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msky-Korsakov
Scheherazade
1888년 페르시아에서 전해지는 《천일야화》를 바탕으로 한 관현악 모음곡으로 만든 곡이다. 19세기 러시아 5인조는 동양적 소재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음악을 작곡하였는데,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 곡으로 총 4가지 에피소드(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작욕이 정점에 달하다
1887년, 동료 보로딘이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이고르 공〉을 완성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의욕적으로 다음 작품에 착수했다. 1887~1888년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가장 많은 작품을 작곡한 시기로,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서곡 ‘러시아 부활제’〉와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처럼 창작욕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천일야화》의 에피소드들을 주제로 한 관현악 소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음악으로 해석한 동양의 ‘천일야화’
19세기 말,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을 이끌었던 러시아 5인조는 민속적인 어법과 함께 동양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러시아의 음악적 특징을 정의하려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동양적 소재를 즐겨 사용했으며, 특유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동양적 풍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연출해냈다. 그러한 그가 동양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문학으로 인식되었던 《천일야화》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천일야화》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네 가지를 선택하여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적 모음곡을 구상했다. 이 작품은 색채감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 흥미로운 선율, 부드러운 동양적 풍미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관현악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기 넘치는 리듬과, 당시 교향곡의 복잡한 구성을 절제한 표현의 직접성은 청중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다가갔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사후 2년이 지난 1910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가 발레 〈세헤라자데〉에 이 곡의 3악장을 사용함으로써 이 작품은 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안무가 미하엘 포킨과 화가 레온 박스트, 인기절정의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참여한 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미망인은 작곡가의 의도와 달리 3악장만을 사용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이 공연의 성공은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의 인기에도 크게 기여했다.
동양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들의 만화경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처음에는 각 악장의 제목을 ‘프렐류드, 발라드, 아다지오, 피날레’로 계획했다. 지나치게 분명한 표제를 기피했던 그는, 주위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원래의 제목을 《천일야화》와 관련된 제목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모호한 제목을 붙였다. 심지어 이후의 판본에서는 이 변경된 제목을 모두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청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특정한 내러티브에 맞추기보다는 동양의 환상적인 모험이라는 주제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곡가의 의도를 보여주듯, 이 작품은 모든 악장이 눈부신 상상력과 풍부한 색채감으로 가득하다. 그는 각 악장을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했지만, 네 개의 악장이 통일성을 가지기를 원했다. 첫날밤을 지낸 뒤 왕비를 처형하는 술탄 샤리야르와, 환상적인 이야기로 처형을 천 하루 동안 미루고 결국 샤리야르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는 매력적인 이야기꾼 세헤라자데의 관계를 큰 흐름으로 제시하기 위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두 인물을 상징하는 주제선율을 모든 악장에서 사용하였다. 이 작품이 “동화적이고 동양적인 이미지들의 만화경”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이 두 주제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롭고 현란한 진행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1악장 라르고 에 마에스토소-렌토-알레그로 논 트로포-트란퀼로
1악장은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를 주제로 하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술탄 샤리야르와 세헤라자데의 만남을 제시하면서 첫 악장을 연다. 엄숙한 베이스 모티브가 술탄을 상징하면서 서주를 시작한다. 이 모티브는 크게 E-D-C-A#로 하행하는 온음음계를 구성하면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술탄의 위엄을 드러낸다. 곧이어 목관이 멘델스존의 서곡 〈한여름 밤의 꿈〉을 연상시키는 화음을 연주하면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에 뒤따라 세헤라자데의 주제가 바이올린 독주로 제시된다. 부드러우면서도 감각적인 바이올린 선율은 하프가 반주하면서 세헤라자데의 관능적인 여성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을 보여준 음악은 곧 제시부로 들어서면서 세헤라자데가 풀어놓는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현 성부는 요동치는 파도를 그려내고 샤리야르의 선율이 1주제로 사용되면서,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에 몰입하는 술탄의 호기심을 그려낸다.
2악장 렌토-안단티노-알레그로 몰토-비바체 스케르찬도-모데라토 아사이-알레그로 몰토 에드 아니마토
이 악장은 ‘칼렌다르 왕자 이야기’를 주제로 주제와 변주 양식으로 된 3부분 형식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변주는 빠르기와 반주형태에 의해서만 변화하는데, 이처럼 단순한 진행은 림스키코르사코프 특유의 명료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세헤라자데의 선율이 악장의 첫머리를 열면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으로 청자를 초대하고 있다. 곧이어 느리고 고요한 동양풍의 선율이 순례여행에 나선 칼렌다르 왕자를 소개한다. 세 번째 변주에서는 트롬본과 트럼펫이 팡파르의 형태로 샤리야르의 주제를 제시하면서 이야기의 통일성을 이어가고, 샤리야르의 주제와 칼렌다르 왕자의 주제가 함께 어우러지며 마무리된다.
3악장 안단티노 콰시 알레그레토-운 포코 라르게토
‘젊은 왕자와 공주’의 3악장 역시 ABA의 3부분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형식과 주제 면에서 가장 단순한 악장이다. A와 A' 부분은 서정적인 선율을 제시하면서 젊은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묘사한다. 경과구에서 목관이 제시하는 화성단음계는 아라비아의 색채를 가미한다. 밝고 경쾌한 B부분에서는 발라키레프의 〈타마라〉에서 선율을 가져오고, A부분에서 사용된 모티브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트라이앵글 등 다양한 타악기를 사용하여 동화적인 느낌을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A'부분은 세헤라자데의 주제로 시작하면서 다시금 악장 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각 악기들이 현란한 독주선율을 선보이는 이 부분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독주서법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렌토-비보-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마에스토소-템포 프리모
‘바그다드의 축제, 바다, 난파당하는 배’를 주제로 4악장에서는 앞의 세 악장에서 요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술탄 샤리야르의 주제가 빠른 리듬으로 제시되고 세헤라자데의 주제는 유니즌으로 더블링되면서 제시된다. 이어서 독특한 리듬이 교차되고 다양한 타악기들이 활약하면서 축제로 떠들썩한 바그다드의 풍경을 그린다. 축제의 풍경에는 3악장에서 사용된 〈타마라〉의 선율이 삽입되기도 한다. 격렬한 현 성부와 금관의 팡파르가 반복되면서 험난한 바다의 풍경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 부분에서는 1악장에서 사용된 모티브들이 다시 등장하여 신드바드가 겪었던 거친 항해를 연상시킨다. 이윽고 샤리야르의 주제가 금관 성부에서 느리고 음산하게 반복되면서 배가 난파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침내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끝을 맺고, 세헤라자데의 주제와 샤리야르의 주제가 장조로 융합되면서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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