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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편소설] 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Bawoo 2024. 11. 20. 17:46
저자:요모타 이누히코
출간:2024.10.14
 
[소감] 이용하는 도서관의 신간 문학 일본 코너에서 발견한 작품. 일본인이 우리나라 1970년 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에게 살해당한 1979년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호기심에 빌려와 읽었다. 나와 거의 동시대를 산 일본인이 체험한 우리나라 1979년 대 풍경은 과연 어땠는지가 궁금해서였다. 나의 20대 시절인 1970년 대 특히 1979년도가 중심으로 쓰인 이야기라는 것에. 

내용은 저자(작가)는 책머리 "한국독자 여러분께"에서 소설이라고 강조(?)했지만 내게는 기록문학으로 읽혔다. 1953년 생인 저자(작가) 가 20대 시절-26세일 때- 우리나라 건국대학교-책에는 현국대학교로 나온다-에 일어강사로 1년간 재직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에게 살해된 1979년을 중심으로 전개한 우리나라 이야기인 때문이다.
실존했던 유명 인물- 하명중, 하길종, 지명관, 최인호, 전혜린, 전채린 등 관련 이야기는 설사 우리나라 사람일지라도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 이 대거 실명으로 등장하는 데다가 저자가 체험한 당시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숙집 주인, 학교 제자 등 유명인이 아닌 경우 가공의 인물일 수도 있겠으나 글의 전개로 봐서는 실제 접촉했던 인물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소설적 장치라는 느낌보다는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썼다는 느낌이 짙었다. 

책 내용의 수준을 소설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잘 쓴 기록문학으로 이해하는 쪽인데 가명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존재하는 때문에 소설이라고 주장(?)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잘 쓰여서 읽기에 편했다. 아마 번역의 힘일 것이다. 이 책 바로 전에 번역이 엉망이어서 읽다가 포기한 책이 있기에 더욱 그랬다. 외서의 경우 번역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절감하게 했다. 다만 활자 크기가 노안인 내 기준으로는 약간 작았는데 내가 겪은 20대 시절 우리나라를 일본인은 과연 어떻게 느꼈을까가 궁금해서 약간 무리해서 읽어냈다. 혹시 일본인이라서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 대한 우월감의 표현이 많지 않을까도 궁금사였다. 결과, 기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작가의 글을 통해 나타난 다른 일본인들이 갖는 우월감의 표현을 볼 때 우리나라에 대한 당시 일본인의 시각이 지극히 부정적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식민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찌보면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모멸감.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워 한 건 일본의 젊은이들이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웠다는 점이었다.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군대 자체가 헤체되었으니 이후 태어난 젊은이들은 병역 문제 걱정없이 20대 초 꽃다운 시절을 마음껏 누린 것 아니겠는가. 자기들보다 불과 20여 년 -1920년 기준-빨리 태어난 선배 세대는 전장-중국 전선, 태평양(남방) 전선-으로 끌려나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같은 나라일지라도 시대를 잘 타고 나는 행운을 누려야 한다는 걸 저자가 증명하고 있었다. 거의 3년을 군대에서 의무적으로 지내야 했던 나에게는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 게다가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나라 전젱 특수에 힘 업어 패전 후 빠르게 부자 나라가 되어 있지 않았나. 우리나라도 경제 발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노력하고 있던 시대이긴 했지만 70년 대 초 내 군대 경험으론 그야말로 국산 장비는 거의 없는 미군이 남겨준 물건 뿐인 가난한 나라였다. 총은 물론이거니와 철모, 수통까지 개인 장비 거의 다.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박통이 살해당한 1979년은 내가 군복무하던 70년 초 보다야 훨씬 나아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던 시대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20대 시절에 경험한 우리나라 상황을 이미 선진국이던 이웃나라의 20대 일본인이 본 시각으로 쓴 것이어서 많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MZ세대는 1970년 대는경험하지 못한 시대여서 이 책을 통해 그 시절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교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분단에 책임이 있는 일본이란 나라 사람의 시각으로 쓴 내용이어서 나도 전혀 몰랐던 내용이 많이 들어 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표적인 게 우리나라-조선-에서 나고 자라-합방이 된 해인 1910년 생이라면 35세 까지 산 것이 된다-한반도를 고향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국교가 열린 후 자국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로 와서 여유있게 산다는 내용은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식민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산 사람들이 반일성향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하는 대목도 보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에게 피살되어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1979년은 벌써 45년 전 역사가. 그 시절을 20대 후반에 직장인으로서 오롯이 경험한 나로서는 이 시절을 외국인의 입장에서 경험한 책을 처음으로 보는 거여서 또 다른 시각으로 그 시절을 돌아보게 되는 좋은 경험을 했다. 저자도 이제 삶을 을 정리하는 단계인 70대에 접어 들었으니 이웃인 우리나라에서  1979년도에 겪은 특별한 경험한 지날 날을 되돌아보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것 아닐까 싶다. 
 
