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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편소설] 세상 끝의 아이들: 나카와키 하쓰에

Bawoo 2023. 2. 25. 20:45
 

 [소감]

"동시대 일본 소설을 만나러 가다"란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작품.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초에 만주 정착촌에서 만난 세 아이 특히 다마코란 아이-당시 9살-를 중심으로 70대가 되기까지의 신산[辛酸--]:힘들고 고생스럽다-한 삶을 다뤘다. 다마코, 마리는 일본인이고 미자는 조선인인데 마리와 미자네 가족은 종전되기 전 일본으로 건너가 살지만 주인공 격인 다마코는 종전이 되기까지 정착촌에서 살다가 종전 후 귀국길에 오르는데 이때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결국 다마코는 중국인에게 납치되어 중국인 양부모 손에서 손에서 자란다. 미자, 마리는 일본에서 생활한 덕분에 다마코가 겪은 삶 정도는 아니지만 고통스러웠기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마리는 미군 폭격에 부모, 형제가 다 죽고 고아가 되어 결국 결혼도 안(못) 하고 독신으로 산다.

대하소설로 써도 충분할 소재를 단행본으로 줄여서(?) 쓴 탓에 세 소녀 외의 인물은 입체감 없이 그려졌고 내용이 너무 축약되어 있어 좀 아쉽지만 아래 출판사 서평에서 보듯이 한, 중, 일의 역사를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서 썼고 자국 일본인(군인)의 만행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인 양어머니가 같이 일본에 가서 살자는 걸 싫다고 한 이유가 임신 중 일본군에게 복부를 채여 유산하고 이후 임신이 안 되어 입양을 했다는 내용이 대표적.

[참고]

1.조두진 작가의 "북성로의 밤" 이란 작품에도 패망 후 자국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거주 일본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작품처럼 만주 거주 일본인이 겪는 참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이도 불운이라면 불운일 수 있겠다. 만약에 한반도에서 살았다면 이토록 처참한 귀국길은 안 됐을 테니까.

2. 고미카와 준페이의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 (전6권)" 에도 만주 거주 일본인의 귀국길 장면이 나오는데 귀국민 모두 다 죽는다. 만주 주둔 일본군(관동군) 소속 가지라는 인물이 소속 부대가 소련군에 패하자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전장을 이탈, 도망병이 되어 일본 민간인과 함께 끝없는 도주(귀국)의 길을 가는데 이 작품에서 그려진 일본 민간인의 참상 ㅡ 거의 다 죽는다 ㅡ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이 났다. 한반도나 대만에 거주했더라면 이런 참상을 겪지는 않았으리란 걸 생각하니 이것도 자기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아닌가 싶다.

대작이 아닌 점이 아쉽지만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로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과 일본 본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책 소개 및 출판사 서평 :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발췌. 전문은 책 제목을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끝의 아이들』은 작가가 20여 년간 한·중·일 3국을 발품 팔아 다니며 취재하고 섬세하게 고쳐 쓰고 또 고쳐 써서 완성한 걸작으로, 2016년 일본 서점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라 3위에 선정되었다. 이 소설에는 한국전쟁, 4·3사건, 문화대혁명, 관동대지진 등 70여 년의 한·중·일 3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장대한 서사가 녹아 있다. ‘세상 끝’이라는 어휘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전쟁터의 처절한 시공간에 내던져진 세 소녀 미자, 마리, 다마코. 이 책은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세 소녀가 저마다 고통과 절망을 딛고 마침내 한 조각 눈부신 희망을 길어 올리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출판사 서평 

한국인에 대한 가장 따뜻한 시선과 한국 역사·문화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지닌 일본 작가 나카와키 하쓰에


『세상 끝의 아이들』은 작가 나카와키 하쓰에가 20대 초반이었던 1995년 무렵부터 구상하기 시작해 2015년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무려 20여 년이 걸린 대작이다.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한·중·일 3국을 발품 팔아 취재하며 소설의 얼개를 탄탄히 다지고, 70여 년에 이르는 장대한 동북아시아 현대사와 서사를 절묘하게 녹여내어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세 주인공 미자, 마리, 다마코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이면서 동시에 한·중·일 3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담담하고도 냉철하게 정리해낸 ‘동북아시아 역사서’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한 외서 기획자이자 번역자인 홍성민 씨는 맨 처음 원서를 읽고 난 뒤 “마치 스무 권짜리 『토지』 전집을 독파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라고 평한 바 있다.

