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枝詞
- 李廷龜(이정구 1564-1635)
搖蕩春風楊柳枝(요탕춘풍양류지) : 봄바람 산들 불어 버들가지 일렁이고
畵橋西畔夕陽時(화교서반석양시) : 그림처럼 고운 다리 서쪽으론 해 기운다
飛花幹亂春如夢(비화간란춘여몽) : 꽃잎 어지러이 흩날리니 봄은 꿈같기만 한데
癣璥芳洲人未歸(선경방주미인귀) : 저녁놀 반짝이는 섬엔 돌아오는 이 없구나
수양(水楊 ; 갯버들, 수양버들), 유화(柳花 ; 버들강아지) 혹은 유서(柳絮), 유지(柳枝), 유엽(柳葉) 등으로 불리며 사용부위에 따라 이름을 달리 했다.
搖蕩: 흔들려 움직임
癣:곰팡이로 생기는 피부병의 총칭
璥:옥돌 하나 璥
洲:섬.
[芳洲: 꽃다운 작은 모래 섬?]
[癣璥芳洲: 강 가운데에 있는 작은 모래섬이 햇볓에 반짝이는 모양을 표현한 거 아닐까?]
이정구 (1564년)
이정귀(李廷龜, 1564년∼163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성징, 호는 월사, 본관은 연안. 조선전기 학자이자 바둑의 대가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대 손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선생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 사람... [위키백과]
[참고 자료:위 시가 아래 기생 유지를 읊은 것이라면 번역은 달라져야 할 듯]
율곡과 기녀 유지柳枝
윤사순(고려대 명예교수)
강릉 율곡연구원에 가는 길이다. 대관령은 온통 녹음이다. 꽃보다 나아보이기도 하는 연두색 신록은 이제 사라졌다. 예가던 길-, 이곳을 넘나들던 율곡을 그려본다.
거의 500년 전에 살다 간 그는 저세상에서도 편히 쉬는 날 없이 지낼 것 같다. 온갖 일들에 묻혀 여념이 없던 그였다. 서모의 비위 맞추랴, 동서로 갈리던 파당의 분열을 막으랴, 어질지 못한 임금에게 상소문 내랴, 자신의 철학을 닦아 친구(牛溪)와 논변 나누랴, 각종 서적들을 저술하랴, 후학들 훈육하랴, 지방자치 도모하랴, 산천초목 감상하랴, 시흥에도 젖어보랴,...
율곡의 일생은 ‘성인(聖人) 닮기’를 다짐하고 최선을 다한 자취이다. 겨우 50도 채우지 못한 수명(49)을 타고 났으나, 이룬 업적은 그 갑절 넘게 산 사람보다 더했다. 세종 이후 으뜸이던 정조가 ‘동방의 공자(左海夫子)’라 받들어 마지않은 그다.
그에게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 알려지지 않았다 함은 『율곡전서』에 나오지 않음을 이른다. 당시의 관기 아닌 일반 기녀 유지(柳枝)가 그 여인이다. 율곡은 그를 황해도 관찰사 시절(39세)에 해주에서 만났다. 해주에는 율곡의 처가가 있었고, 두 누이가 살았으며, 41세 이후에는 자신의 강학소를 지은 다음, 가솔마저 다 옮겨 살던 곳이다. 영접사 등의 업무로 그 곳을 지나게 된 기회도 있었고, 이래저래 율곡은 유지를 여러 차례 만났다. 얼굴 익히고 지낸 세월이 10 여년을 헤아린다. 하지만 따듯하게 대했을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율곡에 따르면, 그 여인은 본래 양반가의 출신이고 아름다운 용모에 몸가짐이 반듯했다. 그들이 애틋한 정을 나누게 된 계기는 율곡이 탄핵을 받아 해주로 돌아갔던 때다. 호조판서(46세) 이조판서(47세) 병조판서(48세)를 맡는 등 율곡의 위치와 실세가 급속히 신장되자, 정적들은 마침내 그의 탄핵에 열을 올렸다. 탄핵 명목은 두 가지로, 임금의 궁전회의에 불참한 오만함과 국방을 빙자로 군마(軍馬) 기증자에게 병역면제를 자의로 해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두 부득이한 원인과 이유가 있었다. 율곡은 궁전회의에 참석하려 대궐에 들었었으나 심한 현기증으로 가까운 병조에서 일단 안정을 취하느라 늦어 불참으로 되었고, 군마의 경우는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한 방어가 급박해 병조판서의 재량으로 감행했을 따름이다. 아무튼 탄핵 받은 그는 즉시 사직하고 해주(석담)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어머니를 대신해 맞아줄 형수와 두 누이 등이 있었다.
