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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조슈번, 막부 10만대군의 공격을 기적적으로 격퇴하다!

Bawoo 2019. 9. 28. 22:18




5천 조슈번, 막부 10만대군의 공격을 기적적으로 격퇴하다!

 

 

*** 다카스키 신사쿠가 1천명으로 공격해 함락한 규슈 제번 막부군 2만이 지키던 북슈규 고쿠라성 ***

 

조슈번병 4천을 상대로 불과 80명으로 기병한 다카스키 신사쿠 의 거사 성공후에

조슈군 의 개편은 오무라 마스지로 가 맡았는데 1,865년 3월 전번 일치

군령권을 통일해 국민개병제 를 이루어 1,866년 에도 막부와 2차 전쟁에 대비합니다.

 

 

조슈(長州)번오무라 마스지로 는 후일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

문제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가 1만 2천 병력으로 세이난전쟁 반란을

일으키자 신정부군을 총 지휘해서 규슈 방어에 성공하게 되나 1,869년에 암살됩니다.

 

 

조슈번(야마구치) 지사 들은 교토로 올라가 천황(일왕)의 공경들을 움직여 도쿠가와

에도 막부로 부터 권력(통치권)을 천황(일왕) 에게로 회수하려다가

라이벌 사쓰마번(가고시마) 이 에도막부와 연합해 저지에 나서니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른바 1,865년 4월 금문의 변 으로 조슈번은 중과부적으로 참패 하는데 당시 

교토 전투에서 살아남았던 하기시 요시다 쇼인의 학숙 쇼카 손주쿠 졸업생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는 숨어지내다가 마침내 조슈번에 복귀 합니다.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가 없는 동안 다카스키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글로버의 제안으로 시모노세키를 개항 해 무역의 이득을 취하려다가 양이

부르짓는 조슈번 강경파 무사들로 부터 원성을 사니 암살을 피해 번 밖으로 도주합니다.

 

 

조슈번으로 돌아온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가 "개항 포기" 를 선언하고는

강경파 무사들을 달래면서 신사쿠와 히로부미도 귀국 하는데 이 무렵 막부는

프랑스 차관 240만불로 요코스카를 툴롱항 처럼 개조하며 2차 조슈정벌 을 선언합니다!

 

 

시코쿠 도사번 출신의 지사로 일본 최고 검객 사카모토 료마 견원지간 인 조슈와

사쓰마의 화해를 추진하고자 사이고 다카모리 에 이어 사쓰마 중신까지 설득해

신뢰가 쌓이자 사쓰마의 자금을 빌려 나가사키에 해운회사 가메야마사추 를 설립합니다.

 

 

한편 료마 의 친구인 도사번의 나가오카 신타로 교토 금문의변 에서 조슈군과 함께

싸운 인연을 이용해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등을 설득합니다.

 

 

료마사이고 다카모리 와 담판해 사쓰마번의 이름으로 무기를 구입 해 조슈군에게

넘겨주는데, 당시 상하이 에는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 무기가 산 처럼 쌓여있었습니다.

 

 

 

1,865년 7월 이토 히로부미 나가사키 에서 무기중개상 글로버 를 만나 소총 7천정

(후장총인 신식 미니에총 4천정 포함) 군함 을 구입하는데 당시 막부군

소총인 게벨총은 전장총 구식으로 미니에 후장총은 전장총 10정의 위력 있었습니다.

 

 

저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글로버 는 서양 무기를 일본에 중개해 막대한 돈을 벌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나가사카 미나미 야마테 언덕에 저택을 지으니...

글로버 가든 이라 불리는 곳인데 훗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 의 모델이 됩니다.





 

한편 료마는 조슈가 일방적으로 신세를 지면 곤란하다고 보아 흉년 으로 고통받는

교토 주둔 사쓰마군 을 위해 조슈산 쌀을 중개해 조슈의 체면 을 세워줍니다.

일본에서는 부모들이 아이에게 어릴적 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이 있으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迷惑をかけない (메이와쿠오카케나이,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

해서 버스를 탈 때도 친구가 토큰 하나 내어주는 법이 없으며 셋이서 술을 마시고

10,000엔 나오면 와리깡 이라고 각기 3,333엔씩 동전까지 세어 정확히 나누어 계산합니다.

 

 

이는 남에게 신세를 지면 "빚" 이 되는 것이니 살아 생전에 그걸 갚지 못하고 죽으면

인간이 아닌 것이라! 해서 부채의식 을 지니지 않도록 료마가 해결해준 것이지요?

 

 

교토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 로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와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토회간살적 ( 討會奸薩賊 ) 오랜 원한을 씯고 "동맹" 을 맺습니다.