『세상 끝의 아이들』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나 『한강』, 혹은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과 같은 전형적인 대하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일제시대의 전쟁기간 종군위안부 문제, 4·3사건, 문화대혁명,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 한국전쟁 등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흐름과 맥락이 잘 담겨 있다. 작가는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시각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세 소녀의 파란만장하고도 감동적인 삶에 장대한 서사를 절묘하게 버무려내며 이야기를 힘차게 끌고 간다.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소설의 여러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서 폐품수집으로 많은 돈을 벌던 미자의 부모가 논쟁하는 장면을 통해 명확히 느낄 수 있다.

“이제 폐품 수집은 안 하련다.”
미자도 아버지도 놀랐다.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말했다.
“내가 모은 고철이 대포가 되고 탄환이 되어 지금 같은 민족의 우리 형제를 죽이고 있구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도 참. 모처럼 벌이가 좋아졌을 때 바짝 벌어야지.”
아버지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이 그랬잖아. 번듯한 집을 한 채 사서 어서 이사 가고 싶다고. 미자 방을 따로 마련해줄 수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그랬잖아.”
미자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자에게 큰 키를 물려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키가 컸다.
“우리가 모은 고철로 동포가 서로 죽고 죽이고 있다니까요.”
어머니가 호통을 쳤다. 미자는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어머니가 그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단언하건대, 『세상 끝의 아이들』의 작가 나카와키 하쓰에는 한국인(조선인)에 대한 가장 따뜻한 시선과 한국 역사·문화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를 지닌 일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그런 따뜻한 시선과 깊은 이해가 이 책 『세상 끝의 아이들』에 오롯이 담겨 있다.
소설의 주인공 미자, 마리, 다마코 중 다마코와 마리는 일본인이고 미자는 조선인이다. 당시는 1940년대로, 조선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나라였으며 미자는 그 식민지 나라에서 온 소녀다. 그러나 미자는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늘 당당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정의감이 강한 아이다. 미자의 그런 됨됨이는 향후 세 소녀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소설에 중요한 복선을 제공하는 감동적인 ‘주먹밥 일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만주에서 만나 친구가 된 세 소녀는 어느 날 각자 어머니가 싸주신 주먹밥 도시락을 보따리에 싸서 메고 부모 몰래 절 구경을 갔다가 엄청난 폭우로 절에 고립된다. 배고픔과 두려움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식민지 나라 조선에서 온 미자는 자기 몫의 주먹밥을 꺼내 제일 작고 약한 마리에게 가장 많은 양을,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을 다마코에게 주고 자기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 이후 아빠를 따라 요코하마로 돌아온 마리는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부모와 동생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마리는 굶주리는 상황에서 어렵게 얻은 하나뿐인 캐러멜을 강제로 빼앗아 자기 아들의 입에 넣어주던 이웃 아주머니와 공습을 피해 참호로 뛰어들어가는 자신을 매정하게 쫓아내는 아저씨를 보며 만주에서 미자가 주저 없이 나누어주던 그 누룽지 주먹밥을 떠올린다. 그 어린 나이에, 자신도 굶주리는 상황에서 미자는 어떻게 제일 큰 주먹밥 덩어리를 나눠줄 수 있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 생각들이 마리의 행동을 만들고 삶을 이루어간다. 독자는 작가가 주인공 미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조선(한국)과 조선인(한국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이 소설에서만이 아니라 『너는 착한 아이야』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에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며 뚜렷한 경향이다.

