에게 유교의 경전인『대학』을 낭송시킨 것에서 연유합니다. 기녀에게 대학을 낭송시킨 것은 전고(前古)에 들어보지도 못했고 또한 주세붕이 아니면 명하지도 못했으리라 하여 이로부터 안동기녀는 ‘송대학지도’를 잘 낭송해야만 했습니다.
관동 및 서울기녀는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을 하여야 합니다. 선조 때 송강 정철이 남긴 동해안의 절경을 노래한 관동별곡을 잘 불러야했던 것입니다. 또한 서울기녀는 사민인곡(思美人曲), 우미인곡(虞美人曲)도 잘 불렀다 합니다.
함흥의 기녀는 ‘송출사표(誦出師表)’를 하여야 했습니다. 정종 때 채제공의 「번엄집」에 의하면, 84세의 가련이라는 기생이 출사표 사이사이에 해담(諧談)을 섞어가며 창(唱)을 하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아 좌중의 사대부들이 크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영흥의 기녀는 ‘송용비어찬가(誦龍飛御天歌)’를 잘했습니다. 영흥은 조선 태조의 발상지로서 용비어천가는 ‘여민락(與民樂)’이라 하여 조선조 건국의 신빙성과 필연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영흥부 쌍성관(雙城館) 판액(板額)에 희암(希庵)의 판상운(板上韻)이 있는데, 그 중에 “敎坊皆誦御天歌”란 구절이 있습니다. “영흥기녀는 모두 용비어천가를 외웠다”는 것입니다. 제주기녀는 모두 말달리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제주는 고려때 몽고에 의해 목장이 설치되어 말이 많이 나던 곳에서 연유합니다.
의주기녀는 ‘치마무검(馳馬舞劍)을 해야 한다. 의주는 국경에 가까우므로 기녀들도 말과 검무를 잘 하였습니다.
평양기녀는 ‘창관산술마시(唱關山戌馬詩)’를 잘 하였답니다. 이 시는 신광수가 지은 시로 평양의 목단을 노래했는데 여러 기생들이 본받아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신광수가 이 소문을 듣고 시를 3수 지어 부르게 하니 이후 평양 기생은 모두 ‘창관산술마시’를 읊었다고 합니다.북청기녀는 ‘치마지기(馳馬之技)’가 있었습니다.
이 지방은 딸 셋을 낳으면 하나는 농가에 시집을 보내고, 하나는 교방에 보내 기생 수업을 시키고, 하나는 무당에게 판다고 하였으니 기녀가 번성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영이 있는고로 교방에서 치마지기도 더불어 가르쳤다 합니다.
이와 같이 기녀라 하면 엄격한 제도하의 교육을 받은 정재된 전문직 여성으로 자색이 뛰어나며, 가무, 시가에 능하며 해담이 좋고 서화도 잘 해야 하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자선이 있어야 했으니 이리해야만 기녀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습니다.
4-3. 지조와 절개의 시대인
조선시대의 기생은 제도적으로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신분상으로는 천인에 속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은 대부분 모계로부터 세습되었습니다. 때로는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기생이 되기도 하고, 양가집 딸이지만 집이 가난해서 팔려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비 중에서 자색과 재예를 기준으로 선발하였습니다. 관기는 넓은 의미의 관비로, 관노, 관비, 기생이 지방 관아의 관안(官案)에 함께 기록됩니다. 기생은 관노, 관비와 함께 공적인 존재로 일정한 역을 담당했는데 이를 기역(妓役)이라고 합니다. 국가에 대한 공적 의무 -공식 연회에서 기악을 담당, 외국 사신의 접대 등-를 져야했던 특수 계층의 여성이었습니다.