 
책에 관한 내용은 아래 책소개를 참고 바랍니다. 

책소개

1978년 어느 날 도쿄 이자카야
나는 졸업논문 제출 후 세미나 동기생들과 술자리를 가진다. 그 자리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 양 군으로부터 한국에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시끌벅적 저마다 생각하는 한국을 말한다. 그리고 며칠 후 세노는 한국의 어느 대학으로부터 사범대학 객원교수 초청장이 든 우편물을 받고, 지난 술자리에서 한국에 가겠다고 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아, 내가 진짜 한국에 간단 말인가?

1979년 군사정권하의 서울
서울의 대학에 일본어 강사로 부임한 나. 병역 의무를 해야 하는 같은 세대의 한국 청년, 강렬한 반공의 공기, 식민지 시대의 기억이 남아 있는 서울에서 생활하던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계엄령이 선포된다. 1년간의 서울 체류는 예상치 못한 만남의 연속이었다. 대학교, 영화관, 시장, 버스, 술집, 전라도 여행 등 곳곳에서 만난 1979년 한국 풍경과 사람들. 한운사, 안병섭, 김지하, 김대중, 김영삼, 하명중, 하길종, 지명관, 최인호, 전혜린, 전채린 등 실존 인물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더욱더 흥미진진하다.

대통령이 암살된 다음 날 계엄령의 서울
1979년 10월 27일. 계엄령 하에서 나는 학교 교문 앞에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럴 바엔 계엄령하의 서울을 걸어보기로 한다. 세종문화회관 맞은편에 미국대사관이 위치했기에 특히 경계가 삼엄했다. 나는 몇 번이고 병사들에게 검문을 당했고 여권을 보여주며 세종로를 가로질렀다. 경복궁 옆길로 접어들어 프랑스문화원 쪽으로 향했다. 프랑스 영화를 보러 몇 번이나 지나갔던 길이다. 화랑과 세련된 서양식 카페가 즐비한, 서울에서도 유난히 세련된 거리다. 이미 가게 대부분은 태극기를 조기 게양했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수많은 질문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은 채 서울을 떠났다. 1년 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질문이었다. 한국과 한국인, 거리를 두고 관찰자 입장에서 보려고 했지만 점점 빨려 들어갔다. 한국인은 언제나 정면으로 말을 걸어왔다. 국가란 무엇인가. 군대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역사와 언어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한국인이 민족이든 역사든 거대한 관념과 씨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어떻게든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 그리고 내 손은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겁을 먹고 머뭇거렸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1953년 오사카부 미노시 출생. 도쿄대학에서 종교학을,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이자 시인으로 문학, 영화, 만화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 문화 현상을 논한다. 메이지가쿠인대학, 컬럼비아대학, 볼로냐대학, 텔아비브대학, 중앙대학교(서울), 칭화대학(타이완) 등에서 영화사와 일본 문화론을 가르쳤다. 1993년 『쓰키시마 섬 이야기』로 사이토료쿠상, 1998년 『영화사로의 초대』로 산토리학예상, 2000년 『모로코 유적』으로 이토세이문학상과 고단샤에세이상, 2002년 『서울의 풍경-기억과 변모』로 일본에세이스트클럽상, 2008년 『번역과 잡신』, 『일본의 마라노 문학』으로 구와바라타케오학예상, 2014년 『루이스 부뉴엘』로 예술선장문부과학대신상, 2019년 『시의 약속』으로 아유카와노부오상을 수상했다.

