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 묘한 작품이다.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내용이 사건의 우연성, 등장인물의 비입체성, 비현실성이 주를 이루는 때문이다. 게다가 문장을 문어체로 썼다. 구어체로 써야 할 것도 굳이(?). 아마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보면 이건 아니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작가가 작품으로 무얼 말하려고 한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우연히 집에 들어온 여자와 정이 들어 결혼을 하게 되고 당일에 자신의 재산을 보여줬는데 여자는 이 중 절반을 가지고 달아난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자 돌아와 낳고는 다시 사라진다.
남자는 자신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던 여자를 다그치지도 않는다. 다시 결혼식까지 올린다. 그러나 여자는 또 사라진 것이다. 예감도 되어 있었다. 나중에 나오지만 여자는 결혼한 남자 -오빠라고 말한 남자가 실제론 남편이다-가 있고 이 남자에게 돌아간 것이다.
주인공 격인 남자는 이 여인을 찾으러 집, 농지를 소작인에게 맡기고 빚까지 얻어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길을 나선다. 여자의 오빠 - 실제론 남편이다-가 말한 원청이란 곳을 찾아서. 이때부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펼쳐진다. 중국이 어디 작은 나라인가. 그런데 북쪽 지역-구체적으로 어딘지 모르겠다-에서 남쪽-강남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가상 지명이다-으로. 그런데 이 갓난아이가 아무 탈 없이 무사하게 자란다. 지붕이 날아갈 정도의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서도. 젖동냥으로 자라면서도. 만약에 현실이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이 아이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도 아니다. 지역 유지의 망나니 큰아들과 정혼하기로 되어있지만 아이는 가족같이 지내는 이웃 오빠와 서로 좋아하게 된다. 또 정혼자는 방탕하게 살다가 한 이구인 여자에게 홀려 집을 나가 결국은 호주 어디인가로 노에 비슷하게 팔려나간다.
주인공은 이 딸을 어쩔 수 없이 기숙학교로 보내고 한 가족처럼 지낸 사내아이네는 가족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 그리 멀지는 않은 곳으로.
주인공은 혼자 남게 되면서 사창가 여자를 가끔 찾아가며 생활하다가 비적에게 납치된 예비사돈을 구하러 몸값을 가지고 갔다가 두목한테 살해되고 만다.
이 이야기 전개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일 수도 있는 여자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죽은 뒤에 에필로그 식으로 나오는데 좀 황당하다. 주인공이 원청이라는 곳을 찾아가다가 포기하고 여자가 사는 시진이란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때 이미 죽어버린 뒤였다. 그것도 폭설이 계속 내리자 주민들이 사당으로 몰려가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곳에 가서 남편, 여종과 함께 얼어 죽는다. 주인공은 그런 줄도 모르고 이후 17년간을 이곳에서 살면서 급기야는 비적의 두목에게 칼 맞아 죽고 시신만 고향에 있는 네 명의 소작인 형제의 손수레에 실려 돌아간다. 이때 죽은 여자의 무덤 곁에서 잠시 머무르는 것으로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 여담*
작품 내용이 전체적으로 좀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래 책 소개 글을 보니 전기소설이란다. 찾아보니 "전기傳奇 소설-괴기(怪奇), 애정(愛情) 등을 내용으로 하며, 문어(文語)로 쓰인 설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문학 양식"이라고 되어있다.그렇다면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소설 작법하고는 영 안 맞아 비호감이었다. 그런데도 밤을 새워 읽어냈으니 이게 작가의 능력인 것인가. 나 원 참!
[책소개: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발췌]
청나라로 대변되는 구시대가 저물고, 중화민국이라는 새 시대가 떠오르는 대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원청》은 위화의 첫 전기傳奇 소설-괴기(怪奇), 애정(愛情) 등을 내용으로 하며, 문어(文語)로 쓰인 설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문학 양식-로서, 작품의 스케일로나 완성도로나 가히 위화 세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원청’이라는 미지의 도시를 찾아 떠나는 린샹푸의 여정 속에서 천재지변과 환란, 그리고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인 평범한 인간 군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삶과 죽음이 뒤엉키는 절체절명의 순간, 개인과 가족, 공동체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그간 《인생》, 《허삼관 매혈기》, 《제7일》 등 역경 속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휴머니즘을 감동적으로 그려온 위화는 《원청》에서 이전의 작품을 뛰어넘는 감동과 통찰을 선보인다.
가제본으로 《원청》을 먼저 읽은 국내 독자들 또한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개인의 운세를 넘어 시대의 운명을 생각하게 만드는 걸작.”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만 ‘체념’ 아님을 알려주었다.” “희비극 속에서 끝내 인간을 향한 믿음을 준다.” “마지막 장에서는 도무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처럼 미지의 도시 ‘원청’을 향한 끝없는 모험과 수십 년에 걸친 애절한 로맨스, 그리고 전쟁과 도적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시민의 고군분투가 모두 녹아든 《원청》은 명작에 목마른 문학 독자들에게 분명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책 속으로
린샹푸는 잠시 멈췄다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또 말도 없이 떠나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예요.”
