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상군
맹상군(孟嘗君, ? ~ 기원전 279년)은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서, 전국 시대의 사군자(戰國四君)의 한 사람이다. 성은 규(嬀), 씨(氏)는 전(田), 휘(諱)는 문(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시호이다.
종횡가의 세계관을 기조로 전국 칠웅 간에 외교가로 활약하였다. 진나라에서 제나라로 돌아갈 때 재치를 보여준 “계명구도”의 고사는 유명하다.
첫 등장
제(齊)의 위왕(威王)의 손자에 해당하는, 제의 고관이었다.
맹상군, 즉 전문(田文)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제의 선왕(宣王)의 이복 동생으로 설(薛, 지금의 산동 성 등주滕州)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영에게는 40명이나 되는 아이가 있었고, 전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았다. 게다가 전문이 태어난 날은 5월 5일로 이 날에 태어난 아이는 자라서 부모를 해칠 것이라 여겨졌기에, 전영은 전문을 죽이려 했으나 전문의 어머니는 몰래 전문을 숨겨 키웠다(다만 이 일화는 사실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전문이 장성한 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불려갔을 때, 전영은 “아아, 어째서 죽이지 않았더란 말인가!”라며 노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에 전문이 “왜 죽여야 합니까?”라고 따지자, 전영은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문의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고, 전문은 “그럼 그 문을 높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전영은 느낀 바가 있어 전문을 아들로 받아들였고, 전문은 전영의 저택에서 살게 되었지만, 예전까지의 경위도 있었기에 홀대받았다.
어느 날 전문은 전영에게 “현손(玄孫)의 손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전영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전문은 “제의 영토는 전혀 늘지 않는데, 우리 집안은 부를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친척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재산을 남긴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전영은 식객(食客)을 집으로 불러 전문에게 그 대접을 맡겼다. 식객들 사이에서 전문의 평판은 매우 높아졌고 그것이 제후들에게까지 알려져, 전영은 전문을 후사로 세우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전문은 뭐든 한 가지라도 재주가 있으면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식객을 받아들여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 번은 전문이 식사하면서 식객들 사이에 칸막이를 쳤는데, 식객 한 사람이 “자신과 손님의 음식에 차이를 두니 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를 들은 전문은 그 식객에게 음식은 똑같다고 말했다. 의심한 것을 부끄러워한 손님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명구도
이 일로 전문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기원전 299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전문을 재상으로 영입하고자 했다. 전문은 이에 호응해 진으로 들어갔으나, 어떤 사람이 소양왕에게 “전문이 이 시대의 일류 인재임은 분명합니다만 제의 사람으로 진의 재상이 되어도 제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돌려보낸다 해도 진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고,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여 전문이 머무르던 저택을 포위하여 전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전문은 식객을 시켜 소양왕의 총희인 연희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연희는 전문이 가지고 있던 보물 “호백구(狐白裘)”를 준다면 소양왕에게 구명을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호백구는 여우의 겨드랑이 흰 털만 모아서 만든 옷으로 한 벌에 여우가 1만 마리는 필요할 정도로 희귀한 것이었고, 전문은 이미 진에 들어오면서 소양왕에게 이를 바쳐버린 뒤였던 것이다. 고민하던 중, 전문의 식객 중 한 명인 구도(狗盜, 개처럼 재빠른 도둑)가 나서서 소양왕의 곳간에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 왔다. 이를 총희에게 바쳤고, 그 중재에 따라 저택의 포위가 풀려 전문은 일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양왕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문은 서둘러 귀국길에 나섰고 한밤중에 국경 함곡관(函谷關)까지 당도했다. 그러나 관문은 밤이라 닫혀 있었고, 아침이 되어 닭이 울 때까지는 열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이미 마음이 바뀐 소양왕은 추격자를 보낸 상태였다. 전문이 다시 곤란해하는 와중에, 식객 가운데 흉내 잘 하는 명인이 나섰다. 그리고 그가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자 그에 이끌려 진짜 닭들도 울기 시작했고, 닭 울음소리를 따라 열린 함곡관을 빠져나와 마침내 전문은 진을 탈출할 수 있었다. 소양왕의 추격자는 새벽녘에야 함곡관에 도착했지만, 전문이 밤중에 관문을 통과한 것을 알고 돌아서야 했다.
