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도서관 ♣/[참고용 책]

두 번째 베트남전쟁- 한국의 전쟁 기억과 기억 투쟁:윤충로

Bawoo 2024. 1. 16. 21:08
저자:윤충로
출간:2023.5.14
 
[소감] 우리나라도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 끝났다. 2024년인 지금부터 기산하면 무려 49년 전이다. 전쟁이 끝난 해에 태어났어도 벌써 50대에 접어드는 나이가 되는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참전했던 나보다 한 두 살 많은 내 또래가 70대가 되어 주변에 아직 살아있다. 이들로부터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은 기억은 없다.  생사를 넘나든 전장에 있지는 않았기에 편하게 얘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받았다. 나는 베트남 전에서 철수 단계이던 1971년에 군에 입대한 덕분에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불운(?)을 겪지는 않았다. 대신 이제는 작고하고 안 계신 부친이 미군 부대를 지원하는 기술자로 가신 덕분에 다소나마 여유로운 생활을 했던 시절이 잠시 있었다. 
이 베트남 전에 대한 정보는 참전 당시에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민간인 학살 같은 내용이 알려진 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이고 아직도 논란이 많은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베트남전은 전장이 따로 없었기에 민간인조차도 적군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합법적인 살인을 할 수 있는 국가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야만성을 그대로 노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굳이 베트남전이 아닐지라도 우리나라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기에도 민간인 학살은 있지 않았던가. 인간은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야만성을 들어내는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베트남전에 관하여 많은 애깃거리가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일반 독자가 정독할 필요까지는 없는 분야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참고용으로 분류했는데 저자의 노고가 엿보이는 노작이라고 생각했다. 참고용 자료가 최근 것보다는 출간한지 오래된 게 더 많다는 건 이젠 우리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책소개

우리 일상에서 지워진 베트남전쟁. 
지난해 상반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은 외국 관광지는 베트남이었다. 한 여행플랫폼 기업이 해외 숙소 예약을 분석한 결과, 베트남이 절반 가까운 46.7퍼센트로 1위를 차지했다. 올해 역시 한국 관광객이 많다 해서 ‘경기도 다낭시’라는 말까지 나왔다. 1992년 12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과 정식 수교한 이래 한-베 관계는 이 정도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양국 간에는 ‘아픈 기억’이 있다. 지난 2월 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현대사에 여러모로 큰 흔적을 남겼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베트남전과 그 여진을 기억하고, 다시 봐야 하는 이유다. 베트남전쟁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여온 지은이는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1부에서 ‘전쟁의 기억’을, 2부에서 ‘기억의 전쟁’을 촘촘하게 보여준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1. ‘잊힌 전쟁’의 기억을 찾아서
2. 전쟁 기억 읽어 가기

1부 종전의 여진, 전쟁의 망각과 시차

1장 철군, 종전, 전장의 재현
1. ‘개선의 수사’와 철군의 정치ㆍ경제
2. 전쟁의 스펙터클과 동원
3. 정치의 야만화
2장 뿌리가 뽑힌 사람들
1. 동원과 선택
2. 전쟁과 이산의 삶
3. 난민의 정치
3장 전쟁의 망각과 냉전 해체의 시차
1. 전쟁을 망각하는 국가
2. 냉전과 탈냉전의 겹침
3. 전쟁 기억과 참전군인의 동원
4장 냉전의 틈새, 베트남전쟁 다르게 보기
1. 남민전, 유신을 넘어 변혁을 꿈꾸다
2. 리영희의 ‘우회로’, 베트남전쟁
3. 1980년대 ‘혁명의 시대’, 베트남전쟁(혁명)의 재인식
4. 번역과 혁명

2부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과거청산

5장 잊힌 전쟁 불러오기
1. 주변부 지역에서의 냉전과 탈냉전
2. 과거청산과 새로운 기억의 장 열기
3. 베트남인 생존자들의 전쟁과 삶
6장 기억에서 운동으로
1. 베트남전쟁 진실규명운동의 출발과 전개
2. 진실규명운동의 특성과 기억 투쟁 지형
3. 전쟁의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7장 초대에 의한 정의와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1. 지연된 정의와 부인하는 국가
2. 베트남전 과거청산운동의 변화와 재구성
3.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 부인과 시인 사이

