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承疇 (Hong Chengchou)
1593년 ~ 1665년
명나라 말기의 장군[1], 계료총독[2], 병부 상서[3]
1. 개요
2. 관직에 몸담다.
만력 43년(1615년), 23세의 나이로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회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형부강서청리사주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원외랑, 랑중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형부에서 6년의 세월을 몸담았고 천계 2년에는 절강 제학 첨사로 임명되었다. 뛰어난 식견으로 여러 인재를 발굴하였고 조정에서 많은 칭찬을 들었다. 이후에도 량절승선포정좌참의로 승진하였고, 더해서 섬서도독참의가 되었다.
3. 농민 반란을 진압하다.[편집]
당시 명나라는 암군의 연속적인 등장과 환관의 전횡 등으로 정치 상황은 문란하였을 뿐 아니라 이갑제의 붕괴에 더해 유례없는 대기근으로 명나라 곳곳의 백성들에게는 지옥도가 펼쳐졌으며 섬서와 산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등,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최악의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섬서포정사[5]참의[6]가 되었던 1627년(천계 7년)에는 혼란한 정치 상황과 파탄난 농촌 경제가 원인이 되어 각지에서는 농민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홍승주가 부임한 섬서 지방은 본디 가난한 지역이었으며, 연이은 재해 등으로 흉년이 들고 쌀값이 폭등하여 더욱더 상황이 암울하였다.
급기야 1628년(숭정 원년) 7월에는 왕가윤, 양륙을 비롯하여 여러 도적의 무리들이 일어나자, 섬서의 전 지방이 이에 호응하였다. 1628년 ~ 1630년에는 고영상, 장헌충, 이자성 등이 앞다투어 준동하였으며, 기타 여러 우두머리들의 세력까지 합한다면 섬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은 두 자리 수를 넘게 되었다. 또한 명나라 말기의 암울한 상황의 영향을 받고 적지않은 관군들도 이들 농민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반란군의 핵심 전력이 되어 명나라를 내부에서 붕괴시키고 있었다.
1629년, 왕좌괘를 위시한 반군이 한성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아직 참정의 벼슬에 있던 홍승주는 구원군으로 참가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백의 농민군을 죽이며 한성을 지켜내어 능력을 보이게 된다.
1630년, 연수순무로 부임하며 양학[7]의 수하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반군에 대한 명나라의 대전략은 양학이 제시한 초무 정책이었다고 한다. 초무(招撫). 불러서 어루만지다. 즉, 저항하였던 반란군에게 자비와 선처를 베풀어 용서하는 일종의 유화책이었는데, 홍승주는 이 초무책에 반대하여 적극적으로 토벌하고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항복한 자들까지 모조리 죽여야한다고 아뢰었다.[8]
1631년에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묻고 총독 양학이 파직되었는데, 그 공석을 메우기 위하여 조정은 홍승주를 총독으로 임명한다. 총독에 자리에 오른 홍승주는 양학이 세웠던 '자비를 베풂으로써, 만방에 자비를 보여 반란군을 회유한다'는 대전략을 버리고, '철저하게 반란군을 짓밟음으로써, 군대의 위엄과 강력함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감히 반란을 저지를 생각을 하지못하게 한다', '토벌한 연후에, 잔당들을 회유한다'라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세운 전략에 따라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 당시 반군의 온상이었던 섬서 지역을 공격하였다.
1632년에는 홍승주 이하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된 반란군의 일부가 공세를 피해 경양 지방으로 도망쳤는데, 홍승주는 끈질기게 쫓아와 경양에서도 전투를 지휘하였다. 명군과 반군은 서오 지역에서 수차례의 전투를 치뤘고, 반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우두머리인 두삼, 양노시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전투로 홍승주는 조정에 크나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전투에 대해 말하기를 '서오 대첩'이라 칭하였다.
숭정 7년, 1634년 숭정제는 홍승주를 섬서 삼변 총독으로 임명하며 태자태보, 병부상서를 겸직토록 하였을뿐 아니라 섬서, 산서, 호광, 사천, 하남 등 다섯 개 성의 병권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홍승주는 명나라 농민 반란군 토벌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곧 군대를 지휘하여 섬서 지역의 반란군을 포위, 압박하였다. 당시 섬서 지역의 반란군은 틈왕 고영상과 그 부하였던 이자성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는데, 그 수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홍승주는 휘하 장군들인 총병대장 하인룡, 좌광선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공격하였고, 반란군은 이들에게 패하여 동쪽으로 도주, 하남 지역의 영보, 사수 등으로 이동했다.
