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클래식]
프랑수아 지라르 감독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짧은 이야기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삶과 음악세계를 심도 있게 파헤친 영화
글렌 굴드는 서양음악 연주사상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매력적인 방법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법을 가르쳐준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음반을 통해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 저 너머에 웅웅거리며 멜로디를 따라 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피아노 소리에 저런 잡음이 섞일 수가 있지? 녹음 기술자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이렇게 황당해하며 음반가게로 달려가 당장 환불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굴드표 허밍’이라는 것을.
굴드는 노래를 부르며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본인이야 제 흥에 겨워 그러는 것이지만 녹음을 맡은 음향 기술자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 소리를 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마이크 바로 앞에서 잡히는 소리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글렌 굴드의 음반을 들으면 피아노 소리와 함께 기술자들이 ‘미처 지우지 못한’ 그의 허밍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굴드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다. 연주할 때는 늘 자기만의 의자를 가져와 거기에 앉아서 연주를 했다. 그 의자는 다리가 고무로 되어 있어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제작된 의자였다. 그는 역대의 그 어느 피아니스트보다 불량한(?) 자세로 피아노를 쳤다. 아버지가 만들어주었다는 그 유명한 의자에 앉아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건반에 쏟아질 듯한 자세로 피아노를 친다. 쉬고 있는 손으로 지휘를 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한 곡에서 다른 곡으로 넘어갈 때 곡의 성격에 따라 특이한 제스처를 쓰기도 한다. 오른손이 느리고 조용한 멜로디를 연주할 때, 지휘하는 그의 왼손은 오른손에게 “좀 더 여리게, 좀 더 여리게”라고 주문한다. 이렇게 그는 온몸을 사용해서 자기 자신의 연주를 ‘지휘’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할 때마다 들고 다녔다는 의자. 다리 바닥 부분이 고무로 되어 있어, 몸의 각도를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지라르의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짧은 이야기>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독특한 영화이다. 다른 영화처럼 이야기 줄거리가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에피소드를 나열한 독특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는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시작한다. 굴드는 많은 음반을 남겼는데, 1955년에 처음 녹음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바흐를 이런 식으로 연주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영화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비롯해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인벤션>,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등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음악들이 연달아 나온다. 그것을 들어보면 굴드가 담백한 바흐의 원곡에 얼마나 다채로운 색채를 불어넣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바흐 해석은 매우 독창적이다. 주관적인 템포 설정, 약동하는 리듬, 강렬한 악센트가 특유의 탱글거리는 터치와 어우러지면서 담백한 원곡이 발랄한 생명력으로 되살아난다. 느린 템포의 멜로디에서도 페달 하나 쓰지 않고, 놀랄 만큼 아름답고 명상적으로 그 서정성을 표현한다.
피아노 연주에 몰입해 있는 글렌 굴드. 그는 연주할 때 입으로 허밍을 넣는 습관이 있어 음반 녹음시에 음향 기술자들이 그 소리를 지우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사진: 유저프 카시(Yousuf Karsh, 1908-2002), 젤라틴 실버 프린트, 40x50cm, 1957. 사진작가 카시가 토론토에 있는 글렌 굴드(1932-1982)의 집에서 촬영을 진행할 당시 굴드는 단 한순간도 피아노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당시 굴드가 연주했던 음악은 바흐와 알반 베르크의 음악이었는데, 카쉬는 “그 연주에 푹 빠져 카메라와 조명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굴드는 잦은 순회공연으로 작곡 활동에 집중할 수 없자 연주 활동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결국 1964년을 끝으로 공개 연주회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 후 작곡과 리코딩 활동에 힘썼는데, 굴드는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공연에서 얻을 수 없었던 완벽함을 얻었다고 말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로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 굴드는 고독한 거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어서 영상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는 캐나다 심코어 호숫가로 옮겨 간다. 이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전주곡’. 몽롱하게 흘러가다 찬란하게 부딪치는 트리스탄 코드가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의 탄생을 예언하는 듯하다. 그의 운명은 어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굴드를 임신했을 때부터 그를 피아니스트로 만들겠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예정된 운명에 따라 결국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굴드가 정장 차림으로 자신이 치는 바흐의 2성 인벤션 중 제13곡의 음반을 듣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서 다큐멘터리 감독 브루노 몽생종이 등장해 기인이었던 굴드의 모습을 회상한다. 몽생종은 굴드와 절친한 사이로 글렌 굴드에 관한 책을 네 권이나 쓰고 텔레비전 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던 우리 시대 최고의 굴드 전문가이다. 영화에서 그는 글렌 굴드를 처음 만난 날을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 호텔에서 만났을 때, 그는 아주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이 말처럼 글렌 굴드는 삼복더위에도 긴 코트에 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다녔다. 이것은 그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막 같은 것이었다. 손에 병균이 붙을 수도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늘 털장갑을 끼고 다녔으며, 악수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어쩌다 악수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올해는 악수 안 하는 해로 정했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하곤 했다. 그뿐 아니다. 한번은 아는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전화를 끊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굴드는 연주회를 싫어했다. 그는 자신의 대중 혐오증을 “청중 앞에서 연주를 하면 내가 마치 어릿광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바흐의 <영국 모음곡> 5번의 ‘전주곡’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글렌 굴드의 인터뷰에서도 콘서트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영화에는 함부르크 체류 중인 굴드가 몸이 안 좋아져 연주회를 취소한다는 사실을 전화로 통보하는 장면도 나온다. 실제로 그는 번스타인에게 “저는 수없이 많은 꾀병들을 생각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연주회를 취소할 핑계거리로 써먹을 작정이에요.”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1959년 글렌 굴드(오른쪽)의 모습. 그는 항상 손에 털장갑을 끼고 다녔으며 악수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기벽을 가지고 있었다.