에필로그-기억의 전쟁, 냉전문화, 그리고 기억의 미래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철군의 절정이자 종결은 1973년 3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주월한국군 사령부 해체식을 겸한 파월 개선 장병 환영 국민대회였다. 광화문에는 ‘파월 개선 장병 환영대회’ 대형 아치가 섰고, 서울운동장 환영식장에는 ‘이겼다 우리 오빠 자랑스럽다 우리 형님’ 등의 플래카드와 태극기가 물결쳤다. …… 1965년 2월 9일 주월남 한국군사원조단 2천여 명 장병에 대한 파월장병 환송 국민대회가 치러진 후 8년여 만이었다(34쪽).

‘월남전 후’의 문제에서 가장 간절한 것은 경제적 이해, “달러 파이프의 손질”이었다. “5만 한국군을 보낸 한국은 월남이 자유의 전장인 동시에 한 해 1억 8천만 달러까지 벌어들일 수 있는 황금시장이라는 점에서 월남전의 종식은 한결 심각한 문제를 던져 줄 것이 분명하다”는 논의는 전장과 경제전선이 합치된 베트남전쟁 참전의 단면을 보여준다(36쪽).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4월 18일 김일성의 중국 방문이었다. 《동아일보》는 중국 관영 신화사 통신을 인용해 “남한혁명이 나면 지원하겠다”는 김일성의 연설을 보도했다. 김일성의 베이징 방문은 한국전쟁 직전 김의 모스크바 방문, 중국의 공산화 이후 1년도 못 돼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왔다. 인도지나의 도미노가 한국으로 옮겨 오는 모양새였다(43쪽).

5월 8일 전국에서 150만 명이 궐기했고, 5월 9일에는 ‘총력안보국민협의회’(이하 국민협)가 결성됐다. 38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국민협은 현 상황을 ‘전쟁 전야의 비상시국’으로 규정하고, 발기문을 통해 “앞으로 어떠한 국론 분열적 언동도 민족의 이름으로 그 책임을 묻고 주시할 것이며, 또 배타적 안보관이나 자조적인 패배주의를 몰아 내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혔다(46쪽).

인도지나 붕괴 이후 ‘총력안보 궐기대회’로 한참 떠들썩했던 5월 13일 긴급조치 1~7호의 모든 조항을 하나로 담아 낸 긴급조치 9호(〈국가 안정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됐다. 개헌 주장, 학생의 집회ㆍ시위 또는 정치적 관여 행위 등을 엄단한다는 내용이었다(52쪽).

긴급조치 9호 이후 5월 20일 국무회의는 4ㆍ19 이후 폐지됐던 학도호국단 설치령을 의결했다. “배우면서 나라를 지키자”는 구호 아래 대통령이 중앙학도호국단 총재, 국무총리가 부총재가 되어 “고등교육기관의 체제를 국가 안보의 차원으로” 바꿔 가고자 했다. 7월에는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민방위기본법’, ‘교육 관계 개정법률’ 등 4대 전시입법이 국회를 통과했다(53쪽).

베트남전쟁 시기 연인원 32만 5,000여 명의 군인, 6만 2,800여 명의 파월기술자가 베트남에 갔다. 그 가운데는 소수지만 베트남을 기반으로 제3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전장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대부분 경제적 이유였다. 또 다른 제3국을 찾아 떠난 것도 어쩔 수 없는, 혹은 그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빈곤이 야기한 디아스포라”였다(58쪽).

한국전쟁과는 대조적으로 베트남전쟁은 침묵과 망각의 전쟁이었다. 1980년대는 특히 더 그랬다. …… 그렇지만 참전 기간 8년 6개월, 참전 연인원 32만여 명, 전사ㆍ순직ㆍ사망 5,000여 명, 국가ㆍ사회적 전쟁 동원의 경험을 고려할 때 국가 차원의 공식적 전쟁 기념과 기억 구축의 부재는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하다(79쪽).

