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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장편소설] 기억의 숲 - 메도루마 슈운

Bawoo 2021. 3. 2. 21:57

기억의 (글누림비서구문학전집 10)
저자 메도루마 슈운 | 역자 손지연 | 글누림 | 2018.4.23.

[소감]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민간인까지 자결해야했던 비극적이었던 섬인 오키나와의 부속섬에 미군이 진주하고 이들 중 몇 명-4명-이 한 소녀-사요코란 이름-를 강간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소녀의 이웃에 사는 청년-세이지란 이름-이 미군 중 한 명을 작살로 찌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이를 목격한 소녀가 60년 뒤 이 사건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쓰인 작품. 전체적인 분위기가 힘을 가진 이의 폭력에 의해 망가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주변인들의 이야기인지라 가슴이 못내 아프다. 특이한 점은 과거부터 살아온 인물 외에 노인이 된 소녀가 사건 당시 다녔던 학교에 강연하러 간 곳에서 학폭을 당하는 한 소녀를 등장시키는데 처음에는 왜 뜬금없이 과거 전쟁의 아픔을 전혀 모르는 소녀를 등장시키나 의아했는데 번역자의 해설을 보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폭력은 현재 진행형으로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작품은 한 사람의 시각이 아닌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형식으로 쓰였는데 때문에 구성상의 산만함-우연성-도 느껴지지만, 등장인물들을 씨줄, 날줄로 교묘하게 배치하여 이야기의 우연성을 최대한 배제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등장 인물이 좀 평면적이다 싶었는데 소녀 강간범 중 작살에 찔린 마지막 강간범이 부상 때문에 전장에 재투입되지 않고 살아남아 손자까지 둔 삶을 살았으나 결국 자살 비슷한 사고로 50대에 삶을 마감하고, 그 손자는 9.11테러 때 죽는 설정으로 우연성을 부가했는데 짜임새 면으로는 절묘했다. 인위적인 폭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니까.
강간당한 소녀를 어머니-죽을 때까지-와 동생들이 본인들도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인데도 돌보는 장면과 자신의 복수를 위해 미군을 작살로 짜른 이웃집 청년-세이지-을 생각하며 독백으로 말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처음 전개는 상투적이라 -전장의 점령군 중 일부가 일탈하여 지역 거주 소녀-여자-를 강간하고 이 소녀를 사모하던 이웃집 청년이 복수를 시도한다는 내용- 좀 식상해서 읽기를 포기할까 하다가 비극의 섬 오키나와 거주 주민은 과연 어떤 식으로 이들의 삶을 개척해나갔을까 궁금해서 끝까지 읽어냈는데- 초반 이후는 사전의 전개가 궁금증을 불러낸다-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과 가족 그리고 이웃의 아픈 삶을 엿볼 수 있었던 수작이다. 다만 책을 여러 권 같이 읽는 버릇 때문에 집중하지 않고 드문드문 읽은 탓에 소감을 쓰는데 좀 어려움을 겪었다. 큰 줄거리는 알지만, 이를 전체 글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었기에. 장편 중엔 적은 분량- 300쪽 미만-에 속하는 탓인지는 몰라도 이야기의 전개가 간접 전달식의 서술형을 택한 내용이 많아 박진감은 조금 떨어지는데 이도 작품의 성격상 - 아픔의 표현- 좋은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내전 중 겪은 방글라데시 여성의 아픔을 이야기한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아시아 문학선 23)
저자 샤힌 아크타르 | 역자 전승희" 라는 작품이 이야기 전개가 집중이 안 되게 쓰여 일단 읽기를 미룬 것에 비하면 이 작품은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책소개 - 인터넷 교보문고
글누림의 비서구문학전집 열 번째 소설, 기억의 숲. 전쟁의 거센 물살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자행되는 폭력과 끝나지 않는 상처, 그리고 참혹한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 미군에 의해 강간당한 사요코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세이지, 그리고 어린 목격자들의 상흔을 메도루마 ?은 섬세하고 단호한 필치로 그려냈다. 변방으로서의 오키나와는 우리 제주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다. 오키나와 방언이 있던 자리에 역자는 제주의 방언을 놓아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를 살려냈다. 지금도 계속되는 전쟁의 이야기를 이제, 돌아볼 시간이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11세였다. 당시 오키나와 섬 북부에 있는 야가지(屋我地) 섬에 살고 있었다. 섬 건너편 강에 운텐항(運天港)이라는 항구가 있었는데 일본 해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어뢰정과 특수 잠항정 등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구는 미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주변 주민들도 덩달아 피해를 받았다. 전쟁 전에 할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고, 할머니는 여자 혼자의 몸으로 세 명의 자식들을 건사하며 전화戰禍를 헤쳐가야 했다. (중략)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조부모님이 들려주는 오키나와 전투 체험을 듣고 자랐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반전·반기지 운동에 참가하고, 데모와 집회, 미 군사훈련에 대한 현지 항의운동에도 참가했다. 현재는 나고(名護) 시 헤노코(?野古)에서 추진하고 있는 미군 신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해상에서 항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반기지 운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탓에 소설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다. 도무지 소설가라고 말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소설에 전념하고 싶지만 오키나와가 처한 상황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삶을 살지 않았다면 『기억의 숲』과 같은 소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

