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 마사후미 (有馬正文)
1895년 9월 25일 생 - 1944년 10월 15일 사망
아리마 마사후미는 1895년 가고시마 현 이쥬인무라(伊集院村 - 현 히오키 시)에서 태어났다.
가고시마 현립 제 1 가고시마 중학을 거쳐 해군병학교 제 43기로 입교한 그는 입교당시 성적은 100명 중 51등, 졸업시엔 96명 중 33등이었다.
졸업 후 잠시 포술반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이후 항공반에 들어가 대좌로 승진할 때까지 스스로 솔선수범해
항공조종술을 공부했다. 여러 전함과 함선의 함장을 거쳐 1942년 5월 25일에 항공모함 쇼가쿠(翔鶴)의 함장이 된
아리마는 일본군의 과달카날 작전시기라 제 2차 솔로몬 해전, 남태평양 해전, 제 3차 솔로몬 해전등에도 참가했다.
남태평양 해전에선 적기의 폭격을 받고 피탄당한 쇼가쿠를 미끼로 적의 공격을 유도하자고 사령관이었던
나구모 주이치에게 진언했지만 각하당하고 말았다. 1943년 해군소장이 된 아리마는 1944년 4월 9일에 제 26 항공전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필리핀, 민다나오 섬 다바오에 취임했지만 상급부서인 제 1 항공함대가 티니안에서 옥쇄하는 바람에 한순간에 지휘계통이 혼란스러워졌다.
제 1 항공함대 사령부를 재건해 필리핀 제도방위 임무가 주어졌지만 제 26 항공전대는 제 1 항공함대가 직접 통솔하게 되어 아리마의 역할은 사실상 끝나버렸다. 미군은 필리핀 섬들의 점령을 목전에 두고 일본 육해군 항공병력의 소멸을 꾀하여
오키나와, 타이완을 포함해 대규모 공격을 걸었다. 일본군은 반격으로 미군에게 타격을 주려 했지만 실제 피해는 일본군 쪽이 더욱 막대해져갔다.
대만해협 항공전 말기, 제 26 항공전대 사령관 시절 스스로의 사생관을 암시하듯 아리마는 스스로 1식 육상공격기에 올라 적함에 돌입하는 카미카제 특공대의 선봉에 나섰다. 아리마의 특공은 자학적인 공격이 아닌, 부하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고무적인 공격이었다.
마지막 출격시 그는 계급장을 떼고, 쌍안경에 새겨진 사령관 이름을 칼로 지우고 출격했는데
미군 항공모함인 <프랭클린>을 상대로 공격에 나섰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고 말았다.
아리마의 전사는 일본군 전체에 공포되었는데 사후 중장계급이 추서되었다.
아리마는 해군병학교 시절 집안이 파산해 고생을 겪었는데 전장에서는 투장(鬪將)이었지만 해군장교로선
하급자에게 온후하고 존댓말을 써 일반적으로 강압적인 상관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함재기들이 출격시
귀환하지 못하는 기체가 있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해 함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스스로 쌍안경을 들고 부하들이 돌아오기만을 끝까지 함교에서 지켜보며 내려오지 않았다.
또 전사한 부하의 가족에겐 일일히 자필로 위로의 편지를 써 보내는 등 아리마의 인품은 타인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의외로 아내를 끔찍이 아낀 애처가로도 유명했다.
[출처] 정보 -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저자 이광훈 | 포북(forbook) | 2016.9.9.
에서 시작된 물음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이어졌고, 메이지유신 사적지를 따라가며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 여정을 비교 분석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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