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0(숙종 36)~1760(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보산자(寶山子). 고조부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경여(敬輿)이나 증조부 민계(敏啓)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 없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음보(蔭補)로 한양의 북부참봉(北部參奉)을 지낸 후에는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와 경상도 사근역(沙斤驛) 찰방(察訪)을 거쳐 1750년 음죽현감이 되었다. 1752년 관찰사와의 불화로 현감직을 사퇴한 후 음죽현 설성(雪城)에 종강모루(鍾崗茅樓)를 짓고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궁핍하고 몸은 병약했으나 성격이 고결하고 강직했으며, 노론의 입장에서 숭명배청사상(崇明排淸思想)을 끝까지 고수했다. 당대의 많은 명유(名儒)들과 교유했으며, 그중에서 이윤영(李胤永)·송문흠(宋文欽)·김무택(金茂澤) 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널리 추앙받았으며, 그림 이외에도 전서(篆書)와 전각(篆刻)을 잘했다. 20대 초기에는 남종화법에 의거한 화보(畵譜)나 조영석(趙榮祏) 등의 화풍을 주로 따랐고, 30대 중기에는 금강산 등지의 진경산수(眞景山水)와 문인들의 아취가 넘치는 청유(淸遊) 또는 시회(詩會)의 장면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40대 후기에는 은일자(隱逸者)의 심회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다. 메마른 갈필선(渴筆線)과 차갑고 깔끔한 담채와 선염(渲染)이 자아내는 문기(文氣) 어린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이윤영과 윤제홍(尹濟弘) 등에게 이어져 조선 후기 문인화의 일맥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60여 점의 유작이 전하는데 대표작으로 〈수하한담도 樹下閑談圖〉(개인 소장)·〈송하관폭도 松下觀瀑圖〉(국립중앙박물관)·〈설송도 雪松圖〉(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있다. 문집으로 〈능호집〉 2권이 전한다.
이인상(李麟祥)像
설송도(雪松圖)
<설송도>는 이인상의 회화적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이인상은 소나무를 대담하게 클로즈업시켜서 화면에서 수직으로 곧게 서 있는 설송을 배치한 후, 그 뒤편에 또 하나의 소나무를 휘어지게 하여 수직으로 선 소나무와 교차시켜 그려놓고 있다. 소나무 가지들은 매우 강하고 움직임이 크게 각지게 휘어져 자란 형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형상의 움직임은 소나무의 뿌리와 암석들의 각진 모양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그 형태적 구성상 매우 힘차고 기개가 있으며, 단조롭기 쉬운 먹색을 섬세하게 변화를 주어서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맑은 기상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한 겨울에 눈을 맞으면서도 푸르게 자라는 소나무의 형상에서 이인상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설송도>는 지조 높은 선비의 맑은 기상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족자 종이에 수묵 117.4*5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송하관폭도>는 선면(扇面) 그림이지만 매우 짜임새가 있고 밀도가 높은 작품이다. 작은 크기의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는 스케일과 충만감이 있다.
중앙 암반에 뿌리를 내리고 용소를 향해 구부러진 노송 한 그루와, 그 곁에 단정히 앉아 시상(詩想)에 잠긴 인물 구도는 그의 산수화에 자주 보이는 포치법(布置法)의 특징이다. 주제는 노송과 동떨어져 바위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선비의 유연한 모습으로 이인상 특유의 맑고 격조 높은 정신미를 느끼게 한다. 종이에 수묵담채 23.8*63.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도(山水圖)
이 그림은 원래 이인상의 선면화첩 중의 한 장이었는데 지금은 족자 형식으로 따로 표구되어 있다. <고사한담도>와 비슷한 부드러운 엷은 필치와 파랑과 엷은 갈색의 세련된 배합을 보이는 그림으로 이인상의 다른 그림에 비해 상당히 복잡한 구도를 보인다.