저자:메도루마 슌

1960년 오키나와현 니키진今仁? 출생. 류큐대학 법문학부 졸업. 1983년 『어군기魚群記(影書房)』로 등단한 후, 1997년 『물방울水滴』(文藝秋春)로 아쿠타카와芥川 상과 제27회 규슈예술제九州芸術祭 문학상을 수상하고, 2000년 『넋들이기魂?め』(朝日新聞社)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문학상과 기야마 쇼헤이木山捷平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풍음-The Crying Wind?(リトル?モア)』, 『무지개 새虹の鳥』, 『오키나와 ‘전후’ 제로년沖???後?ゼロ年』(NHK出版) 등의 작품이 있다. 이 가운데 많은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며, 『기억의 숲』은 최근 영어판(‘IN THE WOODS OF MEMORY’)으로도 간행되었다.

역자:손지연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나고야대학교에서 일본 근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아시아의 전쟁과 폭력의 상흔을 젠더와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오키나와 문학의 힘』(공저, 2016), 『오키나와 문학의 이해』(공편, 2017)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폭력의 예감』(공역, 2009),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2014), 『오시로 다쓰히로 문학선집』(2016) 등이 있다.

목차
작가의 말 - 한국의 독자들에게
기억의 숲
옮긴이의 말

책 속으로
“미국アメリカ? 사름덜이 헤엄? 왐져.”
히사코ヒサコ가 소리 높여 외쳤다. 복사뼈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파도를 느끼며 물속 조개를 찾던 후미フミ가 얼굴을 들어 히사코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섬 건너편 강가에 임시로 설치한 항구에서 열댓 명의 미군 병사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작업이 끝났는지 그 가운데 몇몇이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먼저 뛰어든 병사가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앞서서 헤엄치고 있었고, 뒤이어 뛰어든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후미 일행이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17쪽)

양쪽 팔에 문신이 있는 미군 병사가 웃으며 사요코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영어를 알아들을 리 없는 사요코는 후미 일행을 재촉하며 미군 병사 옆을 잰걸음으로 벗어나려 했다. 미군 병사가 사요코의 팔을 움켜잡았다. 해변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팔을 끌어당기며 미군 병사가 사요코의 입을 틀어막는다. 모래사장에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다른 미군 병사 둘이 움켜쥐면서 몸을 붙잡는다. 아단 숲으로 끌려가는 사요코를 후미 일행이 소리를 지르며 뒤쫓으려 했다. (24쪽)