평소 학자와 무예가 등의 식객들은 전문이 도둑질, 흉내의 재주밖에 없는 같은 사람까지 식객으로 받아들이는 전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이때만은 “역시 사람은 쓸모가 있다”라며 전문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는 여기서 유래하였다.[1]
진에서 제로 돌아가는 길에 조의 마을에 들렀을 때 마을 사람들이 전문의 키가 작다며 놀리자, 이에 격분한 전문은 식객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다만 이 일화는 사실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제의 재상과 풍환
귀국한 전문은 제의 재상이 되어, 기원전 298년에 광장(匡章)을 통수로 한, 위와의 연합군으로 진을 공격했다.
얼마 뒤에 풍환(馮驩)이라는 가난한 사람이 찾아왔다. 전문은 그를 식객으로 맞아들여 하급 숙소에 재웠다. 그러자 풍환은 차고 있던 검을 두드리며 “내 장검아, 돌아갈까? 밥상에 고기 하나 없구나!”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것을 들은 전문은 그를 중급 숙소에 재웠다. 그러나 풍환은 다시 검을 두드리면서 “내 장검아, 돌아갈까? 밖에 나왔는데 가마도 없구나!”라는 노래를 불렀다. 전문은 다시 그를 고급 숙소에 재웠다. 이번에도 풍환은 또 다시 검을 두드리면서 “내 장검아, 돌아갈까? 이래서는 우리 가족도 못 먹여 살리겠다!”며 노래해 댔다. 여기에는 역시 전문도 질렸고, 1년 정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전문은 설 땅을 백성에게 빌려 주고 그 이자로 식객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자를 내지 않는 백성도 있었다. 이를 독촉할 사람으로 풍환이 추대되었는데, 풍환은 이자를 내지 않는 백성을 한자리에 모아, 그들 중 이자를 낸 사람들에게서 거둔 그 돈으로 고기와 술을 사서 백성들과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이자를 갚지 않는 자에게 상환할 가망이 있는지 물었다. 낼 수 있는 사람은 상환 기한을 연장하고 낼 수 없는 사람의 증서는 따로 모아, 그들의 빚문서를 태워 버리고는 “전문이 땅을 빌려 주고 있는 것은 백성들에게 일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은 이자를 못 갚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증서를 불사르도록 명령을 받았다. 전문에 감사하라”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백성은 모두 감복했다. 그러나 전문은 분노하여 풍환에 따졌고, 풍환은 “이자를 못 갚을 정도로 빈궁한 사람들에게 이자를 내라고 해봤자 그들은 달아날 뿐 아니라 원망까지 할 것이며, ‘전문은 돈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성도 전문을 배신하는 빚을 내지 않는다’는 악평이 퍼져 전문의 명성도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받아낼 전망도 없는 증서 대신에, 영지 백성들에게 은혜를 팔아 천하에 전문의 덕의 높이를 알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에는 전문도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전문은 민왕(湣王)을 섬기며 재상으로서 국내외 정치를 맡아 제의 국력을 높였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자 민왕은 다른 나라에 강압적인 외교를 행하게 되었고, 그것을 충고하는 전문과 “전문이 있기에 제가 있다”라는 소문을 불쾌해했다. 결국 전문은 제의 재상에서 파면되었고, 그것과 함께 전문 아래에 있던 3천 명의 식객도 떠나 갔다. 하지만 풍환만은 남았다. 풍환은 진에 가서 소양왕을 알현해 “제의 재상이었던 전문이 진에서 벼슬 하고 싶어 합니다”라고 고했다. 소양왕은 이즈음에는 전문의 지혜나 그가 제의 내정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사신을 보냈고, 풍환은 서둘러 제로 돌아가 민왕을 알현해 “진이 전문을 제에서 빼내겠다고 하고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전문을 제의 재상으로 복직시켜서 영지를 늘려주고 사과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침 진의 사신이 제에 들어온 것을 알자마자 민왕은 전문을 제의 재상으로 복직시켜 영지를 늘려주고 그 잘못을 사과했다.
전문이 제의 재상으로 복직하자 풍환은 떠난 식객들을 불러들이도록 진언했다. 전문은 “내가 복직한 것은 오직 자네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네. 내가 재상에서 파면된 것을 보고 떠나간 놈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들이라는 건가?”라고 화를 냈고, 풍환은 다시 “그들은 전 공이 빈궁해서 떠났을 뿐입니다. 부자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고 가난하게 되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침 시장에는 사람이 있지만 날이 저물면 사람이 드물게 되는 것은 파는 것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식객들이 떠나 버린 것도 당신 개인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이래서는 생활할 수 없겠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전문도 납득하고 떠난 식객들을 불러들였다.