이들 기생은 妓籍(官案, 妓案)에 등록되어 국역에 편성된 공적인 존재로 최하층 여성인 동시에 최고의 예능인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기생은 기생 교육을 담당하는 교방에서 기생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가곡, 가사, 잡가, 시조 등의 노래를 배웠고, 각종 악기를 익혔으며 여러 종류의 춤을 배웠다. 그리고 서예, 그림 등이 교양을 더 익히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기생의 이미지는 상대 남성과의 애정과 욕망, 이와 관련된 유혹의 상징, 때로는 신분 예능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남성 작가들이 써놓은 단편적 언급이나 기록에 의하여 형성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랑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기생을 접하는 경우는 많지만, 실제 기생들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다채롭게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기생과 정치 공간 사이의 관계 또한 아직까지는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기생은 사랑과 욕망의 공간 안에 갇혀있는 존재로 한정되고, 정치 활동과 정치 영역은 사대부 남성의 독점적 공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생들은 천한 계층의 신분적 지위에 처하였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과 지식을 수용하였던만큼 자신이 처한 현실적 상황, 더 나아가 정치적 영역의 문제에까지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18세기 함경도 함흥 기생이었던 가련(可憐:1671~1759)입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가련이 지닌 협기(俠妓)로서의 면모입니다. 특히 그녀와 관련된 기록들은 확고한 신념의 소유, 외부의 상황 변화에 신념을 꺽지 않는 지조와 절조,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대담성과 용기 등에 주목하여 가련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건창이 쓴 「가련전」은 가련의 일생을 재구성하여 서술하면서 특히 가련의 정치적 열망과 실천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숙종 연간의 환국정치를 배경으로 가련의 굴곡진 삶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습니다. 숙종 연간은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갑술환국(甲戌換局)(1694)으로 이어지는 환국의 정치국면 속에서 남인과 노론, 소론간의 정치적 부침이 심하였던 때입니다.
이건창은 가련의 일생을 이러한 환국정치를 배경으로 남인이 득세하여 실권을 잡았을 때와 남인이 실각하여 위기에 몰렸을 때를 나누어 가련이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고 실천해 나갔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련이 육진(六鎭)에서 숨어 지낼 때에 남인이 유배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 안부를 물었으며 또한 그와 더불어 당론을 이야기하였다. 유배객들은 대부분 겁을 내며 두려워하였고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 후 남인으로 함흥을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술을 가지고 찾아가 뵙고는 그들과 함께 예전처럼 당론을 이야기하였다. 감사, 판관, 그리고 비장, 막료 그리고 빈객은 노론이었는데, 가련은 그들을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불러 억지로 가보기는 하였지만 즐거워하거나 웃지 않았다.
항상 슬퍼하면서 탄식하기를, “차라리 남인의 여종이 될지언정 노론의 첩이 되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소론을 만나면 때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보이면서 말하기를, “소론이 일찍이 남인에게 은덕을 입었으니 저를 소원하게 대해서는 안됩니다.”라 하였다.
위의 인용문은 남인이 실세를 하였던 갑술환국(甲戌換局)(1694) 이후의 가련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갑술환국이 일어나기 전에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가련은 항상 함흥 감영의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며 서울에까지 명성이 크게 알려졌습니다. 남인의 고위 관료 중에서 당론을 좋아하는 자들은 모두 언젠가는 함경감사로 부임하여 가련과 함께 의론을 주고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세한 뒤로는 상황이 급변하여 가련은 목숨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남인의 실각 뒤에 함흥을 찾아온 노론계 관료들은 “함흥에 가련이라는 기생이 있는데, 우리 노론을 헐뜯고 비방하기를 좋아하니 자네 반드시 그녀를 죽여야 할 것이네.”라고 할 정도로 가련에 대한 원한을 가득 품고 있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가련은 육진으로 피신했다. 비록 몸을 숨기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가련은 유배온 남인들을 찾아가 예전처럼 당론을 이야기했으며, 집권 실세였던 노론측 인사들에 대해서는 찾아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급변하는 환국 정치 속에서 자기 몸을 보존하기에 급급했던 무리들과 비교해 볼 때, 가련은 결코 현실 에 타협하거나 자신의 지조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의지를 당당하게 상대방에게 공언하는 담대함과 여유로움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절조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고 목숨의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가련의 대담성과 용기가 인상 깊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같은 가련의 의식 성향은 “차라리 남인의 여종이 될지언정 노론의 첩이 되지는 않겠다”는 그 자신의 발언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채제공(蔡濟恭, 1720~ 1799) 이 그의 저서『번암집』에서 말한 것처럼 가련은 정치적 지조를 지키는 기녀였던 것입니다.
