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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의 선면 산수도 화제-일부

Bawoo 2014. 2. 8. 12:40

아래 그림은 추사 선생이 그린 선면 산수도입니다. <부채에 그린 산수화란 뜻이지요^^> 

 

 

선생은 여기에 절구 세 수를 썼다고 합니다.

글쓴이는 그 중 첫 한 수 내용만을 소개해 놓아 화제 내용 전부를 알 수 없어

많이 아쉽긴 한데 아쉬운 대로 소개된 한 수를 옮겨 보았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더위에 그대를 떠나보내니(大熱送君行-대열송군행)

내 심경 정말 심란하다오(我思政勞乎-아사정노호)

황량한 풍경을 그려주노니(寫贈荒寒景-사증황한경)

북풍도만 할까요(何如北風圖-하여북풍도)

 

*위 시 마지막 련의 '북풍도'에는 고사가 있다고 합니다.

후한 환제 때 화가인 '유포'가' 북풍도'를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추위를 느꼈답니다. 추사 선생은 이 고사를 인용하여 '친구가 떠나고 없는, 남아있는 사람의 허전하고 막막한 마음을 나타낸 풍경을 그리고 글을 쓴 것'이라고 글쓴이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백간'이란 분에게 그려 준 것이라고 하는데 이분에 대한 설명이 없어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추측컨대 추사선생의 친구분인 것 같습니다.

 

*출처:한국학 그림을 그리다(양장본 HardCover) 저자 고연희, 김동준 외 | 태학사 | 2013.11.15.' 책 중 '친구와 그림'이란 제목의 글에서 발췌, 요약. 

 

[소감] 어느 분이 검색해 보셨길래 자료 만들 날짜를 보니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인 2014년이다.  65세이던 때. 지금 72세이니 7년 전. 검색, 복사도 할 줄 모르던 때라 한자 하나를 일일이 검색하고 그림도 책에 있는 걸 직접 찍었었다. 무지해서 생고생한 것이다. 지금 다시 보니 내용 자체도 부실한데 블로그를 채우겠다는 의욕만으로 건강 특히 눈 건강을 많이 해쳤다. 지금 검색해보니 훌륭한 자료가 많이 올라와 있건만. 돌이킬 수 없는 세월에 후회, 아쉬움만 남는다.ㅠㅠ (2021. 7. 17 제헌절에 어느 검색한 분을 따라 들어와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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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정희, 선면산수도,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림에는 김정희인(金正喜印), 장무상망(長毋相忘), 척암(惕菴)의 도장이 세 개 찍혀 있다.

출처: http://cafe.naver.com/mhdn/29420

추사의 「선면산수도」는 산수 그림과 절구 세수, 시의 의도를 설명한 글과 친구의 제사(題辭)로 되어 있다. 추사 문집에는 이 5언 절구의 세 수가 빠져있다.

 

무더위에 그대를 떠나보내니 大熱送君行

내 심경 정말 심란하다오 我思政勞乎

황량한 풍경을 그려주노니 寫贈荒寒景

「북풍도」만은 할까요? 何如北風圖

 

때는 무더운 여름이다. 추사는 친구와의 이별의 정표로 부채를 선물했다. 그림은 스산한 겨울 풍경이다. 부채를 부칠 때마다 더위를 식히라는 추사의 배려이다.

「북풍도」고사가 있다. 후한 환제 때의 화가 유포가 「운한도雲漢圖」를 그리자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덥다고 느끼고, 「북풍도北風圖」를 그리자 사람들이 바로 추워 떨었다는 것이다. 『박물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형용을 잘 한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붕어다리께에는 물이 빠졌으니 水落魚橋際

학산 언저리에는 비가 그쳤으리 雨晴鶴岫處

그림에 사람을 그려 넣지 않은 까닭은 畵之不畵人

그대 지금 그곳을 지나고 있어서지 君今此中去

 

이제는 비가 그쳤다. 학산 언저리에도 비가 그쳐 붕어다리께는 물이 빠졌을 것이다. 물빠진 그곳을 친구는 지금 막 건너가고 있을 것이다. 건너가는 친구를 그려야할 터인데 추사는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보내고 싶지 않아 그리했거나 산 안쪽을 돌아 건너가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복잡하고도 보내고 싶지 않은 추사의 심경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부채에 그린 그림은 백간 이회연에게 준 것이다. 백간은 경화세족의 일원으로 여주목사와 나주목사 등을 두루 지낸 인물이다. 한번 나가있으면 오랬동안 볼 수 없는 것이 지방직이다. 구름처럼 왔다가는 친구와의 이별은 추사에게는 더욱 아쉽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내 넋과 내 마음은 我神與我情

이끼 낀 작은 조약돌에 서려 있다오 在細苔拳石

그대 품과 소매에 들락날락 한다면 出入君懷袖

아침 저녁 자주 만나는 셈이겠지요 何異數晨夕

 

친구에게 부채와 함께 준 선물은 이끼낀 조약돌이다. 이끼낀 조약돌은 친구를 생각하는 추사의 혼과 마음이다. 그것을 꺼내 볼 때마다 조석으로 나를 본 듯 해 달라는 것이다. 연인같은 추사의 다정다감한 마음이 피부로 다가오는 것 같다. 조약돌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물로 부채와는 또 다른 우정의 징표이기도 하다.

