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畵障
―柳 根
日暖花如錦(일난화여금) 날씨 따뜻하니 꽃, 비단인 양 아름답고
風輕柳拂絲 (풍경유불사) 산들바람 부니 버들가지 한들거린다
尋訪應有意 (심방응유의) 찾아온 뜻 응당 있을지니
童子抱琴隨 (동자포금수) 어린 아해 거문고 안고 따르네
柳拂絲 : 버들이 바람에 한들거림.
柳根(1549,명종4년~1627,인조 5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고산. 아버지는 영문(營門)이며, 진사 광문(光門)에게 입양되었다. 15세에 황정욱(黃廷彧)에게서 배웠다. 사마시를 거쳐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1574년 사가독서를 했으며,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했다.이해 일본의 승려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왕명으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문장과 재능을 발휘하여 겐소 등이 탄복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좌의정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의주로 갈 때 임금을 호종했고, 좌승지·예조참판을 거쳐 5도병마부체찰사가 되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했고, 이어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97년 명나라가 산둥[山東]으로부터 경강(京江)까지 군량을 운반하게 되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운량검찰사(運粮檢察使)가 되어 책임을 완수했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4년 난중에 임금을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대제학·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정을 장악하자 사직하고 괴산에 은거했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시골로 피했다는 죄로 관작이 삭탈되었다. 1
619년 복관되었으나 일체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자,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通津)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경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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