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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여 년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를 통한우리 역사 바로 보기
한·중 관계사 사료는 대부분 중국 자료일 뿐 아니라 현재 중국은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이에 중국은 과거 중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은 중국 역사가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으로서 ‘고구려사는 한국 민족사’라고 주장하는 게 도리다. 고구려인 피가 지금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민족의식이 투철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말과 행동에 일관성도 생긴다.
역사는 여러 물줄기가 모여 호수를 이루고, 그 호수에서 나온 여러 물줄기가 또 다른 호수를 향해 흘러가는 과정이다. 고구려는 예맥, 돌궐, 선비, 숙신, 말갈, 몽골, 거란, 여진, 흉노 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됐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더불어’ 살았다. 고구려에서 나온 물줄기는 한반도로, 또 다른 물줄기는 중국 대륙으로 흘러갔다. 조선 시대 평양 사람들 몸속에도,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인 몸속에도 고구려인 피가 흘렀다. 고구려 역사 흔적은 오늘날 한국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다.
20세기 초 신채호는 중국 근대 사상가 량치차오의 영향을 받아 내셔널리즘(근대 민족주의)을 한국사 서술에 접목했다. 그는 종래 중국 중심 역사관을 비판하고 단군 이래 한국인의 순수 혈통을 주장하며 한국 역사를 ‘민족의 족보’라고 규정했다. 태곳적 단군이 민족 시조로 자리 잡았고, 고구려·백제·신라는 단일민족이었으며, 고구려 역사는 민족 저력을 대륙에 떨친 신화였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 불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와 교류사에 있다. 이 책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가 같이한 3000여 년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성했다. 중국사를 외면한 채 한국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근대 이후 우리가 서구 문물을 수용해온 것처럼 근대 이전에는 중국 문명의 장점을 수용하고 재창조하며 정체성을 지켜왔다. 역사의 주체성은 단절과 고립이 아닌 공존과 교류에서 나온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중 교류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 역사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는가에 귀 기울이며, 그저 있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지 말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숲을 보자.
책 속으로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은 4백여 년 동안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서 군림했다. 낙랑군은 관할 지역 곳곳에 성을 설치했고, 본국과 행정 연계를 이루며, 한강 이남 부족국가들과 교류했다.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한나라의 재정으로 운영한 데 비해 낙랑은 토착사회의 생산력을 활용했다. 행정관리도 처음엔 요동군에서 중국인을 데려다 쓰다가 점차 현지 조선인으로 바뀌었다. 한사군을 통해 대륙문물이 한반도로 들어왔고 한·중 관계, 그 애증의 역사가 본격 시작됐다. (35쪽)
고구려는 중국 위나라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충돌했다.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북방 대륙형 국가였다. 만약 고구려가 백제, 신라를 통합했다면 오늘날 한국민족의 영토가 더 컸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정반대였을 수도 있다. 한때 중국 통일 제국과 겨루며 융성했던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등 수많은 세력이 중국이라는 용광로에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인의 고구려 신화는 식민지·분단 콤플렉스와 닿아 있다. (52쪽)
5호 16국의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들어왔다. 삼국의 왕권 세력은 불교 내세관을 통해 지배체제에 대한 백성 불만을 무마시키려 했다. 이 세상에서 살기 어려워도 더 좋은 저세상으로 가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은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법이니 불교를 통치이념이 아닌 순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102쪽)
중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유학자들이 관료로 진출하는 가운데 경덕왕은 중앙행정부서 관직명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전제왕권을 누린 아버지 성덕왕 위업을 기리려고 무려 20톤짜리 범종(에밀레종) 주조에 들어갔고, 석불사(석굴암)와 불국사를 창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교, 불교를 받아들인 것도 왕권 강화, 중국식 지명, 인명, 관직명을 받아들인 것도 왕권 강화였다. 왕권 세력의 중국화와 귀족 세력의 토착화는 훗날 고려 전기에 화풍과 토풍의 대결로 나타난다. (135쪽)
