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군사 훈련 "초월 - 주르허 2015 '에서 최초의 공군-육군 합동 훈련을 실시했다. 지금 일본에 위협을 주고 있는 중국의 군사력의 일부는 패전 후 구 일본 공군이 만든 것으로 (역자-오늘 이 글에서) 소개한다.
◆ 패전 직후 일본군 쟁탈전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중국 공산당 (중공)군을 이끄는 마오쩌둥은 즉시 대륙 각지에 있는 일본군 진영을 향해 진군시켰다.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였을 때 천황 폐하의 옥음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국민당 정부군을 이끄는 "중화민국"충칭 정부의 주석 · 장개석은 승리 선언을 발표하고 동시에 "일본군은 중화민국 충칭 정부에 항복해야 하고, 무장 해제는 충칭 정부가한다. 일본군은 그때까지 대기하고 무기를 중공군에 넘겨서는 안 된다 "고 지시했다.
지나 파견군 총사령관이었던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은 장개석의 "以徳報怨(이덕보원 원수에게 덕으로써 보답함)"을 취지로 한 승리 선언에 감동하여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전 일본군에 대기를 지시했다.
그런데 내전에 대한 진지 배치를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던 중공군은 허베이성과 산둥성을 비롯해 소련군이 장악한(원래 만주국이였다) 동북 3성으로 나아가 일본군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해 적지 않은 무기와 포로를 획득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945년 9월 말에 중공군에 포착된 관동군 제2 항공군· 제101 교육 비행단· 제4 연성 비행대 300여 명과 군용기 수십 대일 것이다.
동북민주연합군 총부(중공 측)의 린뱌오, 펑진 및 제4 연성 비행대 대장이었던 하야시 야이치로(소령)와 직접 협상해 중공군의 항공학교 창설을 위해 협조해 달라고 머리를 숙였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 중앙은 항공 학교도 비행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오는 9월에 들어서자 동부민주연합군 총부에 항공학교의 창단을 서두르도록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강사가 되어야 할 인재가 없었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전 일본군 항공 관계자였던 것이다.
장제스는 일본군을 포로로 붙잡지 못하게 하고 조기 복원을 명령해 1년 뒤인 1946년 가을까지는 재향 군인을 일본으로 귀국시키고 있다. 그에 비해 동북 3성을 지배하고 있던 소련군은 일본군을 포로로 삼아 시베리아에 보내고, 중공군은 일본군을 포로로 삼아 "사용할 사람은 사용하자"라고 했다.
전 관동군으로서 당시 랴오닝성에 있던 하야시 대장은 시베리아 송환을 피해 포로로서가 아닌 "교관"으로서 대우를 하는 것 등을 조건으로, 중공 측의 신청을 받아 들였다. 이렇게 1946년 3 월 1일 장제스 통치 하의 '중화민국'에서 중공의 '동북민주연합군 항공 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중공 측의 공군 학교 제1호이다. 사용된 것은 Tachikawa Ki-55 Ida(타치카와 99식 고등 연습기)나 Tachikawa Ki-54 Hickory(타치카와 1식 쌍발 고등 연습기) 등이다.
[출처] <번역> 중공 공군을 만든 것은 일본군|작성자 히라사와 유이에사 발췌
정보- 책" 간도특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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