역자 : 한정림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일본어교육원에 서 일본어 통번역을 공부했다. 「여성신문」에서 기자로 근무하다 일본 문화청 초청으로 블랙텐트씨어터에서 공연 제작 연수를 받고 돌아왔다. KBS, MBC, SBS 등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영상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봄의 딸기 판자넬라, 겨울의 레몬 파스타』, 『하세가와 요헤이의 도쿄 레코드 100』 등이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한국 독자 여러분께

1장 출발하기까지
2장 도착 직후
3장 성곽도시 서울
4장 일본인과 교포
5장 잔재와 모방
6장 전라남도 여행
7장 이문동
8장 큰 문어 내한
9장 아저씨의 환갑
10장 요절한 영화감독
11장 계엄령 발동

에필로그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책 속으로

“세노 씨, 기억 안 나요? 우리 대학에서 일본어 교사를 모집한다고 했더니 바로 손을 들고 갈게, 갈게, 꼭 가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다시 한번 건배를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장은 믿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머리가 조금 무거워서 아무래도 과음을 했나 싶은 느낌은 들었지만 설마 한국의 대학 강사 채용에 희희낙락하며 지원했다니, 전혀 기억에 없었다.
“오늘 받은 서류는 공식 초청장입니다. 서류 마지막 부분에 총장 직인이 제대로 찍혔는지 확인해주세요. 세노 씨는 1979년 3월 1일부로 사범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됩니다. 즉시 미나미아자부 한국대사관으로 가서 노동 비자를 신청해주세요. 그때 공식 초청장이 의미 있게 쓰일 겁니다. 알겠어요? 3월 2일부터 새 학기 수업이 시작되니까 서둘러주세요.”
18쪽

이와나미서점에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라는 세 권짜리 신서가 출간돼 있었다. 저자는 ‘T·K생’이라고만 적혔을 뿐 알 수 없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인지 일본 또는 다른 나라에 망명 중인 한국인인지 알 수 없었고 단지 원고를 잡지 『세카이世界』 편집부가 정리했다고만 밝혔다. 책은 1972년 10월 17일, 한국에 갑자기 계엄령이 시행되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10월 유신이 단행된 시점부터 시작했다. 이때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인정하는 신헌법이 공포됐고,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모든 정치 활동이 엄중히 금지됐다. 각계각층 사람들이 사태를 씁쓸하게 여기며 비관하고 있음을 알리며 첫 권이 끝났다.
26쪽

1973년,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이 대낮에 KCIA(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되어 해상에서 하마터면 살해될 뻔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대학생들은 속속 연행되어 KCIA의 손에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도 연행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다. 반정부 언설을 드높인 「동아일보」는 정부로부터 광고 철회라는 괴롭힘을 당했고 7개월간 항전 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발령된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해 대학은 완벽하게 ‘병영화’되었다. 1976년에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가와 종교인이 나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지만 박 정권은 정부 전복을 꾀한다면서 가혹하게 탄압했다. 500명 넘는 대학교수가 추방되었고 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습격받은 끝에 당 대표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불경기 속 전국 곳곳에서 심각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에 이어 손에 든 서적은 일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집필한 『옥중 300일』이었다. 다치카와 마사키라는 청년은 1974년 서울에서 반정부 운동권 학생과 접촉했다는 혐의로 KCIA에 연행돼 밤낮으로 가혹한 고문을 받는다. 그 결과 관계도 없는 ‘민청학련사건’이라는 정치적 음모에 관여했다며 기소돼 징역 20년을 구형받는다. 그는 옥중에서 지인인 시인 김지하와 재회하고 단식투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정치 협상을 통해 석방된다. 이 생생한 기록에는 “KCIA한테 불가능한 것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일뿐이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거 참 엄청난 나라에 가게 되었구나, 한숨을 쉬었다
27~28쪽

“한국 노래가 아니잖아?”
“아니요, 우리나라 노래입니다. 얼마 전에 인기였어요.”
“아니야, 사이먼 앤 가펑클이라는 미국 가수 노래야. 벌써 10년도 전에 일본에서 유행했다고. 원래는 영국 민요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노래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노래에요.”
학생은 양보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물어보니 〈Scarborough Fair〉뿐만이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의 팝에 원곡과는 전혀 상관없는 한국어 가사를 붙여 한국 오리지널 곡으로 많이 불렀다. 그중에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유명한 가수가 부른 경우도 있고 무명의 누군가가 가사를 붙인 곡이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경우도 있다. 어느 노래든 공통점이라면 적잖은 노래가 남북 분단이나 민주화 투쟁이라는 그야말로 한국의 현실 문제를 노래한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노래를 알려준 학생들은 원곡을 모른 채 모든 노래가 한국의 독자적인 노래라고 믿었다.
106쪽