1635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동관에서 출진하여 하남의 신양에서 병력을 소집하여 농민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반란군은 3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한 갈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섬서 지역으로 되돌아 진입하였고, 한 갈래는 북으로 진군하여 산서 지역으로 진입했으며, 나머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봉양을 공격하고 황릉을 불태우는 등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홍승주의 군대가 하남으로 집결하는데에는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그 틈을 타 반란군은 대부분 섬서 지역으로 이동한 뒤였다. 홍승주는 회군하여 섬서로 되돌아갔는데, 이자성은 이미 영주, 진녕의 관군을 격파하고 함양을 함락시켰으며, 그 기세로 서안을 위협하였다. 고영상과 장헌충은 지역의 관군을 견제하기위해 3갈래로 나누어 하남으로 이동했는데, 명 조정에서는 반란군이 유동적으로 연계하며 활동하는 상황을 인식하고 대규모의 전면적인 포위를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각 지역별로 작전을 전개하여 각개격파하는 방침을 세웠다.
명 조정은 1635년 8월, 노상승을 오성 총독으로 임명하여 중원 지역을 담당토록 하였고, 홍승주로 하여금 서북 지역의 반군 토벌을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조정은 섬서 지역의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한중의 고영상과 장헌충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홍승주는 섬서 북부 지역의 이자성을 공격하였다.
홍승주는 이자성을 또 다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고 이자성은 총산 지역에 갇혀 3개월 동안의 처절한 세월을 보내며 와신상담해야 했다. 이 무렵 고영상은 반란군을 데리고 한중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섬서 순무 손전정의 매복을 만나 큰 손실을 입고 도주하던 끝에, 섬서 주지 지방에서 홍승주가 이끄는 군대에 잡혀 포로가 되었고 경사로 압송되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고, 그의 잔존 병력은 이자성과 합류하여 이자성을 새로운 틈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1636년 7월의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내몽골 지방을 아우르고 있던 청나라 군대가 북경 인근을 침탈하여 16개 성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중원 지방의 관군 토벌을 담당하고 있던 노상승으로 하여금 구원, 방어토록 하여 중원 지역의 반란군 진압이 느슨해졌는데 장헌충 등은 이 틈을 타서 다시금 준동하여 라여재 등과 합세해 20만 이상의 군세를 이루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기주, 곽산 일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10월, 숭정제는 웅문찬을 오성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때 이자성이 사천으로 진격하여 10개 성을 함락하고, 감숙의 영주, 강주를 무너뜨리고 1638년에 섬서로 다시 돌아왔는데, 홍승주는 조하 지방에서 이자성을 박살내었고 이자성은 민주로 도망갔다. 비슷한 시기에 장헌충은 남양에서 좌량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상을 입고 곡성으로 달아났다. 오성 총독 웅문찬은 토벌을 멈추고 회유하는 작전을 펼치자 장헌충, 라여재 등이 차례로 항복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자성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천섬의 경계에 있는 산악 지역으로 물러났다.
1639년 10월, 홍승주는 총병대장 마과, 좌광선에게 명하여, 최후의 농민 반란군인 이자성의 군대를 분쇄토록 하였다. 이자성이 동쪽으로 도주하자, 홍승주는 일단의 군대를 휘하 장수 조변교가 이끌도록 하고 동관에 매복시켜 이자성을 공격하였다. 이자성은 대패하여, 18명만을 데리고 상낙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홍승주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명나라를 휩쓸던 농민 반란군을 이로써 대략 평정하여[9]이름과 능력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며, 그가 이끄는 군대를 홍군이라 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홍승주는 숭정제에게 상주를 올려 은 20만냥을 요구하였는데, 일신의 영광이나 사욕을 위해서가 아닌 관군의 군량과,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사용 될 수 있도록 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그가 섬서포정사[5]참의[6]가 되었던 1627년(천계 7년)에는 혼란한 정치 상황과 파탄난 농촌 경제가 원인이 되어 각지에서는 농민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홍승주가 부임한 섬서 지방은 본디 가난한 지역이었으며, 연이은 재해 등으로 흉년이 들고 쌀값이 폭등하여 더욱더 상황이 암울하였다.
급기야 1628년(숭정 원년) 7월에는 왕가윤, 양륙을 비롯하여 여러 도적의 무리들이 일어나자, 섬서의 전 지방이 이에 호응하였다. 1628년 ~ 1630년에는 고영상, 장헌충, 이자성 등이 앞다투어 준동하였으며, 기타 여러 우두머리들의 세력까지 합한다면 섬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은 두 자리 수를 넘게 되었다. 또한 명나라 말기의 암울한 상황의 영향을 받고 적지않은 관군들도 이들 농민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반란군의 핵심 전력이 되어 명나라를 내부에서 붕괴시키고 있었다.
1629년, 왕좌괘를 위시한 반군이 한성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아직 참정의 벼슬에 있던 홍승주는 구원군으로 참가하여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백의 농민군을 죽이며 한성을 지켜내어 능력을 보이게 된다.