 

원나라 화가의 황량하고 스산한 작은 풍경을 본떠서 그리고 절구 세 수를 써서 학협(鶴峽)으로 떠나는 백간(白澗) 노형을 배웅하였다. 머리에 떠올리면 그 사람은 멀지 않아 평소처럼 함께 있는 듯하다. 붓을 든 마음과 먹을 가는 심경이 넋이 나간 듯 까마득하다. 바보스런 아우가……

倣作元人荒寒小景, 仍題三絶句, 送白澗老兄鶴峽之行. 所思不遠, 若爲平生, 豪心墨意, 黯然如銷. 愚 弟惕人.

 

앞엣 것의 추사의 협서이다. 친구에 대한 이별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붓을 든 마음과 먹을 가는 심정이 까마득하다고 했다. 얼마나 그리우면 늘 함께 있는 듯하다 했을까. 물리적인 거리는 머나 심리적인 거리는 이리도 가깝다. 추사에게는 자신을 알아주는 다정다감한 친구였던 것 같다. 추사는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의 뜻이 시원스럽고 산뜻하며, 시법이 맑고 새롭다. 사람으로 하여금 여행의 고생도 잊게 할 뿐만 아니라, 가슴과 소매 사이에서 서늘하고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만들어 여름날 길을 가는 고생도 잊게 하리라. 황산(黃山)이 쓴다.

畵意瀟灑, 詩法淸新, 令人非直忘行役之勞, 懷袖間當得凉爽氣, 不知爲夏天行色也. 黃山題.

 

황산이 쓴 협서는 추사의 시와는 다르다. 추사의 시는 무거움 침울, 그리움, 아픔이 주조를 이루는데 황산 김유근의 평은 “그림의 뜻이 시원스럽고 산뜻하며, 시법이 맑고 새롭다 畵意瀟灑, 詩法淸新”고 했다. 이율배반이다.

 

추사의 그림과 시는 속으로는 헤어짐의 상심과 우울함이 깊이 도사리고 있는 반면에 겉으로는 맑고 경쾌함이 번득인다. 풍격으로 정리하면 내면에는 침착(沈着)의 풍격이 주도하고, 외면에는 청 기(淸奇)의 풍격이 주도한다고 할 수 있다.(http://cafe.naver.com/mhdn/29420)

 

내면은 침착의 풍격, 외면은 청기의 풍격이라고 했다. 추사가 준 서늘하고 시원한 부채 때문일 것이다. 부채는 이별의 선물인 바로 추사의 마음이다. 추사의 시·서·화는 이렇게 높은 격조와 깊은 심미안을 갖고 있다. 안은 뜨거우면서 밖은 시원한 이율배반이면서 이율배반이 아닌, 안팎의 뜨거움과 시원함의 경계가 없다.

추사의 그림은 꼭 필요한 곳에만 붓질되어 있어 세부가 생략되어 있다. 그래서 건조하고 황량하다. 나무와 바위는 짙은 먹으로 전체 화면은 담묵으로 처리했다. 강 사이엔 산이 연달아 이어져 있다. 저쪽에는 강마을도 산마을도 있을 듯 싶다. 친구는 화면에 없는 데도 있는 것 같고, 있는 데도 없는 것 같다. 강 건너 멀리 산녘을 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앞 강가엔 큰 나무 몇 그루가 서있다. 그런데 전부가 저쪽을 향해 목을 빼듯 서 있다. 잔가지들도 같은 쪽으로 기울어져있다. 멀리 가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며 아득히 손을 흔들어주는 것도 같기도 하다. 나무는 추사의 감정이 이입된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림은 그 사람이다. 얼마나 이별의 아쉬움이 아팠으면 그리그렸을까 싶다.

친구에게 이별의 선물로 준「선면산수도」의 시정화의(詩情畵意)는 2백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지금도 아름답고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따뜻하고도 애틋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변하는 것은 살아가는 방식일뿐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아무런 변함이 없다.

추사의「선면산수도」는 친구에게만 준 것이 아닌 각박해져가는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준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선물이기도 하다. [주간 문학신문,2016.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