일본에서 온 잡지와 책을 받으려면 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국제우체국에서 출두하라는 요청이 인쇄된 엽서가 도착한다. 그러면 버스를 갈아타고 신촌 앞 철도 밑을 지나 연세대학교 맞은편에 있는 우체국에 가야 한다. 오전 중으로 시간대가 지정돼 아무래도 출퇴근 러시아워에 맞닥뜨린다. 비틀거리며 버스에서 튕겨 나와 우체국 바깥 계단을 올라가 2층 창구에서 서류를 보여주고 외국에서 온 소포 수령을 신고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수령 절차가 끝날 리 없다. 담당자가 커터 칼로 소포 포장을 거칠게 뜯으면 안에서 나온 책과 잡지에 대해 한 권 한 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와 반정부 관련 문서가 없는지 검사하려는 목적이다.
114쪽

나는 한국에 와서 ‘학생의거’라는 말을 배웠다. 1919년 파고다공원 앞에서 조선 독립 시위 행진을 시작한 시민들.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 많은 희생자를 낸 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금 의거로 순국한 애국자로 추앙받는다. 1929년 광주보통중학 소년들도 식민 지배의 굴욕에 분노하여 의거에 몸을 던진 사람들로 인정받았다.
과연 일본 역사에서 의거는 존재했을까? 일본인은 세간의 시선이라는 환상에 휘둘리기만 할 뿐 어느 시대든 양처럼 권력에 맹종하고 굴욕을 내면으로 봉인하는 일에 이골이 났던 게 아닐까? 홍기철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지식인이 앞장서서 개척한 역사가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학생들은 늘 권력 앞에서 패배했고 그 좌절을 교묘히 내면화하면서 약간의 냉소주의를 선물로 품고 기업 전사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조종하기 쉬운 양떼에 또 한 마리의 양이 방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144쪽

“설마 KCIA로 연행되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바로 김 교수의 안색이 바뀌었다.
“……실은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 우리나라의 특수한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말한 거예요.”
“제가 신문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니요, 아니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았어요.”
“제가 싫다고 하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해요. 중앙정보부가 직접 선생님을 지명해 대학에 연락했어요. 그저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159쪽

이럴 바엔 하루 동안 계엄령하에서 거리를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보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군대가 시내에 주둔한다는 것은 반어적 의미로 치안이 유지된다는 뜻이다. 평소보다 두 시간 빨라진 통행금지를 염두에 두고 ‘구경(관광)’에 충실해보자.
59번 버스를 타고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렸다. 두 시간 전에 비해 탱크 숫자가 늘었다. 도로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놓았고 총을 든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맞은편에 미국대사관이 위치했기에 특히 경계가 삼엄했다. 나는 몇 번이고 병사들에게 검문을 당했고 여권을 보여주며 세종로를 가로질렀다. 경복궁 옆길로 접어들어 프랑스문화원 쪽으로 향했다. 프랑스 영화를 보러 몇 번이나 지나갔던 길이다. 화랑과 세련된 서양식 카페가 즐비한, 서울에서도 유난히 세련된 거리다. 이미 가게 대부분은 태극기를 조기 게양했다.
263~264쪽

우파의 환대도 좌파의 비난도 나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느 쪽도 일본 사회라는 작은 그릇 안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물의 진동에 불과하다. 눈앞에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존재했다. 나는 한국이라는 완강한 타자를 앞에 두고 어떻게 소화해야 좋을지 그 물음에 깊이 사로잡혔다.
1년간의 서울 체류는 예상치 못한 만남의 연속이었다. 만남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결정적이라 요령껏 지식과 정보를 나의 내면에 수납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한국인이 민족이든 역사든 거대한 관념과 씨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어떻게든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겁을 먹고 머뭇거렸다. 관념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꾸만 멀어져갔다.
292~293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