해주에 이른 율곡에게 찾아온 사람이 뜻밖의 그 여인 유지였다. 유지는 누이 집들을 들르는 율곡을 따라 시중들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율곡 또한 그로 해서 시름을 좀 덜었을 것이다. 그것은 겨우 열흘 남짓 동안의 일. 오해를 푼 선조가 다시 율곡을 이조판서로 임명하고 급히 불렀다. 명을 받은 율곡은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유지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나귀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 길손 율곡은 숙소를 찾아 잠을 청하던 순간이었다. 바로 그 때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열고 보니, 낮에 헤어진 유지가 아닌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문 닫아 버림은 인(仁)을 상함이오, / 동침함은 의(義)를 해침이라, / 둘 사이에 병풍 막이까지야? / 서로 다른 요와 다른 이불이면 되겠지...”
이 밤 율곡은 그 자리에서 한편의 장시(長詩)를 짓는다. 시는 더 이어진다. -- “아! 황해도에 사람 하나 맑은 기 모아 신선 품격 타고 났네. / 뜻도 태도도 곱거니 얼굴이며 목소리며 맑기도 하이. / 새벽녘 이슬같이 맑은 것이 어쩌다 길가에 버려졌던가. / ...슬프다 일색이여. / 내 몸은 더욱 늙어 여색을 잊어야겠고 세상 정욕 재같이 식었다네. /... 동창이 밝도록 잠 나눠 자니 가슴엔 한만 가득. / ... 내생(三生)이 있단 말 빈말 아니라면, 저 부용성에서 너를 다시 만나지고.”--
시를 유지에게 선물 한 율곡은 서울로 떠난 뒤 겨우 3개월 지난 이듬해 정월 자택에서 깨지 못할 잠에 묻혔다. 부음을 들은 유지는 서울로 가서 곡하고, 이어 삼년상의 의례를 깍듯이 했다는 전언(남계견문록)이다.
여기서 어떤 이는 시(한시) 형식의 빼어남을 지적하고, 어떤 이는 정감 묘사의 진솔함을 높이 살 것이다. 외설 속의 미학도 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 이전의 도학 · 성리학이 율곡의 본령이다. 그래 율곡은 그 밤 유지를 맞아들이면서 ‘인(仁)과 의(義)’를 들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동침이 ‘의를 해침’ 곧 도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는 ‘늙고 식은 정욕’이었지만 날이 밝기까지 억제하는 ‘극기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철학으로는 유지를 맞아드림 자체가 ‘인(仁)을 실행키 위함’이었다. 그 인이란 공자에 따르면 ‘인간을 사랑 및 배려’하는 것이다. 그것을 맹자는 성선설의 시각으로 풀이했다. 곧 불우한 역경에 빠진 상대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공감하며 가여워하는 ‘측은(惻隱)의 마음’이라고 했다. 측은이란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이기적 자애가 아니고, 상대에 헌신까지 하는 이타적 타애의 자연적 유출, 곧 ‘남에게 차마 (나쁘게) 못하는 마음’이다. 율곡은 이 마음으로 인간 유지를 소중히 아꼈던 것이다.
이성적인 도심(道心)과 신체적 본능의 인심(人心)은 수시로 변환하는 만큼, 수양에 의해 ‘인심을 도심으로 변환’해야 함을 역설한 율곡이다. 그 수양의 쌓임에서 ‘기질의 바로잡음’까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 철학으로 이룬 이 시는 당시 불혹(不惑, 40세)의 끝자락에 있던 율곡이 이미 천명의 깨달음(知天命, 50세) 이상의 경지에 든 선비였음을 드러낸다. 그를 아끼던 이가 다만 유지 한 여인에 그치지 않았던 까닭도 ‘그의 인격의 높음’에 말미암는다. 바람직한 인간으로 되기 위해 성인을 닮겠다던 그 모습은 우리에게도 지금 실천 불가능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 문제는 주로 교육에 달리지 않았을까? 인간교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오늘도 율곡 같은 인재를 많이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16. 8. 5. 교수신문 게재).
[출처] 율곡과 기녀유지(柳枝)|작성자 바보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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