 

 

료마자존심 문제로 주저하는 다카모리에게 “조슈가 가엽지 않느냐”고 말하니

깨우친 다카모리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조슈에 동맹을 제안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해서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큰북 과 같으니 크게 두드리면 큰소리,

작게 두드리면 작은 소리가 난다고 했는데 "포용력과 친화력" 이 컸던 것이지요!

 

 

조슈 하기시 마쓰모토촌 요시다 쇼인 이 세운 학숙 쇼카 신주쿠 에서 기라성

같은 인재가 쏟아졌듯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태어난 가고시마 도 그러합니다.

 

 

가고시마의 가지야 마을 加治屋町(가치옥정) 에서도 메이지유신 3걸중 2명인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외에 러일전쟁시 육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 원수 그리고

대마도 해전의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과 해군 대신 사이고 쓰구미치 가 탄생했습니다.

 

 

1,866년 5월 에도 막부는 조슈 2차 토벌 을 결의하고 번주 부자의 에도 출두 및 36만석

중에서 10만석 삭감을 통고하고 쇼군 이에모치 오사카성에 대본영 을 설치합니다.

 

 

 

도쿠가와 막부군 10만 대병을 맞아 조슈가 동원한 병력은 5천 으로 막부군은 세토내해

오시마산요의 게이슈, 산인의 이시카와 그리고 규슈의 고쿠라 로 쇄도합니다.

 

 

사쓰마번이 조슈번과 비밀동맹 으로 수도 하기 공격을 거부 해서 전투는 4곳 에서만 벌어

지는데 6월 7일 막부군은 조슈 변경 오시마 大島(대도) 를 맹포격하고 점령합니다.

 

 

  

육상전은 오무라 마스지로 이토 히로부미 에게 맡기고 해군 총독 다카스키 신사쿠

오시마 탈환 을 위해 200톤급 군함 헤이인마루 1척을 이끌고 6월 12일 야밤에 기습합니다.

 

 

 

막부군은 1천톤급 후지산등 서양군함 4척과 일본전함 6척등 10척 있었으나 야밤중 이라

엔진을 끈 상태여서 움직이지 못해 괴멸 당하니 신사쿠는 오시마 탈환에 성공 합니다!

 

 

 

오시마 섬 을 되찾은 다카스키 신사쿠 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1천 결사대 를 이끌고

에도 막부의 직할 영지이자 규슈를 통제하는 전략 요충으로 구마모토와

후쿠오카등 규슈 6개 번에서 2만명 이 집결한 북규슈의 고쿠라성 을 공격 합니다.

 

 

5척의 군함을 2개 함대로 나누어 1함대는 신사쿠 가 지휘해 다노우라 포대 를 공격

하고 2함대는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가 지휘해 북규슈 모지 를 공격합니다.

 

 

6월 17일 료마 함대의 지원을 받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1,000명을 인솔해 상륙전

펼친 끝에 7월 2일 고쿠라선 방어선 을 돌파하고 7월 27일 총공격 을 실시합니다.

 

 

당시 막부군 총사령관은 집정관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인데 막부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부터 600만냥 군자금과 일곱척 군함 차용을 교섭중 이었습니다.

 

 

 

7월 19일 쇼군 이에모치 가 갑자기 죽고 막부가 혼란에 빠지자 의욕이 저하된 나가미치

도망치니 막부군은 31일 고쿠라성에 불 을 지른후 퇴각하고 8월 2일 함락 됩니다.

5천에 불과한 조슈번이 사쓰마번의 암묵적인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나 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의 여러 번에서 동원한 "10만 대군의 공격을 격퇴한 기적" 을 이룬 것입니다.

 

 

 

고쿠라성 小倉城(소창성) 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용장 호소카와 타다오키 가 번주로

임명되자 나카스에 있던 본성을 1,605년에 고쿠라 로 옮기면서 축성한 거성입니다.

 

 

호소카와 가문 에서는 훗날 성을 재건할 때 1,866년 경인년 호랑이 해 에 성이

불탔으므로...... 호랑이 암수 2마리를 성의 벽에다가 그려 넣었습니다.

 

 

급사한 기슈번 출신 쇼군 이에모치 후임으로는 쇼군 대리 미토번의 번주 

요시노부고쿠라성 함락에 전의를 상실 하고 조정에 조슈정벌

철회를 요청 하는데 그는 도쿠가와가에서 분가한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입니다.

 

 

부친이 미토번을 다스리다 보니 그는 직할 영지와 가신단 및 군대가 없는 귀공자로

자란지라 자신의 영토유지를 위한 치열한 전투의식 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인데

전쟁에서 살아난 조슈번 은 2년후 1868년 사쓰마번과 손잡고 무진전쟁 을 일으키니

만약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 끝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면 메이지 유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출처: 정보 - 책 / 자료 수집 -카페 "일본 여행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