10ㆍ26 이후 들어선 군부정권은 베트남전쟁을 국가적 기억ㆍ기념의 영역으로 불러오지 않았다. 오히려 군 내부 정치, 1980년대 검열체제와 문화통제로 인한 완고한 ‘금기의 벽’, 국가ㆍ정부의 무관심과 무책임성 등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의 재현이나 사회적 논의의 확장을 어렵게 했다. 먼저 군 내부 정치는 …… 재향군인회 산하 38개 임의단체를 해체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남 참전 전우회도 해체됐다(80쪽).

1984년 미국 사회가 고엽제 문제로 떠들썩하고, 뉴질랜드ㆍ호주의 베트남 참전군인들이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배상을 받는 과정에서 《중앙일보》가 이 문제를 크게 보도하자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언론의 입을 막았다고 한다. 더욱 기막힌 일은 군 당국의 관련 서류 보관 소홀 등으로 참전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82쪽).

1980년대 후반까지 해마다 4월 30일이 가까워지면 ‘월남 패망’과 관련한 기사가 신문 한 편을 차지했고, 다큐멘터리, 드라마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비극의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베트남전쟁 종전 7주년, 《경향신문》에는 〈외침보다 더 무서운 혼란의 적〉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고, 시위하는 사진의 제목은 ‘망국 전야’였다(84쪽).

1989년 2월 15일 종전 후 한국 고위급 경제사절단으로는 처음으로 럭키금성그룹의 구자학 금성반도체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기업인단이 하노이를 방문했고, 같은 날 공산화 이후 장관급 관리로는 최초로 베트남 경공업 장관이 합작투자 논의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실리가 이념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국가를 넘어 경제 영역이 더 활발히 움직였다(88쪽).

한국과 수교한 베트남은 과거 남베트남의 베트남공화국이 아닌 1976년 7월 2일 수립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었다. 한국은 베트남과 재수교 한 것이 아니라 통일 베트남과 처음 수교한 것이다(89쪽).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의 집단화는 비교적 초창기에 가시화됐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첫 모임은 1987년 12월 26일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월남 참전기념탑 건립 후원회 주최로 열렸던 ‘월남 참전기념탑 건립 후원회 발기인 대회 및 따이한 용사 만남의 장(리셉션)’이었다(92쪽).

1988년 5월 ‘따이한’을 사회단체로 등록(문화공보부 제415호)하고, 10월 19일 《따이한 신보》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 …… 따이한중앙회가 파월장병들의 대규모 집회를 기획한 것은 1989년 4월 30일 ‘월남 패망’ 14돌 행사였던 4ㆍ30대회였다(93쪽).

1990년 《말》 7월호에 실린 김민웅의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그 역사적 진실〉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유신체제가 각별히 육성한 정치군부의 주축이 다름 아닌 월남전 참전 주요 지휘관 세대였으며, 이들이 80년 광주민중항쟁의 진압과 직ㆍ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97쪽).

‘따이한’은 …… (1990년) 7월 25일~8월 3일까지 이어진 농성과정에서 이들은 《말》지 사무실에 난입하고, 관계자들을 감금ㆍ구타하고, “불을 질러버리겠다”, “빨갱이는 다 죽어야 한다”는 등의 욕설을 퍼붓고, “월남 참전 오도하는 불순세력 분쇄하자”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기도 했다(98쪽).

1992년 9월 26일 참전군인들이 제1회 ‘파월의 날’로 정한 날, 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독립기념관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5,000여 명의 참전군인 가운데 400여 명이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전장에 갔다 온 사람은 있으나 참전 기록이 없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정부 당국의 형식적ㆍ관료주의적 대응, 그 와중에도 세상을 등지고 있는 전우들, 여러 요인이 이들을 고속도로로 내몰았다. 이들은 “고엽제로 숨진 전우와 생존 환자에 대한 피해보상 및 치료대책 마련, 유공 참전용사에 대한 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국방부 장관 면담”을 요구했다(99쪽).

