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가을, 드보르자크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첼로 협주곡(B단조)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들을 작곡했고 그 모든 경험이 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사실,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은 몇 달 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느낀 강렬한 체험에서 출발했다. 그때 빅터 허버트라는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 2번을 처음 듣게 된 드보르자크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드문 편성인 3대의 트롬본을 사용한 점이 드보르자크가 받은 감동을 증명하고 있다. 작곡가의 미국 체류 경험은 이 첼로 협주곡에 새로운 영감을 제시했으며,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문화가 체코의 슬라브 문화와 만나서 의미 있는 형식을 이끌어냈다. 만약 드보르자크가 유럽에서만 활동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로 협주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문화와 체코 슬라브 문화의 만남
첼로 협주곡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의 초연은 작곡가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던 첼리스트 하누슈 비한(Hanuš Wihan)과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복잡해졌다. 런던 필하모니는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초연자로 첼리스트 레오 스턴(Leo Stern)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작곡가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미안합니다만 이 첼로 협주곡을 지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오랜 친구인 비한에게 초연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런던 필하모니가 나의 첼로 협주곡을 그날 꼭 연주해야 한다면, 저는 함께할 수가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다른 기회가 또 있을 겁니다.”
드보르자크 자신은 이 말을 지킬 수가 없었다. 결국 런던 퀸즈 홀에서 1896년 3월 19일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런던 필하모니와 레오 스턴이 세계 초연의 영광을 안았기 때문이다(같은 해 4월 17일에 이루어진 프라하 초연 때도 스턴이 연주했다). 이 일로 인해 체코 음악계의 거물이었던 비한과의 사이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드보르자크의 마음속에는 이 작품을 위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애썼던 스턴이 아니라 계속 딴지를 걸었던 비한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 같다. 첼로 협주곡의 헌정을 비한에게 바쳤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작품에 대한 브람스의 반응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군가가 이와 같은 첼로 협주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이와 같은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만큼 드보르자크의 이 작품은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첼로 협주곡이다. 영국의 첼리스트 줄리어스 해리슨은 “나는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이 낭만 음악이라는 넓은 정원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이 곡의 위대함을 칭찬했다.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의 뛰어난 녹음을 남긴 명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 모습.
Rostropovich performs Dvořák's Cello Concerto Op.104
Mstislav Rostropovich, cello
George Szell, conductor
Cleveland Orchestra
1969.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