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는 1782년 말에서 1785년 초 사이에 현악 4중주 여섯 곡을 작곡한다. 그리고 1785년 가을, 그는 그 여섯 곡의 악보를 함께 묶어 출판하면서 표지에 존경하는 선배이자 절친한 친구인 요제프 하이든에게 바치는 헌사를 실었다. 이들 4중주곡은 다름 아닌 하이든의 ‘러시아 4중주’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일련의 작품들은 일명 ‘하이든 4중주’(The Haydn Quartets)로 불리고 있다.
이 여섯 편의 4중주곡에 얽힌 일화는 음악사상 가장 아름다운 우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으며, 동시에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가장 찬란했던 한 순간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불협화음 4중주곡’은 그 중 마지막 곡이자 여섯 곡 가운데 유일하게 서주를 가졌기에 가장 돋보이는 곡이다.
‘하이든 4중주’의 전범이 되었던 하이든의 ‘러시아 4중주’(The Russian Quartets, Op.33)는 현악 4중주 장르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하이든은 러시아의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을 위해서 작곡한 이들 여섯 곡에서 장차 ‘빈 고전파 양식의 정립’으로 평가받게 될 업적을 이루었다. 즉 명료한 형식과 유기적인 구조, ‘테마-모티브 작업’을 통한 논리적 전개, 미뉴에트를 대신하는 스케르초 악장의 도입 등 기존의 현악 4중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롭고 특별한 방법’을 선보였던 것이다. 이 4중주곡집의 악보는 1782년 4월에 출판되어 당대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이든 4중주’ 연작의 마지막 곡… 길고 고된 작업의 결실
모차르트가 1773년의 ‘빈 4중주’(전 6곡) 이후 거의 10년 만에 현악 4중주 장르로 다시 눈길을 돌린 것도 바로 이 ‘러시아 4중주’에서 받은 자극과 영감 때문이었다. 그는 1782년 12월의 ‘14번 G장조’를 시작으로, 1783년 여름의 ‘15번 D단조’와 ‘16번 Eb장조’, 1784년의 ‘17번 Bb장조’를 거쳐 1785년 1월의 ‘18번 A장조’와 ‘19번 C장조’로 ‘하이든 현악 4중주’ 연작을 완결 지었다.
- 현악 4중주 14번 G장조, K.387 (1782)
- 현악 4중주 15번 D단조, K.421 (1783)
- 현악 4중주 16번 Eb장조, K.428 (1783)
- 현악 4중주 17번 Bb장조, K.458 ‘사냥’ (1784)
- 현악 4중주 18번 A장조, K.464 (1785)
- 현악 4중주 19번 C장조, K.465 ‘불협화음’ (1785)
모차르트는 ‘러시아 4중주’에서 영감을 받아 현악 4중주 여섯 곡을 작곡해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하이든의 ‘러시아 4중주’와 비교할 때 모차르트의 ‘하이든 4중주’는 일단 규모가 더 크고, 반음계적인 화성, 그리고 대위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칸타빌레적인 선율 표현이 두드러지는 등 한층 발전되고 차별화된 개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이 작품들을 헌정하면서 붙인 장문의 헌시를 보면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이들은 분명 길고 고된 작업의 결실입니다만, 몇몇 친구들이 격려하기를, 결국에는 고생에 대한 보답을 받게 될 것으로 여기라 하였지요. 그리고 그 격려가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제게 위안이 되어 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흔히 모차르트는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나서 언제나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곡을 술술 써 내려갔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고뇌와 노력의 시간들도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는 머릿속에서 작품을 완성해 놓고 악보 작업은 그저 ‘옮겨 적는’ 과정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흔적이 마힝 남아 있지는 않지만, 때로는 그도 다량의 스케치를 남기면서 작곡에 임하기도 했다.
게반트하우스 4중주단은 1808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200년이 넘는 최고(最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악 4중주단이며, 통상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리더들로 구성됩니다.
최고의 찬사, 생애의 한 정점
그렇다면 젊은 동료가 심혈을 기울인 노작을 접한 하이든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 기록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가 딸 나네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1785년 2월 11일, 레오폴트는 빈에 정착한 아들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마침 그 다음날 모차르트의 집에서는 ‘하이든 4중주’의 완성을 기념하는 두 번째 시연회가 진행되었다. 레오폴트는 이 날 연주를 들은 후 하이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 앞에서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건대, 당신의 아들은, 제가 직접 만났든 평판만 접했든 간에,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훌륭한 취향과 가장 심오한 작곡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하이든은 명실상부 당대에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였다. 또한 모차르트는 바로 그 전날 추어 멜그루버에서 열린 예약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를 연주하여 황제로부터 최상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레오폴트는 역시 나네를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가 무대를 떠날 때 황제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며 “브라보 모차르트!”라고 외쳤다고 전했다. 하이든이 전문가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면 황제는 애호가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1786년 2월에 있었던 일련의 음악회들은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한 정점을 장식한 뜻 깊은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24세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한편 ‘하이든 4중주’에 얽힌 일화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각별한 우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음악가로서 진심으로 존경했고, 나이 차이(24세)를 뛰어넘는 돈독한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차 거론한,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바친 헌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친애하는 벗 하이든에게. 자식들을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결심한 아버지는, 이 아이들을 저명인사이자 운 좋게도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인 분의 보호와 지도 아래 맡기기로 결심했습니다. 명망 높은 인간이며 가장 친애하는 친구시여, 저의 여섯 아이들을 보아주소서.”
그리고 자신의 작품에 기울인 노력과 애정을 피력한 다음, 하이든의 우정과 격려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 그런 다음 겸손하고 정중한 부탁으로 마무리 짓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이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당신께 넘깁니다. 다만 아비의 편파적인 눈에는 띄지 않았던 결점들은 아량으로 살펴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는 그에 대한 당신의 고귀한 우정을 앞으로도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렇다면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가 1787년(모차르트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무렵이다)에 쓴 한 편지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만약 내가 친구들의 머릿속에, 특히 이 지상의 권력자들의 머릿속에 모방을 불허하는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새겨 넣을 수 있다면, 음악에 기여한 나의 감정과 음악적 이해를 곁들여 그의 음악을 들려줄 수만 있다면, 수많은 나라들이 그 보물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려고 경쟁을 벌일 것이오.”
글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 감상실 ‘무지크바움’ 실장과 한국바그너협회 사무간사를 역임하였다. 무지크바움, 부천필 아카데미, 성남아트센터, 풍월당에서 클래식음악 교양강좌를 맡고 있다. <객석>, <스테레오뮤직>, <그라모폰>, <라무지카> 등에 칼럼을 기고했고 현재 서울시향 프로그램 노트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