(1979년) 경찰은 남민전을 “표면상으로는 반체제를 가장하면서 베트콩 방식을 도입, 데모와 테러ㆍ선동ㆍ게릴라 활동으로 사회를 혼란시켜 국가변란을 기도한 적색 집단”이라고 발표했다. 수사 관계자는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를 적화시킨 베트콩의 투쟁 방식을 모방한 코레콩이라 ……(105쪽).

전후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의 지배를 위해 다시 들어왔다. …… 해방 전 조선에서 패배한 일본이 다시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종전과 함께 한국으로 그 군대를 진주시켰다고 가정하는 상황과 같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 재통치를 그 뒤에서 전승국가가 돕고 있다고 가정할 때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운 45년 8월 당시 한국 민중이 어떤 반응으로 대했겠는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111쪽).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은 과거와는 다르게 베트남전쟁(혁명)에 보다 급진적 의미를 부여했다. 베트남전쟁(혁명)은 냉전의식을 허무는 ‘이성의 도구’를 넘어 ‘혁명의 도구’가 돼야 했고, 거기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한 1980년대식 ‘베트남 읽기’가 있었다(118쪽).

베트남사와 관련된 최초의 금서는 1909년 금서가 된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의 《월남망국사》(주시경ㆍ이상익 옮김)였다. 이후 1970년대에는 리영희의 《전논》, 《우상》이 금서가 됐고, 1980년대, 적어도 1985~86년 발행된 위의 베트남 관련 서적은 모두 금서로 묶였다. 또한 1987년 선별 해금 시기에도 《끝없는 전쟁》,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사》 이외의 다른 책들은 미해금 상태로 남았다(123쪽).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1992년 12월 22일 한ㆍ베 수교는 과거 적대관계의 청산과 새로운 협력관계 구축의 신호탄이었다. …… 한국의 입장과는 다르게 베트남은 과거사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 베트남인들은 “침략을 당한 쪽은 우리이니, 우리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으면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며 과거사를 가슴에 묻었다(142쪽).

“부끄러운 역사에 용서를 빌자”라는 캐치프레이즈하에 1999년 9월~2000년 9월까지 무려 46주간 지속된 《한겨레21》 캠페인은 한국의 베트남전쟁 경험과 기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했다. 또한 캠페인을 전후해 형성, 전개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운동(이하 진실규명운동)은 한국이 경험한 베트남전쟁 기억에 일대 전기를 제공했다(145쪽).

베트남전 진실규명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조직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1989년 조직),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1995년 조직), ‘나와 우리’(1998년 조직), ‘국제민주연대’(1999년 조직) 등을 들 수 있다(149쪽).

2000년 1월 대책위원회 결성부터 2001년 4월 진실위원회 조직 개편 이전까지다. 대책위원회는 2000년 3월 ‘진실을 위한 첫발’로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 자료집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 당신들에게 사과합니다!》를 발간한다. 이어 4월 28일에는 대책위원회 명칭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실위원회’로 바꿨다(174쪽).

참전군인들은 학살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상황 논리’로 이를 정당화했다. 베트남 양민들이 한국군에 죽고 강간당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 사람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 베트콩은 표 내고 다니지 않는다. …… 군복이나 계급장 같은 것은 없었다. 아낙네도 베트콩이고, 노인네도 베트콩일 수 있다. …… 우리는 무장하지 않은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었다. …… 저쪽도 죽은 사람들이 양민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양민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들이 입증하고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양민으로 인정받는 것이다(180쪽).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2월 베트남을 방문하여 호치민 묘소에 헌화하고, “두 나라 사이의 불행한 과거”를 언급했다. 1999년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된 이후 2001년 쩐득르엉Trần Đức Lương 베트남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좀 더 적극적인 사죄의 뜻을 전했다(186쪽).

베트남전쟁 참전 50주년 기념행사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 9월 정부는 …… 발을 뺐고, 9월 25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대한민국 월남참전자회가 개최한 그들만의 행사로 치러졌다(188쪽).

2015년 4월 베트남 생존자들의 한국 방문, 9월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 설립 등 일련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차별화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의 전개를 보여준다(204쪽).

