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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 - 영국과 백년전쟁을 시작한 왕]필리프 6세[Philippe VI]

Bawoo 2019. 5. 1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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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6세
Robert-Fleury - Philip VI of France.jpg
지위
프랑스의 국왕
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대관식 1328년 5월 29일
전임자 샤를 4세
후임자 장 2세
신상정보
출생일 1293년
사망일 1350년 8월 22일 (57세)
사망지 프랑스 외르에루아르주 쿨롬 수도원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가문 발루아 가문
부친 발루아 백작 샤를
모친 마르그리트
배우자 부르고뉴의 잔
수리아 나파로아코 왕녀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백년 전쟁
Lenepveu, Jeanne d'Arc au siège d'Orléans.jpg
잔 다르크오를레앙 포위전을 그린 낭만주의 화풍의 그림
잉글랜드의 주요인물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프랑스의 주요인물
필리프 6세 장 2세
샤를 5세 잔 다르크
샤를 7세 승리왕
주요 전투
크레시 전투 칼레 포위전
푸아티에 전투
오를레앙 포위전
슬로이스 해전
v  d  e  h


필리프 6세(프랑스어: Philippe VI de Valois, 1293년 ~ 1350년 8월 22일)는 프랑스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1328년 - 1350년)이다. 앙주 백작, 메르 백작을 겸임했다. 필리프 3세의 4남인 샤를 드 발루아 백작의 아들이다. 첫 번째 아내는 부르고뉴 공 로베르 2세의 딸 이며, 두 번째 아내는 나바라 여왕 후아나 2세의 딸 수리아 나파로아코 왕녀이다.

생애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채 죽자, 필리프 4세의 직계혈통이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필리프 3세의 남자쪽계의 손자로 제후, 승려들의 회의를 통해 선택되어 즉위했다. 이미 12년 전, 루이 10세 사망시[1]프랑크인의 옛법이었던 살리카 법을 근거로 여계계승을 배제했었기[2]때문에 필리프의 즉위는 이론없이 받아들여져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같은 군주을 모시던 연합 아래에 있던 나바라 왕국에서는 여계계승이 인정받고 있었고, 또한 필리프 자신은 나바라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루이 10세의 딸 잔느가 왕위를 계승했다.

1328년 3년 전부터 직포공의 시민과 농민의 반란으로 곤경에 빠져 있던 플랑드르 백작을 원조하여, 8월 23일 카셀에서 반란군에게 승리했다. 다음해 프랑스 왕위 후보자 중 1명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필리프의 왕위를 인정하고, 기엔느의 소유에 대해서 신하로써 복종을 선서했다. 그런데, 1333년 에드워드와 대립하던 스코틀랜드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할때 필리프가 그를 환영하였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이를 치욕으로 여기고,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였고, 1337년에 시작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340년 6월 23일 필리프의 함대는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엄청난 패배를 맞보게 되었다. 다음해 칼레가 점령을 당하고,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소금의 전매특권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에 대처했으나, 혼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당시 흑사병이 유행하여 국내가 혼란에 휩싸이는 1350년에 사망하고 아들 이 뒤를 이었다.

또한 1349년 그르노블 근처의 도피네를 구입하여, 아들 장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구입성사 이전에 본인이 죽었기 때문에, 손자 샤를(후에 샤를 5세)이 물려받았다. 이후, 도팽은 프랑스 왕태자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 칭호가 되었다.

각주

  1. 정확히는 루이 10세의 사후에 태어난 장 1세 유복자왕 루 포스담의 사후
  2. 살리카법을 발견하여 왕위계승에 적용한 것은 샤를 5세때 였고, 필리프 5세의 왕위계승에는 잔느의 적출성(嫡出性)에 대한 이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위키백과]


Philip VI of France

Philip VI and his first wife, Joan of Burgundy



발루아 왕조 최초의 프랑스 왕.
(영). Philip Ⅵ. 별칭은 발루아의 필리프(Philippe de Valois).

파리에 있는 행정부의 중앙집권화를 꾀했던 13세기 카페 왕조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나, 백년전쟁(1337~1453)이 발발할 무렵 집권한 관계로 강력한 군주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전쟁에 필요한 세금을 올리기 위해서는 귀족·성직자·부르주아지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간에는 삼부회의 정치권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왕권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고 있던 부르주아지는 은총에 감사하며 충성을 다했으나, 성직자와 귀족들 사이에서는 재정개혁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발루아의 샤를의 맏아들인 필리프는 카페 가문의 마지막 직계 왕들인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등과 사촌간이었다. 1328년 샤를 4세가 죽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당파의 반대에 부딪쳐 샤를 4세의 미망인이 출산할 때까지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샤를의 미망인이 딸을 낳아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자, 왕이 되어 1328년 5월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해 8월 플랑드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플랑드르 백작의 도움 요청을 받고 카셀 전투에서 수천 명의 플랑드르 반군을 살육했다.

이 사건 직후 필리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던 아르투아의 로베르가 왕족 중 1명에 대항하여 아르투아 백작위를 요구하자 필리프는 로베르를 재판에 회부했다. 이로 말미암아 로베르는 그에게 심한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1334년 영국으로 건너간 로베르는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사이의 알력을 조장했으며, 영국-프랑스 관계를 악화시켜 마침내 1337년 백년전쟁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처음에는 군사 행동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1340년 프랑스는 슬뤼스 해전에서 참패했다. 한편 막강한 부르고뉴 공작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왕실회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국내 사정도 악화되었다. 1343년 심각한 위기가 발생해 필리프는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해야 했다. 여기서 여론을 달래고 행정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몇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1346년 크레시에서 영국에게 참패한 프랑스는 또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반대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3명의 대수도원장에게 재정을 맡겨야만 했다. 1347년 11월에 개최된 삼부회 회의는 다시 왕이 왕실회의를 개편하도록 의결했다. 그러나 1348, 1349년 프랑스를 덮친 흑사병으로 모든 정치적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중요한 지역 몇 군데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왕국 영토에 편입시키기는 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남긴 것은 전쟁과 역병으로 분열된 프랑스였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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