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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 미친 여왕] 후아나(Joanna)

Bawoo 2019. 11. 2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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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후아나 (Joanna)
출생
사망
1555년 4월 12일 (75세)
스페인 토르데실랴스
재위
배우자
펠리페 1세 (1496년 결혼 / 1506년 사망)
자녀
레오노르, 카를 5세, 이사벨,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탈리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이사벨, 후안, 마리아, 카타리나

카스티야-레온 왕국이사벨 1세아라곤 왕국페르난도 2세의 차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어머니이며, 카타리나의 둘째 언니이자 헨리 8세의 처형.

어머니인 이사벨 1세가 하얀 피부에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고 하고 초상화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딸들인 후아나[1]나 막내 딸인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 카타리나 역시 미인형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2]

원래는 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의 차녀로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오빠 후안이 일찍 죽고 언니 이사벨이 사망하면서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 되었다.
1495년 16살의 나이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이자 '잘생긴'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던 필립과 결혼을 한다.[3] 이때 후아나의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4] 후안은 필립의 여동생인 마르가리타와 결혼을 한다. 아라곤 쪽의 두 남매는 모두 서로의 배우자인 오스트리아의 남매에게 미친듯이 빠져들게 된다.[5] 하지만 남편인 필립은 후아나의 애정을 부담스러워하며 이리저리 바람을 피우고 다니고, 후아나는 더더욱 그런 남편을 잡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6] 부부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모후 이사벨이 사망할 당시에 그들은 별거 중이었다.[7] 필립은 아내가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가 되자 후아나의 왕권을 탐냈고 저지대에서의 결혼생활 중에서도 후아나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그녀를 감금했다거나 학대했다는 소문이 도는 둥 스페인에서도 평판이 극히 좋지 않았다. 후아나가 25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인 이사벨라가 사망했고 위의 다른 형제가 모두 사망하여 후아나가 어머니의 영토인 카스티야의 여왕이 된다. 나중에는 남편인 필립 역시 공동으로 카스티야의 왕이 된다.

하지만 남편 필립이 1506년 장티푸스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고 후아나는 너무 슬퍼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되었다. 이때 후아나는 막내 아이인 카타리나를 임신 중이었는데 이 딸은 이후 후아나가 유폐될 때 함께 유폐되어 어린 시절을 갇혀서 보내게 된다. 유폐된 이후 막내아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이들은 시누이이자 새언니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르게리타에게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마르게리타는 그동안 2번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살아남은 자녀 없이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끝나게 되는데 본인은 더이상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홀로 네덜란드를 통치하며 지냈다. [8]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이 부부 사이였던 것일 뿐 통치권도 각각 갖고 있었기에 레콩키스타의 완수와 별개로 두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서 각각 다른 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카스티야 왕국과 달리, 아라곤 왕국은 원칙적으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9] 이사벨라 1세가 페르난도 2세의 아내로서 일단 공동 통치자 명분으로 아라곤의 여왕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벨의 후계자인 후아나도 일단은 아라곤의 여왕이란 직책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딸인 후아나가 결혼한 이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명분으로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는 한편, 재혼해서 후계자가 될 아들을 생산해 그로 하여금 아라곤의 왕통을 유지하려 했다. 즉 아라곤이 카스티야를 흡수하는 형식으로 통일을 이룰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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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로,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 후아나 여왕의 남편으로서는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이에 후아나의 남편인 필립은 분개하여 반발했고, 여왕의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원래 자신의 영지인 저지대에서 스페인으로 귀국하던 중 배가 표류하여 영국헨리 7세에게 볼모로 잡히는 등 소란을 빚는다. 이에 국내 상황이 내전 직전으로 돌아가자 스페인의 의회인 코르테스는 논의 끝에 후아나를 합법적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으로, 그 남편 필립을 카스티야의 왕[10] 펠리페 1세로 인정하며 카스티야의 실권을 펠리페 1세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지 단 두 달 만에 병으로 급사해버리고 말았는데, 일설엔 장인인 페르난도가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펠리페 1세는 '미남공'이라 불릴 정도로 워낙 훤칠하게 생긴 데다 바람기까지 있는 탓에 후아나가 즉위하고도 부부는 오래 붙어있지 못했지만, 후아나는 그런 남편을 끝까지 편집증적으로 사랑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큰 상심에 잠겨 더욱 정신적으로 불안해졌으며, 남은 40년 여생을 홀몸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기행 때문에 그녀는 미친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 Juana la Loca)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기행으로는 남편이 죽은 후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잠시간 지연시킨 일이 있는데, 자극적으로 각색된 루머에 의하면 남편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죽은 남편의 시체를 끌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페르난도 2세는 사위 펠리페 1세가 죽자 딸 후아나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스페인 1인 통치에 들어가 더욱 의욕적으로 대외 팽창에 나선다. 그는 이미 1504년 프랑스와 각축을 벌여 이탈리아나폴리시칠리아를 차지했고, 1512년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낀 나바라 왕국의 피레네 산맥 이남을 차지했다. 신대륙 정복에도 한창 가속도가 붙어 쿠바를 비롯한 중아메리카 동부 해안이 스페인 수중에 떨어졌다. 그런 한편으로 통치를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 1507년 나폴리에서 귀국 직후 딸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그러니까 카를의 여동생이자 페르난도의 외손녀-과 같이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고 카스티야 섭정직에 올랐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권력을 분점하지 못하게 유폐했다는 설과 그녀를 노리는 정적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설이 있다.

