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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 3대

Bawoo 2018. 9. 15. 21:11



1. 개요

Alexandre Dumas[1]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하면 모두 세 명을 나타내며 모두 한 집안으로 3대가 내리 이름에 알렉상드르 뒤마가 들어갔다.

  • 프랑스 혁명기와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었던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

  •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

  • 춘희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


아래 두 인물은 소설가 부자로서 프랑스에선 페르 뒤마(père Dumas, 아버지 뒤마), 피스 뒤마(fils Dumas, 아들 뒤마)라고 구분해 부른다.

위와 비슷하게 한국에선 아버지를 대(大) 뒤마, 아들은 자연스레 소(小) 뒤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2.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할아버지)

Thomas-Alexandre Dumas, 1762-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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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오래된 후작 집안의 아들인 아버지 앙투완과 아프리카 노예 출신인 어머니 마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헉헉한 공훈을 세워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이후 군을 전역하고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2]으로 왔고, 이때 노예였던 마리를 거금을 주고 샀고 둘 사이에서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를 포함해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1776년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왔던 토마는 군에 입대했다. 흑인 혼혈이라 쉽사리 출세하진 못했지만 능력이 있었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공을 세우며[3] 이름을 알렸고 나중엔 혼혈인으로 이루어진 검은 군단의 부사령관, 서부 피레네 군대 사령관, 알프스 군대 사령관 등 점차 요직을 맡으며 성장했다.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던 그는 넬슨의 프랑스 원정 함대 공격으로 인해 제때 탈출하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간신히 배를 구해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폭풍우 때문에 배가 침몰했고 어찌어찌 간신히 살아남은 그였지만 도착한 곳은 나폴리 왕국.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나폴리 왕국은 그를 투옥했고 프랑스에 보석금을 요구했지만 나폴레옹과의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보상금을 거절, 풀려나지 못했다. 아내가 재산을 써가며 사방팔방 로비 활동을 벌인 덕에 조아생 뮈라가 이끄는 원정군이 왔을때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투옥동안 지병을 가지게 되고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군인 연금도 제대로 못받던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프랑스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2.1. 기타[편집]

2013년에 전기인 『The black count(검은 백작)』이 발표되었고 퓰리처상까지 수상했다.

뛰어난 군인이었던지라 프랑스 개선문 남쪽 벽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암살단의 협력자로 등장한다.

3. 알렉상드르 뒤마(아버지)

1802년 7월 24일 ~ 1870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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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andre_Dumas.jpg

1860년

1865년


위의 토마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로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철가면 등의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주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지만 재미를 위해서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열렬한 나폴레옹빠라서 호레이쇼 넬슨 전기는 원균옹호설 정도의 왜곡을 자랑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삼국지연의정도에 가깝지만 연의보다도 허구의 비중이 높다. 또한, 당시 프랑스에서는 단어수에 비례하여 일정액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원고료가 산정되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무척 길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괜히 루이지 반파 이야기로 한 챕터를 때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 행수를 늘리기 위해 말없는 캐릭터를 넣기도 했다.[4]

그래도 소위 말하는 고전 문학에서 이만한 재미를 주는 소설가도 드물기 때문에 작품이 술술 읽힌다. 뒤마의 소설들은 당시부터 '재미있고, 잘 팔릴만한 소설' 로 쓰여졌고 특히, 모험물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있기에 웬만한 양판소가공전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재밌다. 심지어 당대의 기록 중에는 외과 의사가 마취제 대신에 뒤마의 소설을 읽고 있도록 했다는 것마저 있을 정도다(!).[5] 물론, 수백년간 꾸준히 팔린다는 점에서 뒤마의 작품들이 걸작임을 증명하고 있다. 원작은 아동용(?)과 달리 유쾌한 막장스토리도 꽤 많기 때문에 읽어보면 꽤 놀랄지도.

다만, 문학사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뒤마는 프랑스 문학의 대본소 작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뒤마는 3류 작가들이나 문예 지망생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편집하는 공장 시스템을 유지했다. 여기 관련해서 유명한게 삼총사 연재시 걸린 소송이 유명하다. 삼총사가 밀라디와 리셜리외의 밀담을 엿듣는 장면을 당시 동업자인 다른 작가에게 표절 및 도용 혐의로 걸린 것. 당시는 도제 제도가 유행한 시기였는데도 소송이 걸릴 정도면 좀 흠좀무. 결국 뒤마는 원래 나온 설정에서 대사를 더 넣어서 밀라디의 비밀을 추가한뒤 리셜리외 추기경과 삼총사와의 만남 부분을 재창작하고 순서를 바꾸었다. 공장 시스템의 부작용으로 뒤마는 말년에 태작을 일삼았고 경제적으로도 쫄딱 망한다.

아래 항목에 나오는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小 뒤마)'와는 소원했다가 가까워졌다 하는 관계였다. 아들은 사생아였기 때문에 10살 때까지 아들은 거리에서 자랐고, 후일 성장한 아들이 마리 뒤플레시라는 고급 창부와 사랑에 빠지자 격렬히 반대했고 이에 격분한 뒤마 피스는 아버지와 의절해버린다. 뒤마 피스는 이 과정을 걸작 춘희에 그대로 그려냈고, 뒤마는 이 소설이 성공한 한참 후에야 뒤마 피스와 화해하게 되었다. 춘희 항목 참조.