가장 잔인하고 비루한 인간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터.
그 처절한 시공간에 내던져진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세 소녀……

깊은 절망과 고통의 자리, ‘세상 끝’에서 건져 올린 한 조각 눈부신 희망!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지속되던 1940년대의 만주 개척촌 다카이주돈 우엔리무토 촌락. 일본 고치 현 서부의 유배지와도 같은 두메산골 센하타 마을에서, 농사지을 일곱 마지기의 땅이 없어 살아갈 길이 막막하던 다마코네 가족은 정부의 달콤한 회유책에 넘어가 이웃들과 함께 만주의 개척촌 마을로 이주한다. 조선 개성의 기름진 농촌 마을 평화리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드넓은 토지에 농사지으며 풍족하게 살던 미자네 할아버지는 어느 날 조선총독부에 땅을 빼앗기고 항의하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뒤 허망하게 죽고 만다. 이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며 힘들게 살아가던 미자네 가족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만주로 떠나는데…….

만주에서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된 미자와 다마코. 어느 날, 그들 앞에 연분홍색 부푼 소매 원피스를 입고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은 한 소녀가 나타난다. 만주 사람이 보고 싶다며 운송 일을 하는 아빠를 졸라 따라왔다는, 요코하마 출신의 마리다. 친구가 되어 어울리기 시작한 세 아이는 어느 날 황톈천 하류에 있는 절에 놀러 가기로 한다. 각자 집에서 준비해온 주먹밥 점심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걸쳐 메고.
오랜 시간이 걸려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절에 도착한 세 아이는 한동안 신기한 절 구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절에 고립된 채 배가 고파 허겁지겁 주먹밥을 먹던 세 아이는 거센 빗줄기 속에 포위당한 채 절간 마루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든다. 몇 시간 뒤에 깨어난 세 아이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장대비로 완벽히 고립된 채 배고픔과 두려움에 떤다. 세 소녀에게 남은 먹을거리라곤 너무 졸려서 채 다 먹지 못하고 남긴 미자의 주먹밥 한 덩이뿐. 식민지 나라 조선에서 온 미자는 목숨처럼 아까운 자기 몫의 주먹밥을 꺼내 제일 몸이 작고 약한 마리에게 절반을 떼어준다. 그런 다음, 나머지 절반 중 대부분을 친구 다마코에게 주고 자기는 거의 굶다시피 하는데…….

부모와 동네 사람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세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흩어진다. 마리는 일을 끝낸 아버지를 따라 요코하마로 돌아가고, 얼마 후 미자네도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만주에 홀로 남게 된 다마코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연합군에게 무릎 꿇는 바람에 개척촌 사람들과 함께 순간순간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혹독하고도 위험천만한 귀향길에 오른다.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목숨을 잃고, 다마코는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어 갇히게 되는데…….
어느 날, 인신매매 시장에 나온 다마코 앞에 초라한 행색의 중국인 부부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절망에서 구해준다. 그 부부는 자신들이 몸에 지닌 재물을 모두 털어 다마코를 사서 양부모가 되어준 것이다. 다마코는 양어머니 유란이 임신 중 일본군에게 배를 발로 차여 유산한 뒤 더는 임신할 수 없게 된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 아무튼, 다마코는 원래 부모·가족들과 생이별한 채 홀로 만주에 남아 가난한 중국인 가정에서 중국인 아이로 성장한다.
한편, ‘주먹밥 사건’ 이후 아빠와 일본으로 돌아온 마리는 전쟁통에 사랑하는 부모와 동생을 모두 잃고 의지가지없는 고아가 된다. 마리는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하나하나 우악스럽게 펴서 하나뿐인 캐러멜을 빼앗아 자기 아들의 입에 넣어주던 이웃집 아줌마의 살벌한 손의 감촉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미군 폭격기의 공습을 피해 참호로 달려 들어가는 자신을 매몰차게 몰아내며 눈을 부라리던 한 어른 남자의 무시무시한 눈빛도 잊히지 않는다. 그 잔인하고 살벌한 ‘감촉’과 ‘눈빛’이 뇌리에 되살아나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마리는 만주에서 미자가 아낌없이 떼어 자기에게 주었던 그 ‘주먹밥’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이렇게 속삭인다.