페르난도 2세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 1세가 사망한 이후 거의 바로 자식보다도 어린 프랑스 왕실 혈통의 저메인(Germaine)을 왕비로 들였는데[11]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식이 없자, 후아나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아라곤 왕위에 대한 건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그는 사위인 펠리페 1세를 정말로 싫어했고, 그 싫어하는 사위의 영지인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맏손자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었지만 이럴 경우 아라곤은 페르디난트에게, 카스티야는 카를에게 분할상속될뿐더러 또 다른 내전을 부를 여지가 있었기에 카를 5세 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페르난도 2세 사후, 결국 카를은 어머니 후아나와 공통 통치자 형태로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이었고, 그 아들인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 이르러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스페인 연합왕국이 출범하게 된다. 다만 카를 5세는 어머니를 유폐당한 상태 그대로 놔둬서, 그녀는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후아나는 사망할 때까지 공식 직함 대부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에, 카를 5세는 그녀 생전엔 어머니의 공통 통치자로서 스페인을 통치했다.

카를로스 1세는 통치 초기에 스페인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는 바람에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1520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잠시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후아나가 유폐되어 있는 장소, 토르데시야스를 점령하고 후아나에게 완전한 통치권을 넘긴다는 문서를 들이밀고 실권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아나는 국정을 이끌 자신감도 없고 의심도 많아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12] 특히 후아나의 자식들은 막내 카타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에 정이 없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찾지도 않아 가정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다. 그나마 죽었을 때 카를 5세가 장례를 치뤄주었으니 다행.[나무 위키]

[1] 후아나는 후안의 여성형 이름으로 오빠인 후안이 있지만,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에 후안이라는 이름을 어떻게든 후세로 남기려고 후아나의 이름을 후아나로 지었다. 그리고 진짜로 후아나가 후계자가 된다.[2]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아라곤의 캐서린은 흑발 흑안의 음울한 여성으로 그리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당시 미인으로 치던 얼굴이다.[3] 바람둥이였던 필립은 공식적인 결혼식 하루 전날 부인이 될 후아나의 방에 가서 벌써 동침을 했다.[4] 후계자에게 내려지던 작위로 영국의 웨일즈 공 같은 것이다.[5] 오빠인 후안은 부인 마르가리타에게 매우 빠져들어서 몸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성관계를 너무 열심히 하다 기력이 소진되어 사망했다고 할 정도.[6] 아예 남편의 정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하여 그거 보고 분노한 남편한테 빰을 얻어맞기도 했다.[7] 물론 그렇다고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서 부부관계는 가져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필립은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2남 4녀를 가졌다.[8] 당시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 등 남성이 없이는 권리를 내세울 수도 없었는데 이 시기에 마르게리타는 더이상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요즘 시기의 "나 결혼 더 안 해"와는 다른 의미이다. [9] 다만 이는 나중에 페르난도 2세가 자신의 사후 후아나가 아라곤의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쳐두었다.[10] 보다시피 작위에 레온이 빠져있는데, 아내 덕에 왕으로는 인정하되 약간 격이 떨어지는 칭호를 준 것이다.[11]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외조카로 페르난도 2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지만 이 아들은 태어난 지 몇시간 만에 사망해버린다. 이후 자녀는 없다. 그런데 이 아들의 이름도 후안..[12] 유폐당했다기보다는 후아나 본인이 탑에서 나가는 걸 거부했다는 말도 있다. 유폐 과정 자체는 그녀의 의사와 무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탑에서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정보]
대항해시대의 탄생

그녀가 정말 미쳤는지 아니만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권력 싸움에 희생된 불쌍한 여인인지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 어머니인 이사벨라의 외가 쪽 가계에 정신이 미약한 사람이 많았는데 유전적인 영향을 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광적인 미침보다는 우울증 쪽에 가까운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