미군 병사가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수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에 다섯 명의 미군 병사가 다가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미는 두려운 마음에 어머니에게 가서 안겼다. 문을 요란스럽게 두들기자 할아버지가 서둘러 열어주었다. 미군 병사는 신발을 신은 채로 방 안으로 들어와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며 집안을 살폈다. 돼지우리와 좁은 마당 구석구석까지 살펴보더니 옆집으로 이동했다. 미군 병사들의 살기어린 모습에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후미는 할머니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떨고 있었다. (35쪽)

달리는 여자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점점 밖에 나가지 않게 되고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이 귀찮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등 뒤로 다가온다. 몸이 떨리고, 아직 소녀로 보일만큼 젊은 여자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히사코 옆을 달려 지나간다. 오비? 기모노에 쓰이는 띠가 풀어진 기모노 사이로 단단한 유방이 출렁이고, 허벅지 안쪽부터 발목까지 피로 더럽혀져 있다. 여자는 광장 한가운데에 멈추어 서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지르고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손을 마구 휘젓는다. 누군가가 히사코의 손을 꽉 움켜쥔다. (93쪽)

내 목소리가 들렴시냐? 사요코……. 바람을 타고, 파도를 타고, 흘러가는 내 목소리가 들렴시냐? 해는 서쪽으로 지고, 바람도 잔잔해져서, 이제 좀 전딜 만한디, 너는 지금 어디에 이신 거니? 너도 바당 건너편에서, 이 바람을 맞으멍, 파도소리를 듣고 이신 거니……. (130쪽)

소포 안에 이 비디오와 함께 들어있던 봉투는 확인해 보았니? 아직 안 했으면 지금이라도 봐줬으면 해. 그 작살의 화살촉이라고 해야 할지, 화살은 아니니 말이야, 작살 촉이라는 말은 없는 거 같지만, 어쨌든 그 작살의 날 부분으로 만든 펜던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이야. 너에게 도착할 때까지 녹슬진 않을 테니 검은 광택이 나는 매끄러운 촉감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해. 꽤나 오래된 물건이지. 펜던트로 만들어진 후로도 60년이나 흘렀어. 그 펜던트는 어떤 미국인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원래는 네가 살았던 오키나와의 어떤 섬 남자가 사용했던 작살의 일부라는 것 같아. (153쪽)

어둠 속에 보이는 빨간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세포분열을 반복한다. 이 섬 해변에 번성한 야자를 닮은 식물의 열매다. 하늘을 향해 뿌리를 뻗는 것이 아니라 땅을 기어가듯 뒤엉킨 가시가 있는 가늘고 긴 잎이 무성하다. 그 잎 그늘에 모래 위에 하늘을 향해 누운 소녀는, 빨간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 축축하게 젖은 하반신이 기분 나쁘다. 식물질 체액 냄새와 땀과 피 냄새. 시끄러워, 뚝 그치지 못해. 등 뒤에서 소리질러대는 동료들의 목소리. 겁에 질린 여자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더 한층 커진다. 빨간 열매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거대한 뱀의 한쪽 눈과 닮았다. (170쪽)


출판사서평
[책속으로 추가]
집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현관에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껴안고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으려니, 마음 밑바닥에 작은 산호 줄기 같은 것이 돋아났다가 다시 무언가에 짓밟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됐어. ……. 그렇게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손이 어깨에 와 닿는 느낌이 들더니, 시청각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지내야 합니다.
약간 쉰 여자의 목소리가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흘러 넘쳐 멈출 줄을 몰랐다. (215~216쪽)

이 편지를 읽고 당신이 이해해 주기를, 그리고 우리의 전쟁을 계속해서 기록해 온 당신의 작업이 앞으로도 순조롭게 이어져 보도되기를 바랍니다. 젊은 세대가 당신이 기록한 우리의 증언을 읽고 두 번 다시 그러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바람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더라도 그것이 사라져 가는 노병의 간절한 희망인 것입니다. (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