고려 광종 11년(960) 북방 세력 거란이 분열하고 고려가 거란을 견제하는 가운데 후주 장수 조광윤이 5대 10국을 통일하고 송을 건국했다. 중국이 통일되자 정세가 달라졌다.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고, 송 황제도 고려에 사신을 보내 광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고려의 칭제건원은 사라지고 고려와 송은 조공·책봉 관계에 들어갔다. 13세기 원 제국 복속 전까지 고려는 때로는 황제국, 때로는 제후국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겪었다. (155쪽)
제국 명은 ‘오랑캐’가 세운 정복 왕조가 아니라 중국 한족이 세운 정통 왕조라서 조선 사대부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조선은 16세기에 성리학 화이사상이 강화되어 명을 향한 사대를 내면화했다. 종래 전략적 사대가 이념적 사대‘주의’로 변했다. 하늘을 향한 환구단 제사는 중국 황제 권한이고 제후국이 지낼 수 없다며 폐지한 것도 그랬다. 조선-명대에 이르러 조공·책봉, 사대(事大)·자소(字小)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256쪽)
일본은 동남아시아 화교와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에서 나오는 정보를 통해 아편전쟁 소식을 들었다. 에도막부는 영국의 군사력이 청을 압도하고 영토까지 점령했다는 정보에 위기를 느끼고 종래 대외정책을 바꿔 서양 근대식 무기와 증기선을 도입했다. 근대 동아시아 삼국의 운명은 그렇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382쪽)
그러나 한·중 연대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사의 관성은 길고 질기다. 중국 혁명 세력(한족 민족주의 세력)은 여전히 조선을 그 옛날 속방으로 여겼다. 한족 출신 쑨원은 조선을 ‘잃어버린 중국 영토’라 여겨 한·중 관계를 청일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려 했고, 신규식을 비롯한 조선인 망명객들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다. 신해혁명은 공화주의 혁명이며, 만주족 청나라 왕조가 사라지고 한족의 제국이 부활한 사건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 ‘민족·민권·민생’은 ‘만주족을 내쫓고 중화를 회복하여 민국을 세우고 토지권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이다. (444쪽)
중국 국민당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활동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 민족주의 세력은 해방 이후 남한으로 들어왔다. 반면 중국 공산당 도움을 받아 활동했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등 공산주의 세력은 북한으로 돌아왔다. 대륙에서 ‘형님’들이 싸우는데 ‘아우’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없었다. 중국 국공내전은 한반도의 남북분단을 재촉했다. (518쪽)
1999년 조중 변계조약 내용이 공개되자 중국에서는 협상 책임자 저우언라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었다. 중국에서 ‘인민의 벗’으로 불리는 저우언라이가 비판받는 것을 보면 조중 변계조약에서 북한이 나름 협상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조중 변계조약이 간도를 중국 영토로 고착화했다고 비판한다. 민족사에 그 뜨거운 충정은 이해하지만, 냉정한 국제사회에서 ‘실효 지배’가 갖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적 논거도 바로 실효 지배다. (537쪽)
이데올로기는 그 창시자보다 추종자에게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난다. 유럽에서 내셔널리즘이 퇴조하고 있는 오늘날 동아시아 세계는 오히려 배타적 내셔널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역사가 내셔널리즘에 포획되어 동아시아 세계의 갈등을 키운다. 중국은 ‘중국의 꿈’ 운운하며 중화 제국주의 발톱을 드러내고, 한국의 내셔널리즘 추종자들은 ‘만주는 우리 땅’ 운운하며 중국을 자극한다. 마치 손님이 집주인 의식을 장악한 듯하다. 동아시아의 ‘적대적 공생’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두 나라 양심 세력이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554쪽)
출판사서평
왕조 흥망도 짝을 이룬 중국사와 한국사
단절과 고립 아닌 공존과 교류의 시각이 필요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근대 이전 지구상에서 중국 문명보다 더 발달한 문명은 없었다”라고 한다. 문화는 물처럼 흐른다. 유사 이래 동아시아 세계는 중국 문명의 영향권에서 변화했다. 서양사의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알파벳처럼 중국의 유교, 불교, 한자는 동아시아사 문명의 공통 인자였다. 유교와 불교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퍼즐을 맞춰 보자. 중국 5호 16국 정세를 모르고 고구려의 정복 활동을 이해할 수는 없다. 10세기 당 멸망과 신라 멸망, 송 건국과 고려 건국, 그리고 14세기 원 멸망과 고려 멸망, 명 건국과 조선 건국, 20세기 청 멸망과 조선 멸망 등 어쩌면 그렇게 중국사와 한국사의 왕조 흥망이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는가?