교토삼굴(狡兎三窟)
어느 날 풍환이 전문에게 “교활한 토끼는 도망치기 위한 동굴을 세 개 둡니다. 하지만 전 공께는 도망칠 동굴이 영지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위와 제로 달아날 동굴을 두 개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전문은 풍환에게 돈을 주어 공작을 맡겼다. 풍환은 우선 위의 양왕(襄王)을 알현하여 “민왕은 일찍이 전문을 해임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명성이 높은 전문을 위로 부르면 부국강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양왕은 기뻐하며 전문을 위해 상석(上席)의 지위를 비워두었다. 전문은 위로 가겠다고 했지만, 풍환은 그것을 만류하며 “민왕께서 달려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라며 타일렀다. 위의 사신이 빈번히 전문에게 드나드는 것을 안 민왕은 풍환의 뜻대로 전문에게 “설 땅에 선대의 묘(廟)를 세우겠으니 부디 제에 머물러 주오”라고 사정했다. 풍환은 그 말을 듣고 “이제 겨우 동굴이 두 개 생겼구나”라고 대답했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의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민왕은 다시 전문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민왕의 노여움을 산 전문은 스스로 은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백성이나 제후들의 평판은 여전히 높았고, 동시에 전문이 제에 있는 한 패자가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 진이 강하게 공작을 해오면서 민왕의 의심은 나날이 커져 결국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된다. 기원전 284년, 전문은 앞서 풍환이 마련해두었던 도망칠 길의 하나였던 위로 도망쳤고, 재상이 되었다. 그 뒤 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연(燕)의 왕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악의(樂毅)의 주도로 조 ・ 위 ・ 한 ・ 진 ・ 연의 5국 연합군이 성립되어, 민왕의 제군에 대승을 거두었고, 민왕은 악의에게 제거되었다.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제는 전단(田單)의 지략으로 겨우 재건되었고, 전문도 다시 제로 맞이되었다.
전문은 기원전 279년에 사망하였고, 맹상군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아들들의 상속 다툼을 틈타 위와 제가 설 땅을 공격해, 맹상군의 자손은 끊어지고 말았다.
같이 보기
각주
- ↑ 다만 후대 북송(北宋)의 재상 왕안석(王安石)은 저서 《독맹상군전(讀孟嘗君傳)》에서 “맹상군은 닭의 울음소리나 내고 개 짖는 소리나 내는 무리들의 우두머리일 뿐인데, 어찌 선비를 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강한 제를 마음대로 하면서 올바른 선비 한 사람만 구했어도 마땅히 천자가 되어 진을 제압할 수도 있었을 텐데, 뭐하러 닭 울음 소리나 내고 개 짖는 소리를 내는 무리들의 힘을 취해야 했겠는가? 닭울음 소리나 내고 개 짖는 소리나 내는 무리들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바로 바른 선비가 그를 찾지 않았던 까닭이다.”라며, 계명구도의 무리들이 맹상군의 문하에 모인 것이 오히려 진정한 인재를 찾을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며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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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원군:
평원군(平原君, ?~기원전 251년)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의 공자(公子) · 정치가이다. 씨(氏)는 조(趙), 휘(諱)는 승(勝)이다. 무령왕(武靈王)의 아들로 혜문왕(惠文王)의 동생이다. 휘하의 식객(食客)을 모아 형인 혜문왕과 조카 효성왕(孝成王)을 보좌하였다. 전국 시대의 사군자(戰國四君)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인사(人士)을 좋아해서 식객을 수천 인이나 모아 거느렸다. 그 중에는 공손룡(公孫竜)이나 추연(鄒衍) 등도 있었다.