시민평화법정의 기본틀을 마련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이었다. …… 이들은 2017년 6월 2~7일, 2018년 2월 9~13일 두 차례에 걸쳐 베트남 마을을 방문하여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등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했다. 이 법정은 하미와 퐁니ㆍ퐁넛 마을 학살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뤘다(205쪽).

시민평화법정은 이 가운데 진실위원회, 배상ㆍ보상, 추모와 기념, 속죄와 사과, 화해, 재건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했다. 먼저 본 법정은 가해자의 유무죄를 가리는 형사법정이 아니라 “국가의 불법행위,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을 판단”하여 “배상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형사법정이 아닌 민사법정 형식을 택한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11쪽).

퐁니사건의 응우옌티탄이 2020년 4월 21일 한국 정부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다. 그녀는 “이 소송은 나 개인에게 특별히 이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내가 정말 바라던 일이지. 만약 승소한다면 베트남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될 테니까 ……(225쪽).

과거청산 작업은 국가 정당성을 제고하는 일이며, 폭력의 시대를 넘어 인권ㆍ평화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도정이다. 더디게 갈 수는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231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달러 젖줄, 독재 빌미 그리고 기억 너머로
1965년 2,000여 명의 군사원조단이 파견된 후 73년 주월한국군 사령부 해체식이 있기까지 8년여 동안 연인원 32만여 명의 군인, 6만여 명의 기술자가 베트남에 갔다. 5,000여 명의 군인이 전사, 순직, 사망했으며 베트남전 이후 제3국으로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국가적으로도 베트남은 자유의 전장인 동시에 한 해 1억 8,000만 달러까지 벌어들이는 ‘수출 대어 줄’이었다. 또한 베트남전 종식은 박정희 정권이 ‘선안보 후민주론’을 앞세워 독재를 강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각종 안보궐기대회가 잇따르고, 긴급조치 9호 선포, 학도호국단 재설치, 민방위 기본법 등 4대 전시입법이 그 결과였다. 반독재ㆍ유신 투쟁에 나섰던 남민전이 ‘코레콩’으로 불린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10ㆍ26 이후 들어선 군부정권하에서 베트남전은 철저히 잊혔다. 참전전우회는 해체됐고, 고엽자 피해자 구제도 방관했으며, 참전 군인들의 기록도 갖추지 못했다. 1992년 ‘제1회 파월의 날’ 기념행사에 참여했던 400여 명이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 것도 작은 해프닝에 그칠 정도였다.

시민평화법정에 의한 ‘초대에 의한 정의’
2부에선, 민주화 운동권에서 ‘혁명의 도구’로 소환되던 베트남전을 보는 시각이 90년대 말 이후 양민 학살을 중심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조명한다. 1998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불행한 과거’를 언급했고, 2004년엔 노무현 대통령이 “마음의 빚이 있다”고 에둘러 사과했다. 지은이는 1999년 《한겨레21》이 벌인 “부끄러운 역사에 용서를 빌자”는 장기 캠페인이 ‘과거청산’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어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베트남전 진실규명운동,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은 2018년 베트남시민평화법정이 열리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베트남 생존자들의 한국 방문이 이뤄지고, 군이 내세우는 ‘상황 논리’를 극복하면서, 형사법정이 아닌 민사법정으로 진행된 시민평화법정은 “권력은 없지만 정의, 진실과 연대를 담아낸 법정, 피고 대한민국에 ‘망각 금지’를 선고한 법정”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더뎌도 포기할 수 없는 과거 청산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끌어낸 퐁니마을 사건의 생존자 응우예티탄은 2020년 소를 제기하면서 그랬다. “나 개인에게 특별히 이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야. …… 나는 이 소송을 통해 한국 정부가 ……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지은이는 책 말미에 “과거청산 작업은 국가 정당성을 제고하는 일이며, 폭력의 시대를 넘어 인권ㆍ평화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도정이다. …… 이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썼다. 이는 식민지 시기 일제가 저질렀던 각종 만행에 대한 사과를 요구해온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그만큼 베트남전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이 책의 가치가 새삼스럽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