뒤마는 말년을 아들의 별장에서 지냈다. 어느날은 아들 뒤마가 뒤마의 소설들이 모두 고전이 되었다고 말하자[6] 뒤마는 글을 쓰는데 바빠서 정작 자신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허탈해했다. 이에 아들 뒤마는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가져다 주었다. 뒤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진짜 명작이구나. 하지만 내가 결말을 읽을때까지 살아있을 것 같진 않다라고 말했다.[7]

흑인 혼혈이란 점 때문에 평생 인종주의에 시달렸는데 이에 관하여 단편 소설 조르쥬에서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내 아버지는 물라토요, 조부는 깜둥이었으며, 증조부는 원숭이었소. 알겠소, 선생? 우리 집안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했단 말이오."


뒤마가 죽은 후,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 묘지에 묻혀 있었지만 2002년에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그의 무덤을 파서 유해를 꺼내도록 했다. 삼총사의 등장인물들인 다르타냥, 아토스, 아라미스, 폴토스로 분장한 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 프랑스 헌병대의 일부) 4명이 푸른색 비단으로 덮은 뒤마의 새로운 관을 에워싸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파리 팡테옹으로 운구해 이장했다.


그 후 시라크 대통령은 인종차별주의가 존재했지만 이제 뒤마가 빅토르 위고에밀 졸라의 곁에 안장됨으로써 잘못된 것이 바로잡혔으며,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도 뒤마 만큼 널리 읽히는 사람은 없다고 연설했다.

3.1. 작품 목록


3.2. 대중 매체에서


4. 알렉상드르 뒤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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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Dumas_hijo_02.jpg
1874년

1824년 7월 27일 ~ 1895년 11월 27일

아버지 뒤마와 동명이인이 되어버린 이유는 사생아인 아들에게 1.의 뒤마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후대에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fils=아들, 영어의 junior에 해당하는 표현)라는 명칭을 붙여 구분한다. 일본 쪽에서는 '대(大)뒤마', '소(小) 뒤마'라고 구분하기도 하며 한국, 중국, 대만 등도 이 표기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법적으로 알렉상드르 뒤마의 친자로 인정받기는 했으나 사생아였던데다 거의 10살이 될 때 까지 거리에서 자라 문맹이었고, 흑인 혈통도 섞여있어 다니던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불우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고, 그의 작품들에서는 실제 사생아로서의 경험담이나 어머니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불행한 미혼모의 묘사 등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뒤마 피스 또한 아버지와 같은 소설가이자 극작가의 길을 걸었는데, 재능은 그대로 물려받았으나 글 쓰는 스타일은 아버지 뒤마와 극단적으로 달랐다. 방대한 양을 빠르게 써내려 간 아버지와는 달리 문장 하나를 붙들고 하룻밤새 고민하는 부류의 작가였다.[11] 실제로 뒤마(大)와는 "네가 문장 한 줄을 쓰는 동안 나는 책 한 권을 완성시킬 수 있다(뒤마大)" "아버지가 쓰신 책 한 권을 저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뒤마 小)"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그의 대표작은 단연 춘희, 혹은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élias). 실제 뒤마 피스 자신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따 온 자전적 소설로, 불치병에 걸린 고급 매춘부와 순수 청년의 순애보적 사랑 이야기이다. 아버지 뒤마는 이 소설의 초고를 읽은 후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춘희는 베르디에 의해 라 트라비아타라는 오페라로 각색돠었고 그 오페라 또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춘희는 연애소설의 고전이자 전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세계적 사랑을 받고 있다.

[1] 여담으로 이름의 철자가 Dumas라서 쇼생크 탈출의 헤이우드는 영어 읽듯이 덤애스(Dumbass-멍청이)라고 읽어서 동료 수감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2] 지금은 아이티의 일부다.[3] 외국을 상대로 한 전투 뿐만 아니라 내전이었던 방데 전쟁의 진압도 맡았는데 항목에 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자랑스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4] 참고로 해당 시기의 프랑스 소설 중에서 행수늘리기로 제일 악명높은 것은 빅토르 위고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워털루 전투 장면이다.[5] 출처는 산세이도에서 나온 뒤마 전기. 교차 검증 바람[6] 좋게 말하면 고전이 되었다는 것이고 사실 제대로된 후속작이 없어서 작가로서 잊혀졌다는 말에 가깝다.[7] 자뻑+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얼마나 긴 소설인지 보여준다. 참고로 영역판은 대략 1500 페이지에 110 챕터가 넘는다.[8] 여기서 파트 3만 따로 뗀 것이 철가면이다.[9] 마고는 왕비이지 여왕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왕위 계승과 관련된 법인 살리카 법에 의해 여성은 왕이 될 수 없었다. 프랑스어 Reine 이나 영어 Queen 을 '여성 군주(여왕)'으로만 해석해서 생긴 대표적 오역 사례.[10] 네덜란드 독립항쟁기를 그린 작품, 듀마의 마지막 걸작이다.[11] 그의 희곡 첫 작품은 결국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고 뒤마 피스 자신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을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정보-책/수집-나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