약력
《사기》에 기록된 평원군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평원군의 첩이, 평원군의 식객 한 사람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식객은 몹시 노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평원군에게 「저것을 죽여 목을 내어주십시오」라고 청했는데, 평원군은 웃으면서 건성으로만 허락하였다. 그뒤 평원군 아래에 있던 식객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해 그 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그 이유를 식객에게 묻자 「다리 저는 식객이 원하던 목을 받지 못해서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평원군은 그제야 첩을 죽여서 그 목을 식객에게 주며 사과하였고, 이후 평원군에게 다시 식객이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266년, 위(魏)의 재상 위재(魏齊)가 진(秦)의 재상 범수(范雎)와 적대하다 위에서 도망쳐 평원군에게 왔고, 평원군은 이를 받아들여 진으로부터 위재를 보호하였다. 진의 소양왕(昭襄王)은 범수가 위재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게끔 평원군을 진으로 초청해 「위재를 죽여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진에서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평원군을 조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평원군은 이를 거절했지만, 효성왕은 위재를 잡기 위해 병사를 보냈고, 위재는 밤을 틈타 도망치다 조의 재상 우경(虞卿)과 함께 신릉군(信陵君)을 의지해 위로 돌아왔지만, 신릉군이 만나기를 주저한다는 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평원군은 귀국할 수 있었다.
기원전 263년, 한(韓)은 진의 공격으로 영토를 잃고 한의 북쪽 영토였던 상당군(上黨郡)이 고립되었다. 때문에 상당은 조에 귀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효성왕은 어찌하면 좋을지를 신하들에게 물었고 평양군(平陽君)은 귀부를 받아들였다가는 진과 전쟁이 일어난다며 반대했지만, 평원군은 「아주 큰 이득이 될 것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마침내 효성왕은 상당을 조의 영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진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기원전 260년 진의 장군 백기(白起)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장평 전투) 이 전투에서 조는 45만이라는 병사를 잃었고 한순간에 약체화된다.
기원전 259년, 진군은 조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고, 평원군은 구원 요청을 위해 초(楚)로 향했다. 이때 식객 가운데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함께 가기를 청했고, 평원군은 「현명한 사람이라 함은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어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끝이 주머니를 찢고 삐져나올 것이다. 선생이 내 집에 온지도 3년이 되어가지만 이렇다할 평판을 듣지 못했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라.」라며 거절했지만, 모수는 「바로 오늘이 내가 주머니 속에 들어가고 싶은 날이다. 나를 얼른 주머니 속에 넣으시면 끝은 고사하고 자루까지 빠져나올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평원군은 모수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것이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평원군은 초에 들어가 초의 고열왕(考烈王)에게 합종(동맹)을 제의했지만, 초는 예전 진에 침공당한 적도 있었기에 위협으로 여겨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모수는 칼을 쥐고 고열왕 앞에 서서 「백기는 초의 수도를 불사르고 초의 조선(祖先)들을 욕보였습니다. 합종은 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초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득하여 고열왕은 마침내 합종 제의를 받아들였다. 기뻐한 평원군은 귀국한 뒤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모셨다.
기원전 258년, 위는 조에 대해 원병을 보냈지만 도중에 머무르게 하면서 정세를 관찰했다. 평원군은 위의 신릉군의 누나를 아내로 삼고 있었기에 신릉군에게 「누나를 버리시려는가?」라는 편지를 보냈고, 신릉군은 이에 대답해 위의 장군을 죽이고 군을 빼앗아, 조에 원병을 냈다. 초에서도 맹약에 따라 원병이 보내졌다. 그러나 한단은 오랜 포위 기간 동안 무기도 나무를 깎아 만든 창밖에 없었고, 성안의 백성들도 굶주려 죽기 직전으로 자식을 서로 바꾸어 죽여서 먹는 등의 위급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안의 평원군 등 귀족들은 변함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고, 이동(李同)이라는 병사가 평원군에게 「성이 무너지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재를 모두 내놓으셔야 합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이에 평원군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고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선언했고, 시종을 시켜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노동을 하게 했다. 이에 성안의 사기는 크게 올라 생기가 돌게 되었고, 이동은 원병이 올 때까지 버틸 특공대를 모아 자신이 이끌겠다고 평원군에게 제안, 평원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동은 모집한 3천 병사를 거느리고 성밖의 진군에 공격을 가했다. 죽음을 각오한 공격 앞에 진군은 후퇴했고, 마침 원병이 도착하여 진군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특공대를 지휘했던 이동은 전사했지만, 전공이 인정되어 그 아버지가 이후(李侯)로 봉해진다.