1630년, 연수순무로 부임하며 양학[7]의 수하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반군에 대한 명나라의 대전략은 양학이 제시한 초무 정책이었다고 한다. 초무(招撫). 불러서 어루만지다. 즉, 저항하였던 반란군에게 자비와 선처를 베풀어 용서하는 일종의 유화책이었는데, 홍승주는 이 초무책에 반대하여 적극적으로 토벌하고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항복한 자들까지 모조리 죽여야한다고 아뢰었다.[8]
1631년에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묻고 총독 양학이 파직되었는데, 그 공석을 메우기 위하여 조정은 홍승주를 총독으로 임명한다. 총독에 자리에 오른 홍승주는 양학이 세웠던 '자비를 베풂으로써, 만방에 자비를 보여 반란군을 회유한다'는 대전략을 버리고, '철저하게 반란군을 짓밟음으로써, 군대의 위엄과 강력함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감히 반란을 저지를 생각을 하지못하게 한다', '토벌한 연후에, 잔당들을 회유한다'라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세운 전략에 따라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 당시 반군의 온상이었던 섬서 지역을 공격하였다.
1632년에는 홍승주 이하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된 반란군의 일부가 공세를 피해 경양 지방으로 도망쳤는데, 홍승주는 끈질기게 쫓아와 경양에서도 전투를 지휘하였다. 명군과 반군은 서오 지역에서 수차례의 전투를 치뤘고, 반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우두머리인 두삼, 양노시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전투로 홍승주는 조정에 크나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사람들이 그 전투에 대해 말하기를 '서오 대첩'이라 칭하였다.
숭정 7년, 1634년 숭정제는 홍승주를 섬서 삼변 총독으로 임명하며 태자태보, 병부상서를 겸직토록 하였을뿐 아니라 섬서, 산서, 호광, 사천, 하남 등 다섯 개 성의 병권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홍승주는 명나라 농민 반란군 토벌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곧 군대를 지휘하여 섬서 지역의 반란군을 포위, 압박하였다. 당시 섬서 지역의 반란군은 틈왕 고영상과 그 부하였던 이자성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는데, 그 수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홍승주는 휘하 장군들인 총병대장 하인룡, 좌광선을 지휘하여 반란군을 공격하였고, 반란군은 이들에게 패하여 동쪽으로 도주, 하남 지역의 영보, 사수 등으로 이동했다.
1635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동관에서 출진하여 하남의 신양에서 병력을 소집하여 농민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 무렵 반란군은 3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는데, 한 갈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섬서 지역으로 되돌아 진입하였고, 한 갈래는 북으로 진군하여 산서 지역으로 진입했으며, 나머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봉양을 공격하고 황릉을 불태우는 등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홍승주의 군대가 하남으로 집결하는데에는 3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그 틈을 타 반란군은 대부분 섬서 지역으로 이동한 뒤였다. 홍승주는 회군하여 섬서로 되돌아갔는데, 이자성은 이미 영주, 진녕의 관군을 격파하고 함양을 함락시켰으며, 그 기세로 서안을 위협하였다. 고영상과 장헌충은 지역의 관군을 견제하기위해 3갈래로 나누어 하남으로 이동했는데, 명 조정에서는 반란군이 유동적으로 연계하며 활동하는 상황을 인식하고 대규모의 전면적인 포위를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각 지역별로 작전을 전개하여 각개격파하는 방침을 세웠다.
명 조정은 1635년 8월, 노상승을 오성 총독으로 임명하여 중원 지역을 담당토록 하였고, 홍승주로 하여금 서북 지역의 반군 토벌을 담당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조정은 섬서 지역의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한중의 고영상과 장헌충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홍승주는 섬서 북부 지역의 이자성을 공격하였다.
홍승주는 이자성을 또 다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고 이자성은 총산 지역에 갇혀 3개월 동안의 처절한 세월을 보내며 와신상담해야 했다. 이 무렵 고영상은 반란군을 데리고 한중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섬서 순무 손전정의 매복을 만나 큰 손실을 입고 도주하던 끝에, 섬서 주지 지방에서 홍승주가 이끄는 군대에 잡혀 포로가 되었고 경사로 압송되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고, 그의 잔존 병력은 이자성과 합류하여 이자성을 새로운 틈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1636년 7월의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내몽골 지방을 아우르고 있던 청나라 군대가 북경 인근을 침탈하여 16개 성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중원 지방의 관군 토벌을 담당하고 있던 노상승으로 하여금 구원, 방어토록 하여 중원 지역의 반란군 진압이 느슨해졌는데 장헌충 등은 이 틈을 타서 다시금 준동하여 라여재 등과 합세해 20만 이상의 군세를 이루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기주, 곽산 일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10월, 숭정제는 웅문찬을 오성 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때 이자성이 사천으로 진격하여 10개 성을 함락하고, 감숙의 영주, 강주를 무너뜨리고 1638년에 섬서로 다시 돌아왔는데, 홍승주는 조하 지방에서 이자성을 박살내었고 이자성은 민주로 도망갔다. 비슷한 시기에 장헌충은 남양에서 좌량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상을 입고 곡성으로 달아났다. 오성 총독 웅문찬은 토벌을 멈추고 회유하는 작전을 펼치자 장헌충, 라여재 등이 차례로 항복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자성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천섬의 경계에 있는 산악 지역으로 물러났다.