즉 부채 모양의 특이한 화면이 물의 흐름에 의해서 불균등하게 사등분되었고 그 중 가장 작은 부분이 오른쪽 전경이 된다. 여기에는 몇 그루의 고목(古木)이 기둥같이 늘어서서 물 건너의 암벽(岩壁)을 가리고 있다. 물길을 사이에 두고 솟은 윗쪽 두 암벽은 동굴의 입구처럼 보인다. 잔잔한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작은 배 위에는 두 사람의 풍류객이 절경 속을 노닐고 있다.
이인상은 명나라 오파(吳派)화풍(畵風)을 소화시켜 조선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는데 이 그림은 오파적 소재와 필치를 보이기는 하지만 좀더 특징있는 구도를 보여 그의 독창성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종이에 수묵담채 22.2*6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면송석도(扇面松石圖)
<선면송석도>는 기암에 뿌리를 둔 노송의 힘찬 생명력과 기개를 살린 작품으로, 꼿꼿한 필선과 선결한 담채가 마치 그의 해맑은 정신세계를 은유해 주는 듯한 문기(文氣)에 가득차 있다.
반은 떨어져나간 화제(畵題) 중간쯤에는 '윤지지의(胤之之意)'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胤之의 뜻'을 말하는 것으로, 이윤영이 김무택을 위해 그려 주었던 <청수교사도(淸修僑舍圖)>와 같은 장소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25*47.7cm 한국 개인 소장
수석도 (樹石圖)
[수석도 樹石圖]-이인상(李麟祥, 1710-1760), 능호관(凌壺觀)
일찌기 자신의 화풍을 이룩한 이인상의 28세 때의 작품이다. 그가 늘 즐겨 그리는 소나무와 그밖의 나무들을 담묵으로 처리해 화면 전체가 깔끔하고 격조높은 화풍을 보여준다.
그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樹寒而秀 石文而醜](나무는 차지만 빼어나고 돌은 아름답지만 추하다)라는 문구로 그림의 내용을 보완해 주고 있다.
고사한담도(高士閑談圖)
이 그림은 이인상과 교우 관계를 가졌던 몇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기록으로 당시 문인들의 풍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으로 노목(老木) 두 그루가 서로 엇갈려 있고 그 밑의 편편한 바위에는 한담(閑談)을 즐기는 선비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바위 너머로 골짜기를 이루는 바위 절벽이 나머지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이인상은 고목, 특히 소나무를 많이 그렸으며 그의 그림에는 소나무가 화면 중심부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이 그림 역시 두 노목이 그림 중앙에 있어 뚜렷한 구성적 요소가 되고 있다. 또한 엷은 먹점과 아주 흐린 푸른색 점들의 혼합으로 묘사된 나뭇잎은 풍부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종이에 수묵담채 33.7*59.7cm 한국 개인 소장
이인상(李麟祥)像
능호관 이인상(171O-176O년)은 영조 11년 (173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죽현관이 되었다가 관찰사와 사이가 나빠져 사직, 단양의 구담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시,서,화, 삼색이라 칭해진 조선왕조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화가이다.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 전해오는 이인상상은 초본형식으로서, 복건에 야복을 한 좌안7분면의 반신상이다.
이 초상화의 필자가 누구인가는 알 수 없으나, 화상에 상당히 교하고 또한 이인상과 친숙한 사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까닭은 18세기의 여타 초상화에 비해 이 초상화는 피부가 지닌 보편적 육리문사출보다는 대상인물 자체의 골격이나 신정묘출에 더 진력하였음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의 형용, 왼쪽 이와 중이의 덧그린 흔적, 양미간을 약간 찌푸린 모습 등은 오랜 숙시끝에 나온 진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인상상 외에도 상당한 수효의 대신들의 초상화초본들이 전해오는데, 그 중에는 2,3,4등의 숫자가 적혀져 있어 득의치 못할 경우 누차 초본을 내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초상화에서의 초본은 한결같이 정본보다는 필선이 짙고 세찬데, 이들 초본에서 기량의 차이가 오히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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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일정 화실<한국화>
글쓴이 : 말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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