‘국사’는 민족문화의 독창성을 강조하지만 석굴암,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등도 한·중 교류 속에서 탄생했다. 또한 중국 국공내전과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모르면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설명할 수 없다. 훈민정음은 중국 음운학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몽골 문자(파스파 문자), 거란 문자, 여진 문자 등 북방 표음 문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특히 파스파 문자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왕실에서 사용됐고 몽골어 역관들이 파스파 문자 시험을 치러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 훈민정음은 한·중 문화 교류의 결정체였다.
또한 세종 때 민족문화가 꽃을 피운 것은 ‘열린 마음’으로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천민 장영실을국가정책에 등용하고 외래 문물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등 세종의 위대함은 열린 마음에 있었다. 옛 원나라 땅 쌍성총관부 일대에서 여진, 몽골 등 이방인들과 더불어 활동했던 할아버지 이성계의 피가 그의 몸속에 흘렀다.
역사가 현재의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이며
당당하게 역사를 만나야
냉전 시대 한국과 중국이 대립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지만,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놓고 주도권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구애는 곧 한국에 대한 적대감 표출이었다. 1989년 봄,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해 중·소 관계가 정상화되자 중국은 북한에 신경을 덜 쓰게 됐고, 한국에 다가가기에 좋은 조건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한국과 중국은 수교 협상에 들어갔다. 수교 분위기는 이미 성숙해 있었지만 걸림돌도 있었다. 한국은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사과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중국은 “당시 국경이 위협받아 인민지원군이 참전했던 것으로 과거사를 제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는 수준에서 봉합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40여 년 만에 한국과 중국은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동반자가 되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한·중 수교는 탈냉전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두 나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한·중 수교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교역량은 봇물 터지듯 증가했다. 한국은 미국, 일본과 함께 중국의 3대 교역국이 되었고 2003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한국 최대 교역국이 되었다. 이후 한·중 자유무역협정의 발효로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또한 문화 교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공연, 대중음악, 드라마 등 ‘한류’가 중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국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도 증가해서 2007년 100만 명, 2019년 600만 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사드 갈등으로 중국 정부가 한국 방문을 제한하는 가운데 나타난 수치라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중국 붐’도 일어나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도 높다. 중국 거주 한국인이 100만 명, 한해 중국 방문 한국인 500만 명을 돌파했고, 인천 차이나타운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화교 2만여 명은 고난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어엿한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중국의 꿈’ 운운하며 발톱을 드러내고, 한국에서는 ‘만주는 우리 땅’ 운운하는 일부의 목소리가 중국을 자극한다. 최근 중국 공산당 독재와 대외 팽창 정책, 중국 발 미세먼지와 감염병, 그 밖에 자잘한 문제들로 한국 내 반 중국 정서 또한 강하다. 하지만 이웃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는 법. 역사 속에서 두 나라는 좋든 싫든 얽히고설키며 관계를 맺어왔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는 ‘중화주의 역사’ ‘사대주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를 깊고 폭넓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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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소개 글]
- 한중 3000년, 그 애증의 역사 (이태영 지음 | 살림 펴냄) | 脫민족주의 관점에서 본 韓中 관계사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중국 춘추(春秋)시대부터 코로나19 사태에 이르기까지 3000년에 걸친 한중 양국 역사를 함께 엮어 풀어나간다. 많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초한지나 삼국지의 이야기를 하다가 동(同)시대 한국사로...[월간 조선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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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한중 관계사는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어떤 시각으로 썼을까에 주안점을 두고 읽어본 책. 특히 중국 최대 혼란기- 춘추전국 시대도 있지만 한반도와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인 "동진 ∙ 오호십육국 시대" 와 "오대 십국 시대" 시대에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와의 관계에 주목했다. 중국 통일국가 시절인 원나라 이후부터는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읽었다. 예를 들자면 삼별초의 난은 백성을 착취하던 무인정권에 속하는 자들이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든가, 나라의 안위보단 자기 일족만을 위한 통치를 한 고종비(민비)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시각-뮤지컬 명성왕후가 그렇다고 들었다-으로 보는 사관을 비판적으로 보는 내용 등 내가 역사교육을 받았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한중 관계사에 대해 아는 내용이 없거나-정규 국사 교육을 받았으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있더라도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보면 아주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중 관계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일독을 권유하고 싶다. [20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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