" 태학사 관양공이 함경도로 유배를 오게 되어 함흥을 지날 때에 가련은 나이가 이미 팔십 여세였다.
가련은 공의 문장의 명성을 알고 있었는데, 술을 들고 역사로 찾아오니 「출사표」를 부를 것을 청하였다. 제갈공명의 초당에 유비가 세 번 찾아온 대목에 이르러서 관양공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다.
“아! 이 사람은 女俠이다. 천한 기생으로 조정 사대부의 죄를 헐뜯고 비방하였으니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가짐은 한결같아서 시세의 성쇠에 따라 절조를 바꾸지 않았다. 옛날의 이른바 협객이 바로 그러하였다.” "
5. 나오며: 굴절된 에로티시즘에서 창조적 엔터테이너로
이제까지 영화 <황진이>를 매개로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이자 예술가이며 엔터테이너였던 ‘기녀’에 대하여 문화사회사적 시각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녀는 확실히 일본의 게이샤와 비슷하고,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버가 주연한 영화 <물랑루즈>의 무희(舞姬)들과 유사한 존재입니다. 영화<물랑루즈>속 뮤지컬 가수 샤틴(니콜 키드먼 역)이 황진이와 같은 존재였다면,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는 시인 크리시티앙(이완 맥그리거 역)과 그의 친구들인 로트랙과 같은 존재들은 아마도 황진이와 함께 시와 음악 등 예술을 이야기하고 술과 사랑을 나눈 사대부들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조선의 기녀들에게는 클럽 물랑루즈의 가수와 같이 엔터테이너의 예술적 능력과 섹슈얼리티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미묘한 조화는 당시 평범한 여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매우 이단적이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질적인 두 요소는 ‘기생’이라는 당시 사회의 천대받는 직업을 통하여 상호 매개되어 결합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욕주의의 전통시대 속에서 섹슈얼리티와 예술이 결합된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자유롭고, 또한 독특하면서도 감성적인 엔터테이너 분야가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인들이 기생에 대한 설명을 직접 보고 느낀 공통사항이 ① 일본 게이샤와 비슷하다 ② 기생이 연예활동과 매춘을 동시에 겸한다 ③ 가난한 집안에서 외모가 뛰어나면 어려서 기생으로 팔려 나라에서 음악과 무용 그리고 손님을 접대하는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 세 가지라는 점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편 우리에게 기녀는 그 직업에서 풍기는 섹슈얼리티로 인하여 아직까지 왜곡된 이미지로 그 색채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실제 기녀는 지배층 양반 남성과의 정신적 교유를 하는 재예(才藝)를 갖춘 일급 문인 기녀에서 지방 관아 소속의 일개 성적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이들은 원천적으로 지배층 남성의 성적 착취의 대상이었다는 측면에서 권력과 여성 섹슈얼리티의 함수관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남성중심사회의 왜곡된 섹슈얼리티의 반영으로써 비판되어져야 하고 극복되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상황에만 매몰된다면, 자칫 왜곡된 사회 현실속에서 피어난 자유와 낭만, 그리고 예술과 욕망이 총체화된 전통 엔터테이먼트를 편향되게 이해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 이 오해는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보여준 서구적 타자의 굴절된 오해처럼 잘못된 인식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기녀는 그들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인하여 당대의 사내들의 사랑의 대상이었으며, 남성중심 사회의 피동적 대상으로서의 일반적 여성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과 낭만적 존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고 있어 수많은 남자들의 섹슈얼리티를 자극하는 선망과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다시 반대로 그들과 정치 문화 학술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녀’ 또는 ‘기생’의 문화는 매우 엄격한 윤리가 지배하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역설적으로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이 예술과 문화 학문과 정치를 만나 어떻게 해방적 기능을 보여주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사례입니다. 따라서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인 지위를 가지는 조선시대의 ‘기녀’와 그 문화는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문화의 매우 색다른 부분을 섭렵하는 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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