“제일 작았던 나. 그런 나에게 제일 큰 주먹밥 덩어리를 주었던, 키가 큰 욧짱. 다마짱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두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까.”

오랜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지난 뒤, 할머니가 된 세 주인공은 일본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그 자리에서 마리는 미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줄곧 생각했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얼마나 많이 생각했다고. 그때 만주의 그 절에서 욧짱이 주먹밥을 나눠줬잖아. 욧짱은 어떻게 나한테 제일 큰 덩어리를 줬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세상 끝의 아이들』은 인간의 본성, 그 심연에 맞닿은 소설이며, 충격적이고 경이롭고 매혹적인 작품이다. 70여 년의 한·중·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장대한 서사가 작가의 노련하고도 섬세하며 세련된 펜 끝에서 오롯이 되살아난다.

책속으로 추가
다마코는 뺨에 눈물 자국을 남긴 채 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부는 여기저기 누덕누덕 기우고 덧댄 자국이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내 쪽은 눈물을 글썽이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부부와 남자는 한동안 실랑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거래가 성사되었는지 남자는 다마코의 손을 당겨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손에 건네주었다. 당황한 다마코는 자신의 손을 살짝 잡는 중국인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손은 거칠거칠하게 부르터 있었다.
두 사람은 다마코에게 자신들을 아빠라는 뜻의 ‘??(파파)’와 엄마라는 뜻의 ‘??(마마)’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었다. 다마코는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두 사람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마코의 손을 양쪽에서 잡고 걸어 한 식당으로 들어가더니 밀가루 만두와 배추와 고기와 당면을 넣은 조림을 사주었다. 시큼하게 절여진 배추는 다마코가 여태까지 먹어보지 못한 낯선 맛이었다. 하지만 구수하게 잘 익은 그 냄새는 맡아본 기억이 있었다. 만주의 중국인들은 늘 이 냄새를 몸에 두르고 다녔다. 가끔 찌릿찌릿하게 매운 향내를 내뿜을 때도 있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다마코는 다이카주돈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배부르게 먹었다. 다이카주돈을 떠나고 처음 입에 대보는 고기였다.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다마코가 먹는 동안 두 사람은 거의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저 다마코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눈을 떼면 다마코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 본문 중에서 (258~259p)

“저건 무슨 물고기일까?”
미자는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붕수도 강에 눈길을 주더니 말했다.
“참숭어.”
“참숭, 뭐라고?”
“일본말로는 보라라고 하더라.”
“아, 보라?”
붕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가끔 생각해보곤 해. 숭어는 조선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잖아. 조선에 사는 숭어랑 일본에 사는 숭어는 뭐가 다를까? 조선 숭어랑 일본 숭어가 바다에서 만나면 무슨 말로 이야기할까?”
엉뚱한 상상에 미자는 웃고 싶었지만 붕수는 웃지 않았다.
“나는 강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해. 강에서 헤엄칠 때는 다들 알몸이 되니까 우리가 허름한 옷을 입고 왔다는 걸 아무도 모르거든.”
미자도 붕수도 원래 하얀 셔츠를 입었지만 여기저기 헤어져 구멍이 나고 갈색으로 색이 바랬다. 변변한 비누 하나 없이 잿물로 빨래하다 보니 하얀 옷도 금세 시커멓게 물이 든다.
“꼬락서니가 이러니 내가 조선인이라는 건 금세 들통나지만, 강에서 헤엄치는 동안에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야. 그래서 나는 강에서 헤엄치는 게 좋아.”
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줘서 고마워!”
“내일도 올게.”
붕수가 말했다. 그 후로 일본인 남학생들이 숨어서 미자를 기다리는 일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붕수는 매일 아침 둑길까지 미자를 마중 와주었다. 만주에서 다마코와 하루히코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에 다니던 때처럼 나란히 걷지 않고 서로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걸었다. 붕수가 앞을, 미자가 그 뒤를.
미자는 나란히 걷지 못해도 속상하지 않았지만 그런 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 본문 중에서 (272~273p)