말을 마쳤을 때 린샹푸는 자기 손이 이미 샤오메이에게 이끌려 그녀의 얼굴 위에 있는 걸 알았다. 샤오메이의 눈물이 그의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린 뒤 방향을 찾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_79쪽
“눈이 언제 그칠까요?”
린샹푸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알지 못했다. 딸을 안은 채 린샹푸는 시진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문을 하나하나 두드렸다. 시진의 여자들은 눈에 뒤덮인 세상에서 남자들보다 대범하고 평온했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을지언정 예전과 똑같이 집안일을 했다. 그녀들이 집 안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린샹푸는 얼어붙은 시진에 아직도 사람 숨결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_112쪽
길을 가는 내내 린샹푸는 린바이자에게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는 새로 아내를 맞지 않을 거라 린바이자에게는 형제자매가 없을 것이고 앞으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린바이자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어린 린바이자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서 린샹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응.” 하고 대답했다.
_139쪽
이 북쪽 출신 농민은 땅에 대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아이가 엄마 품에 매달리는 것과 비슷한 절절함을 가지고 있었다. 12년 전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 딸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았을 때 그는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처음 완무당, 물과 땅이 어우러진 그 넓은 전답을 보았다. 뿌리째 뽑힌 나무가 사방에 흩어져 있고 벼가 짓밟힌 잡초처럼 여기저기 쓰러져 있으며, 망가진 배의 판자 조각, 수북한 띠, 굵은 나무와 뼈대만 남은 지붕이 수면 위로 떠내려가고 있었음에도, 린샹푸는 그 엉망으로 망가진 풍경 속에서 원래의 풍요로운 완무당을 볼 수 있었다. 노부인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미모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_147쪽
솜저고리를 걸친 뒤 등불을 챙겨 나온 스님의 어머니가 천야오우를 보고는 물었다. “누구네 집 애니?”
“시진에서 잡아 온 인질이에요.”
이후 나흘 밤낮 동안 천야오우는 스님 집 나뭇간에서 고열에 시달렸다. 눈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해지고 귀에서 물을 붓는 듯 졸졸 소리가 들렸으며 몸도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천야오우는 스님 무리가 몇 차례 들어와 자기 앞에서 뭐라 말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앓는 동안 제일 많이 본 건 스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노부인은 들어올 때마다 두 손을 내밀었는데 늘 물이나 죽, 때로는 생강탕을 들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물 좀 마시렴……. 죽 좀 먹어……. 생강탕 좀 들거라…….”
나흘 동안 사경을 헤맨 뒤 닷새째 날 아침 정신을 차렸을 때, 천야오우는 맑은 새소리를 듣고 나뭇간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을 보았다.
_230쪽
그날 밤 스님 무리 일곱 명과 천융량 무리 예순아홉 명은 첸촌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그들은 둘러앉아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스님은 천융량에게 자신들 일곱 명은 장도끼의 횡포를 참을 수 없어 시진을 공격하기 전에 떨어져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스님이 말했다. “이 난세에는 농사를 지으면 토비한테 약탈당하거나 죽고, 토비가 되면 약탈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천융량이 대꾸했다. “난세에 토비로 사는 게 창피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토비라도 선한 마음을 가져야지요.”
_365쪽
그녀는 더 울지 않고 옷자락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눈물도 희망이 있을 때 흘리는 것이라, 절망적이 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일어나 이미 시어머니가 위층으로 올라갔음에도, 평소와 똑같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발 닦을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_443쪽
샤오메이가 말했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
“아무리 오래 걸려도 기다릴게.”
“여차하면 나는 그곳에서 죽을지도 몰라.”
“딩촨에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게.”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쳐다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_510쪽
출판사서평
《인생》 《허삼관 매혈기》 《제7일》
세계적인 작가 위화의 8년 만의 신작!
마침내, 거장의 손에서 탄생한 가장 ‘위화적인 순간’!