신릉군은 그 뒤 위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에 머무르고 있었다. 신릉군이 한 번은 노름꾼과 간장 빚는 사람을 불러 환담하는데, 평원군이 「신릉군은 어찌 저런 사람들과 상대하시는가?」라고 말했고, 이를 들은 신릉군은 화를 내며 「나는 그들이 현명하다고 들어왔는데, 이런 교제를 수치스럽다 하는 당신은 겉만 번지르르한 분인 것 같구료」라며 나가려 했다. 평원군은 이를 다급히 만류하고 나섰지만, 이 이야기가 전해진 뒤 평원군을 떠나 신릉군에게로 가는 식객이 늘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은 사망한다. 자손이 평원군을 이었지만, 진이 조를 멸망시킨 뒤에는 그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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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릉군
신릉군(信陵君, ? - 기원전 243년)은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위소왕(魏昭王)의 아들이다. 이름은 위무기(魏無忌). 신릉군은 중국 전국시대의 저명한 정치가, 군사가로서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平原君 趙勝),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孟嘗君田文),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春申君黃歇)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
생애와 업적
위무기는 위소왕의 아들이자 안희왕의 이복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자 무기는 신릉군에 봉해졌다. 그는 어질고 선비를 존중했으며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기원전 257년, 앙숙사이인 조나라와 진나라는 다시 한번 결전을 하게 되었다. 진나라 군사들은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전멸한 기세를 타서 다시 한번 조나라 정벌에 나서 조나라의 도읍지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급기야 망국의 급박한 경지에 몰리게 되었다. 형국이 급하게 되자 조나라의 승상으로 있었던 평원군(平原君), 즉 전국시대 유명한 4공자(公子) 중 한사람인 조승(趙勝)은 위(魏)나라 안리왕과 자기의 손아래 처남인 위나라 승상 위무기(魏無忌, 전국시대 4공자 중 한 사람), 즉 신릉군(信陵君)에게 수차 구원을 청했다.
위 안희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안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돕는 다는 정보를 입수한 진나라 진 소왕(秦昭王)은 안리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조나라를 도울 경우 위나라도 함께 공격하겠다고 했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안리왕은 인차 진비에게 제자리에서 진을 치고 관망을 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말로는 조나라를 돕는다고 했지만 실은 일의 진전을 관망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럴수록 진나라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조나라의 상황은 더욱 위급하게 되었다.
평원군은 연속 사절을 보내 구원을 독촉하는 한편, 위나라에서 대권을 잡고 있는 자기의 처남인 신릉군이 조나라와 자기의 친 누님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결국 급해난 것은 신릉군이었다. 당시 신의와 명사들에 대한 예우로 이름이 높았던 신릉군으로 놓고 말하면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선택을 마주하게 되었다. 조나라를 구원하지 않을 경우, 하나는 위나라에서 신릉군의 위망과 안리왕의 안목에 신릉군이 없다는 결론이 얻어지게 되어 그동안 쌓았던 위망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고 조나라를 구하려 할 경우 진을 치고 관망하라는 안희왕의 명을 거역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적게는 안희왕의 눈에 나게 되고 심하게 되면 생명위험까지 있게 된다. 안리왕은 강대한 진나라가 무서워 조나라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신릉군은 또 조나라가 망하는 걸 그대로 보고있을 처지만은 아니었다.
신릉군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그동안 포섭했던 문객(門客)들과 가지고 있는 전차 백여대를 동원하여 개인적으로 조나라와 함께 생사를 같이할 준비를 했다. 이때 신릉군 위무기의 문객으로 있던 후영(侯赢)이라는 사람이 그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안리왕이 사랑하는 왕비인 여희(如姬)를 이용하여 안리왕 침실에 있는 진비의 병부(兵符, 즉 고대에 군사지휘권에 필요한 신빙물)를 훔쳐서 지휘권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지원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원래 안리왕이 가장 총애하는 왕비 여희의 아버지가 원수에게 살해되었는데 여희가 그처럼 원수를 갚으려고 해도 갚지 못했다. 그런데 이일을 알게 된 신릉군이 자기의 문객을 시켜 여희의 아비죽인 원수를 갚아주었는데 그럼으로 여희는 신릉군의 청탁을 거절 할리가 없었다.