1639년 10월, 홍승주는 총병대장 마과, 좌광선에게 명하여, 최후의 농민 반란군인 이자성의 군대를 분쇄토록 하였다. 이자성이 동쪽으로 도주하자, 홍승주는 일단의 군대를 휘하 장수 조변교가 이끌도록 하고 동관에 매복시켜 이자성을 공격하였다. 이자성은 대패하여, 18명만을 데리고 상낙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홍승주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명나라를 휩쓸던 농민 반란군을 이로써 대략 평정하여[9]이름과 능력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며, 그가 이끄는 군대를 홍군이라 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홍승주는 숭정제에게 상주를 올려 은 20만냥을 요구하였는데, 일신의 영광이나 사욕을 위해서가 아닌 관군의 군량과,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사용 될 수 있도록 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1] 단, 그는 태생이 진사 출신 정통 문관이나 행적을 감안하면 문무를 겸비했다고 본다. 전근대 시대엔 군인과 정치인, 관료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고 관례적으로 문관이 군대의 최고위직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장군들이 보좌했으니..[2] 홍승주가 투항하기전 최종적으로 올랐던 직책으로, 허베이성 북부 지역과 요동 전역의 행정, 군정을 총괄하는 직책, 그러니까 명나라의 대청 전쟁에서 홍승주는 총사령관에 해당되었다.[3] 명청 시대의 관직들을 보면 관례적, 비상시국으로 겸직 사례가 참 많다. 병부상서도 또한, 지방의 광역 행정 / 군사 수뇌였던 총독의 겸직 벼슬(+ 도찰원 우도어사 =검찰청 검찰 부총장 / 감사원 부원장)로도 보직됐던 것이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보통은 비상시국에 겸직된다. 겸직 목적은 해당 인물의 권위에 황제가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그의 권한 행사에 일종의 전권을 부여한 것과 같다. 물론 기존의 비겸직자는 그대로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되 겸직자의 영역에선 관련된 하급자들이 전적으로 겸직자를 따른다고 볼수있다.[4] 어떻게 보면 원숭환 이상으로 대단했던 인물이 투항해서 숭정제를 위시한 명나라의 잔존 지도층은 한동안 멘붕에 빠졌다. 특히 숭정제는 처음엔 그가 전사한줄 알고 그를 위한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이후 사실을 알고 슬그머니 중지한다....[5] 포정사는 조선의 관찰사와 비슷한 관직으로 1개 성의 민정을 총괄책임진다. 사법과 군정은 각각 안찰사와 도지휘사가 담당했다.[6] 오늘날로 따지면 광역자치단체 산하 주요 부서의 부국장급 공무원[7] 당시 섬서총독이었다.[8] 당시 농민 반란군들은 사세가 위급하면 우선 조정 관군에 투항하였다가 그들을 타이르기위해 내렸던 식량을 모으고 세를 보아 다시금 준동하기를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 항복도 판을 쳤을 뿐 아니라, 명나라 말기에는 대기근의 영향으로 지속적으로 반란군들에게 양곡을 베풀수 없었기에 양곡의 지원이 끊기면 이들은 곧장 다시금 반란을 일으켰다.[9] 그러나 이자성은 결국 명청 전쟁 도중 나라가 어려워지자 틈을 타 후에 다시금 준동한다.[나무위키]
자는 언연(彦演), 호는 형구(亨九). 1616년(萬曆 44) 진사가 되어 명나라의 중요한 관료로 활약하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체포된 후 청나라의 중요한 막료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정부하에서 내각의 최고직인 비서원(秘書院) 대학사가 되어 중국 귀족층이 새로운 나라를 인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중국 남부지방에서 계속 저항하던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격파하는 전쟁에서 청나라 군대의 식량과 자금을 조달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만주족들로부터 혹시 명나라 군사와 비밀리에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계속 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5년 동안이나 자신의 직책을 유지했다. 1659년 그가 이끌던 군대는 중국 남부에서 저항하던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권을 주장하던 명나라의 황자 주유랑(朱由榔)을 중국 남부에서 미얀마로 몰아냈다. 그는 주유랑을 더이상 추격하는 데 반대했으며 이 전쟁에 더이상 관여하지 않도록 허락을 받았다. 1년 동안 더 대학사직을 유지하다가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허용되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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