명실상부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위화가 8년 만에 신작 《원청: 잃어버린 도시》로 돌아왔다. 늘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 군상을 그려내온 위화는 이번 《원청》에서도 끝없는 여정 위에 선 인간의 숭고한 발자취를 그려내었다. 청나라가 저물고 중화민국이 시작하는 대격변기의 포화 속에서 미지의 도시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삶은 그저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위화는 말한다. “시간의 급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 이건 아직 시작도 시작되지 않고. 끝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거장의 솜씨로 빚어낸 《원청》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강명 작가는 추천사를 통해 오직 위화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위화적인 순간’이라 말했다. “나 혼자 ‘위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이 있다. 너무 재미있고 뒤가 궁금한데, 갑작스럽게 가슴이 미어져서 책장을 잠시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다짐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자.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잔인해지지 말자. 전쟁을 막자. 《원청》에는 위화적인 순간이 무척 많았다.” 《인생》, 《허삼관 매혈기》, 《제7일》 등 위화의 작품을 통해 ‘위화적인 순간’을 함께해온 독자는 물론 위화를 새롭게 접하는 독자들까지, 지금이 바로 가장 위화적인 순간을 마주할 때다.
《원청》은 중국 현지에서 출간과 동시에 150만 부가 팔리며 8년 만에 다시 한번 위화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해외 20여 개국에 판권을 판매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확인시켰다.
청년 위화의 꿈이 되어준 작품
23년에 걸쳐 거장의 솜씨로 복원된 중국의 대격변기
최초부터 위화는 1900년대 근대의 중국을 문학으로 재현해보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20세기의 삶을 이야기로 복원해 21세기 중국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것이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부터 시작되는 《인생》. 1960년대 문화대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허삼관 매혈기》, 자본주의 중국사회를 담아낸 《형제》까지가 모두 그러한 시도의 연장선에 있었다. 신작 《원청》은 위화의 그 마지막 퍼즐조각으로, 청나라 시대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시작되는 1900년대 초반 신해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떠오르는 대격변기로, 작품을 통틀어 규모가 가장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집필에 있어서도 《원청》은 최장 기간이 소요되었다. 1998년도부터 본격 작업에 들어간 《원청》은 2005년 《형제》와 2013년 《제7일》이 나오고도 무려 8년이 더 흐른 뒤에야 출간되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원청》이 전기傳奇소설을 써보겠다는 위화의 20대 시절 오랜 꿈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사실주의적 토대에서 작품을 집필해온 위화는 작품을 새로운 문학 토대에 세우기 위해 긴 기간 수정을 거듭했고, 마침내 사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섞어 천재지변과 모험, 전쟁과 도적질이 끊이지 않는 난세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젊은 시절 원대한 꿈을 실현한 작품 《원청》은 2021년 중국 문학계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허삼관 매혈기》, 《인생》 등을 통해 일찍이 위화의 작품을 접한 독자라면 《원청》으로 중국의 20세기 지형도를 완성하고, 그간 접해보지 못한 위화의 새로운 서술방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위화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원청》은 고전의 품격과 장르적 재미를 동시에 갖춘 명작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삶은 그저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여정 위에 선 인간의 숭고한 발자취
난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지만 위화의 이야기에는 그 어떤 역사적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위화는 일대변혁의 기로에서조차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평범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역사의 광풍은 보통 시민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전쟁과 기근이 닥치자 시민은 먹고살기 위해 도적이 되며, 이로부터 시민을 지켜야 할 군인은 외려 시민을 강탈한다. 시대변혁 앞에서 ‘보통의 운명’은 이토록 비정하기만 한데, 삶은 그저 정해진 시대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시대 앞에서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을까? 위화는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여정을 계속하는 린샹푸를 통해 제아무리 가혹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을 걸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해낸다. 추천사를 쓴 장강명 작가의 말처럼 《원청》을 읽다보면 절로 눈을 감고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가, 인물들의 운명을 알고 싶어 다시 펼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모든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위화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라고 말하며 공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어느 책의 감동적인 대목에서 문득 발견한 눈물자국과 같이, 눈물과 눈물이 만나고 감동과 감동이 만나는 순간이 바로 공명이며, 이 공명이 《원청》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였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찾고 추측하고 조각을 맞춘다.” 모두의 가슴에 원청이 있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알 수 없는, 또 찾을 수 없는 일이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만 이해한다면 서로서로 공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위화는 끝으로 한국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묻는다. 알 수 없는 운명의 조각을 찾기 위해 헤매는 사람이 이곳인들 왜 없을까. 그리하여 책장이 덮이고 눈물과 눈물이 만나는 공명의 순간이 찾아온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책 도서관 ♣ > - 문학(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장편소설-제 2회 고창 신재효 문학상 당선작]염부:박이선 (0) | 2023.04.17 |
---|---|
금지된 향수-고바야시 마사루의 전후문학과 조선:하라 유스케 (0) | 2023.04.06 |
[일본 장편소설] 세상 끝의 아이들: 나카와키 하쓰에 (0) | 2023.02.25 |
[일본 현대문학] 동시대 일본 소설을 만나러 가다-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현대 일본 문학의 흐름: 사이토 미나코 (0) | 2023.02.22 |
[우리 장편소설 두 편]화이트 타운:문경민 / 여기는 안묵호입니다:한재호 (0) | 2023.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