1964년 4월 10일,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굴드가 무대로 나가기 직전 콘서트홀 관리인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오늘이 마지막 연주회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그는 LA 연주회를 끝으로 홀연히 무대를 떠났다.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무대를 떠나겠다는 굴드의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굴드는 오래전부터 무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글렌 굴드는 여러 가지 것에 흥미가 많았다. 자기 자신을 피아니스트라는 카테고리에 가두어 두고 싶지 않았다. 영화에는 굴드가 20대에 작곡한 현악 4중주 1번이 나오는데, 사실 그는 작곡 외에도 글쓰기와 방송, 지휘, 음향기술, 다큐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주여행을 다니는 고달픈 일정을 소화하면서 이런 일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대를 떠난 것이다. 녹음과 방송을 통해 음향기술의 가능성을 알게 된 그는 콘서트홀보다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것이 대중에게 자신의 음악을 더 잘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대를 떠난 후, 굴드는 캐나다 방송국에서 장편 다큐멘터리를 여럿 만들었다. 영화에는 시벨리우스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중 ‘안단티노’가 흐르는 가운데 그가 제작한 라디오 대작 다큐들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은 대체로 고독에 관한 것들이다. 굴드의 철학과 그 정체성의 핵심은 그가 만들었던 또 다른 다큐 <북방(北方)의 정신>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북방의 정신’이란 고독, 독립, 이성, 용기, 은둔, 영적인 것, 개성, 원칙의 고수, 도덕적인 정직성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를 과시하고, 정열을 드러내고, 밝은 빛깔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지중해적인 남방(南方) 기질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영화를 보면 <북방의 정신>이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로 구성된 내레이터가 마치 바흐의 3성부 푸가처럼 대본을 낭송하는 것이 특이하다.
영화 중 고독(Solitude) 편 장면. 굴드에게 고독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그의 완벽주의 성향, 강박관념하고도 연결되어 있다.
영화에는 굴드의 독특한 관심사나 강박관념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온다. 주식에 관심을 기울여 소텍스란 회사 주식으로 대박을 낸 일과, 건강에 대한 강박증으로 수시로 온갖 종류의 약들을 과용했던 일, 매분마다 맥박과 호흡, 혈압을 체크했으며, 49세가 되었을 때, 13(4+9)이란 숫자에 불안감을 느꼈다는 얘기도 나온다.
글렌 굴드는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주자로서 생애의 대부분을 콘서트홀이 아닌 녹음 스튜디오에서 보낸 그는 무려 60여 종에 달하는 음반을 남겼으며, 바로 이 음반들을 통해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내가 굴드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것은 1993년이었어요. 그것을 듣고 나서 친구에게 말했어요. ‘세상에 어쩌면 좋아. 나 죽은 사람하고 사랑에 빠졌어’라고 말이에요.”
“뇌졸중으로 두 번이나 쓰러지고 나서 삶의 의욕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가있던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했더라구요. 굉장한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 라디오를 틀어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라디오를 틀었지요. 바로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버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글렌 굴드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연주를 듣는 순간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마치 하늘로 올려 보내는 기도와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끝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굴드는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 그저 ‘다름’에 불과했던 것이다. 스스로 세상일에 참여자가 아니라 참관자가 되기로 했지만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진실한 친구가 아주 많았으며, 전화를 통해 늘 그들과 접촉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아주 신사답고 상냥하고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세상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의 삶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사람들 중에는 굴드를 은둔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는 녹음과 방송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었다. 청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동시에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존재방식을 선택한 ‘창조적 은퇴자’였다.
글 진회숙(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