전쟁과 관련된 주가가 일제히 치솟았다. 갑자기 ‘한국전쟁 특수’가 일어났다. 무기에 쓰일 고철 가격이 나날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덕분에 미자네는 갑작스럽게 형편이 넉넉해졌다. 이후 상황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넝마주이를 자청하고 폐품을 수집했다.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까지 너도나도 이 일에 끼어들었다.
“폐품 수집하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으니까 현관문은 꼭 닫아둬야 해. 안 그러면 신발까지 몽땅 가져간다더라.”
미자가 어머니의 폐품 손수레를 밀며 일손을 거들고 있을 때 들으라는 듯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선언했다.
“이제 폐품 수집은 안 하련다.”
미자도 아버지도 놀랐다.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말했다.
“내가 모은 고철이 대포가 되고 탄환이 되어 지금 같은 민족의 우리 형제를 죽이고 있구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도 참. 모처럼 벌이가 좋아졌을 때 바짝 벌어야지.”
아버지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이 그랬잖아. 번듯한 집을 한 채 사서 어서 이사 가고 싶다고. 미자 방을 따로 마련해줄 수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그랬잖아.”
미자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자에게 큰 키를 물려준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키가 컸다.
“우리가 모은 고철로 동포가 서로 죽고 죽이고 있다니까요.”
어머니가 호통을 쳤다. 미자는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어머니가 그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조선이라는 글자도 일본이라는 글자도 쓸 줄 모르는 무지렁이지만 당신은 다르잖아요. 네 나라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불 보듯 빤한 이치를 모른 척할 셈이에요?”
- 본문 중에서 (301~302p)

“줄곧 생각했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얼마나 많이 생각했다고. 그때 만주의 그 절에서 욧짱이 주먹밥을 나눠줬잖아. 욧짱은 어떻게 나한테 제일 큰 덩어리를 줬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이날 이때까지 기다려온 질문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다마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미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도 우타를 키우고 나서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는 하더라고. 우타에게라면 뭐든지 줄 수 있으니까. 우타를 키우며 종종 생각하곤 해. 어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일. 그리고 욧짱이 내게 베풀어준 정.”
미자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마리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불행의 나락에 떨어져도 베풀어줄 인정이 있다면, 또 자신이 받았던 배려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 따뜻한 마음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어.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배려를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어. 우타를 키우며 겨우 깨달았어. 욧짱은…… 아니, 누가 욧짱한테 그런 사랑을 베풀어줬던 거야?”
“어머니.”
미자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조선에 살던 시절, 어머니랑 둘이 친척 집에 얹혀살았어. 찢어지게 가난했지. 그런데도 밥을 먹을 때는 어머니는 늘 내 몫을 더 많이 담아주셨어. 어떤 음식이든 마찬가지셨지. 내게 더 맛있는 쪽을 먹이곤 하셨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미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마리를 향해 말했다.
“나야말로 마리 덕에 이만큼 살 수 있었어. 마리짱이 가르쳐줬잖아.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똑바로 앞을 보라고 했다는 어머니 이야기. 나는 줄곧 마리짱처럼 가슴을 쫙 펴고 살려고 노력했어. 따돌림당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마리짱이 가슴을 쫙 펴고 씩씩하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신기하게 힘이 나더라.”

- 본문 중에서 (397 ~ 398p)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