신릉군은 후영이 시키는 대로 여희에게 병부를 훔쳐 줄 것을 청탁했고 여희는 신릉군의 은혜를 갚으려고 위나라 안리왕의 침실에 있는 진비의 병부를 훔쳐 신릉군에게 주었다. 병부를 훔친 신릉군이 진비를 찾아 가려는 데 후영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가려면 당시 유명한 무사인 주해(朱亥)를 데리고 가, 진비가 병부를 보고도 병권을 내놓지 않을 경우 주해가 진비를 격살해야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했다. 후영과 주해는 모두 비천한 사람들이었는데 신릉군이 예우를 해 줌으로 신릉군의 문객으로 된 사람들로 수시로 신릉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후영은 원래 비범한 모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집이 가난해 성문을 지킴으로 연명을 해가는 사람이었고 주해 역시 당시 유명한 무사였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저자거리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이인(異人, 비범한 재주를 갖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신릉군은 당시 위나라 조정의 각료들과 명사들을 모여놓고 후영을 모시러 갔다. 하지만 후영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신릉군 위무기가 마차를 가지고 와서야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신릉군이 마차에 오르라고 하자 추호의 사양도 없이 상좌에 앉았고, 자기를 술자리로 모시려면 자기의 친구인 주해도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다. 곁에서 많은 사람들이 후영이 너무한다고 했지만 신릉군은 아무 말없이 후영이 가리키는 쪽으로 저자거리로 주해를 찾아 갔고, 후영이 주해의 집안에 들어가 주해와 한담하는 동안 말고삐를 들고 기다렸다. 신릉군이 이들 둘을 모시고 연회장으로 들어서 술을 권하자 후영은 인사도 없이 받아 마셨다. 그리고 연회가 파한 다음 신릉군보고 자기는 신릉군을 위해 그렇게 했다고 했다. 저자거리에서 한 이름없는 인간을 위해 말고삐를 잡고 한식경이나 기다린다는 자체가 바로 인재를 중히 여기는 신릉군의 위망을 세워준 일이라고 하면서 이제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문을 들은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이 구름이 모여들 듯이 신릉군에게로 찾아 들었다.
후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신릉군은 병부를 가지고 주해와 함께 진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진비는 병부를 보고도 군사권을 자기에게 넘기라는 신릉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상시 상식상 전쟁을 앞두고 대장군을 교체하는 일은 없었으며 교체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제3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신릉군이 혼자서 병부를 가지고 대장군의 지휘권을 받으려하지 진비는 지휘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주해는 그 자리에서 진비를 격살했다. 이렇게 신릉군 위무기는 군사권을 가질 수 있어 군사를 휘동하여 조나라 구원의 길에 나섰다.
신릉군 위무기가 조나라 지원에 나섰다는 소문을 들은 초나라에서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黄歇)에게 군사를 주어 신릉군 위무기와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신릉군 위무기는 초나라, 위나라, 조나라 군사들을 연합하여 일거에 진나라 군사들을 격파하고 조나라의 도읍지 한단의 포위를 풀었다. 이게 바로 사상 유명한 절부구조(竊符救趙), 즉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한 이야기이다.
병부를 훔치고 진비를 살해해 군권을 잡아 조나라를 구한 신릉군은 위나라 안리왕이 자기를 미워할 줄을 알고 전쟁이 끝난 다음 귀국하지 않고 그냥 조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명사들을 자기의 수하에 포섭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기원전 247년, 원기를 회복한 진나라는 원수를 갚기 위한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이에 기겁한 위나라 안리왕은 수차 조나라로 사신을 보내 신릉군을 돌아오라고 했지만 신릉군은 이 핑계 저 핑계 지어 "이제 안리왕의 사신의 말을 전달하는 자는 목을 벤다"라고 하면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리왕이 모든 군권을 다 주겠다고 해서야 위나라로 돌아왔고 신릉군과는 이복형제간인 안리왕은 돌아온 신릉군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상장군으로 임명받아 위나라의 모든 군권을 쥐게 된 신릉군은 즉시 기타 제후국들에 구원을 청했고 신릉군이 상장군으로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후국들에서는 분분히 구원병을 보냈고 신릉군은 황하이남에서 진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함곡관까지 추격해갔다. 패전을 한 진나라에서는 황금 만량을 가지고 신릉군에게 살해된 진비의 부하들에게 가서 신릉군이 역모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으며 한편 신릉군에게 또 사람을 보내 이미 위나라 왕이 되었다면서 하고 축하를 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릉군을 많이 의심했던 안리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신릉군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안 신릉군은 병권을 내놓고 매일같이 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허송하다가 4년 만에 우울한 가운데서 자기의 생을 마감했으며 같은 해, 안리왕 역시 사망했다. 신릉군이 죽은 지 얼마안되어 진나라 군사들은 위나라의 도읍지를 함락했고 위나라는 결국 앞당겨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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