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작 중 등장 인물이 처음부터 우리 역사에서 부정적인 인물 이름으로 나오는 것 아닌가? 조선 말기 망국의 원흉에 해당하는 고종비의 일가친척들인 민 씨 일족. 시아버지가 민겸호이고 남편이 민영휘, 시동생이 민영익이라는 이름이었다. 놀라서 이들의 생몰연대를 검색하면서 작 중 같은 인물이 아닌가를 알아봐야 했다. 결론은 아닌 걸로 났지만 읽는 내내 많이 불편했다. 왜 굳이 역사상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이들을 작 중에 등장시킨 것인가. 더군다나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 경남 산청 지역 아닌가?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이 소감을 쓰면서 막연하게 생각한 것이 작가의 성이 민 씨인 것으로 보아 그 집안의 후손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을 정리하는 나이가 되면서 그동안 다른 일을 하느라 자신의 재능을 썩히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작품이기에 집안의 인물들 이름을 남기려는 생각을 한 것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사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인물들의 이름을 왜 굳이 차용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작품 내용은 작품성 면에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흠을 잡을 수는 없다. 그만큼 글쓰기의 기본이 잘 되어 있다. 다만 작가의 고모라는 "명주"라는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내용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긴 기간이고 등장인물도 상당히 많아서 대작이 되어야 할 소재인 탓에 아쉬움은 있다. 주인공의 삶과 관련이 있는 있는 여러 인물들의 삶이 특별한 이유없이 그냥 사라져 버린다는 점. 아마 주인공의 삶 위주로 작품을 전개하다 보니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그보다는 작가의 고령이 원인일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에 작가가 젊은 시절부터 글쓰기를 했다면 이런 결점(?)을 다 없이 한 대작으로 소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인간의 삶에 있어 이미 흘러버린 세월이 많아 삶의 끝자락에 와 있는 나이가 되면 설사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명작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몸이 도와주질 않는다는 얘기.ㅠㅠ 그럼에도 작품은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리기보다는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가의 작품 중 내가 끝까지 읽은 몇 편 안 되는 작품에 해당하기도 한다.
* 작품에 대한 해설은 아래 책소개, 출판사 서평을 참고 바랍니다.
책소개
민윤숙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민윤숙 작가는 이 소설이 자신이 쓴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일생의 역작인 『산청』 속에는 작가가 물려받은 삶과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다. 『산청』의 주인공 '명주'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혼례를 치르고 남편을 잃는 장면에서부터 출발하는 소설은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명주가 살아간 삶의 여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산청』은 일제시대와 분단, 한국전쟁을 통과하며 살아남은 한 인간의 일대기이자 산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한 집안의 가족사이며 한국의 근현대사이기도 하다. 작가는 질곡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삶을 지켜내고자 한 '명주'를 통해 올곧은 심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작가의 말│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던 사람 명주
산청
발문│그대 '산청'을 아는가_방현석(소설가·중앙대 교수)
책 속으로
『산청』은 내가 쓴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다. 내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나를 잘못 살지 않게 해준 '명주'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그 따뜻한 온기가, 내가 아끼고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전해져 그들의 삶이 조금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_「작가의 말」 중에서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랑은 천 리 길을 달려와 결혼식을 했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 졸업시험을 치렀다. 그 후엔 동경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모든 절차는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결혼식 뒤에 삼 일 밤을 신부의 집에서 보내고 신랑이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신부의 집으로 가서 삼 일을 묵어야 했다. 그러나 그 예법을 다 지킬 수는 없었다. 첫날밤은 신부의 집에서 보내고, 다음날은 직각댁 누님 집에서 묵고, 그다음 날에는 다시 신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신랑은 새벽에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이 계획이었다.
_20쪽
영휘가 살아 있었다면 밤이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불 속에 꼭 붙어 있었을 것이고 암만 어두워도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명주는 그 사람이 그리웠다. 어느 때보다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의 바람처럼 씩씩하게 살아가자고 마음먹었지만 그냥 그의 곁으로 가고만 싶었다.
_72쪽
이제 해방이 되었다. 모두가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민겸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그는 분명 군수로 일하며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쌀과 놋그릇을 공출하는 일에 앞장섰고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어내는 일도 했다. 결국 그 일들에 몸서리치며 그만두기는 했지만 일본의 관리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도 조국의 해방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_116쪽
명주는 김천에서 버스를 타고 산청 읍내에서 내렸다. 읍내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십 리 길을 더 가야 했다. 경성에서 첫차를 타고 출발했는데도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편 능선으로 기우는 해의 잔광이 온 천지를 붉게 물들였다. 그 눈부신 빛 속에 경호강의 거대한 물결이 쉼 없이 꿈틀대며 흘러갔다.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다녔어도 한 번도 눈에 담은 적이 없었던 황홀한 장관이었다.
_145쪽
“북쪽은 토지개혁을 했다는구만. 지주들의 땅을 무상몰수해서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했다는데.”
빨래한 그들의 옷을 가져다주려고 대문으로 들어서던 명주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아저씨 맞은편에 비스듬히 누운 사람이 말을 이었다.
“무상몰수는 맞는데 무상분배는 아니라던데. 주인이 지주에서 나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거야.”
“자네들은 그런 말을 어디에서 다 들었나.”
“배오개시장에 나가봐요. 온통 피난민 천지야.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농지뿐이 아니고 과수원이며 집이며 자동차며 다 빼앗기고 홀랑 빈 몸으로 쫓겨났다는데요.”
_175쪽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 7월 말이 되었다. 양식은 동이 났고, 시장에서는 곡식을 파는 곳이 없고, 판다고 해도 값이 비싸 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윤식엄마는 텃밭에 심은 야채를 뜯어와 죽을 끓였다. 미끈거리는 진을 뺀, 으깬 아욱과 쌀을 조금 넣고 된장을 푼 죽을 끓이면, 쌀은 희끗희끗 간혹 보이고 아욱만 넝쿨져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후루룩거리며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리고 그것으로는 부족해 엄마를 흘끔거렸다. 며칠 궁리하던 윤식엄마가 영택을 불렀다.
_214쪽
명주는 빨래들을 잔뜩 머리에 이고 오동천으로 갔다. 피범벅이 된 빨래를 맑은 물에 빨아서 바위 위에 쭉 펼쳐 널었다. 빨래들이 햇빛에 소독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멀리 보이는 마산만을 바라보았다. 공업단지인 그곳의 굴뚝들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산청의 집집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떠오르면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이 명주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오동천 맑은 물속에 남편의 얼굴이 있었다. 흐르는 물속에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 위에 희식의 얼굴이 겹쳤다. 그리움에 사무칠 때마다 명주는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명주는 눈을 감고 반야심경을 읊조렸다.
_288쪽
출판사서평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을 치르며 어떻게 한국인이 살아남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소설
『산청』에는 우리 시대가 까마득히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원형적인 삶의 형식과 본질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_방현석 소설가
『산청』은 내가 쓴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다. _‘작가의 말’에서
민윤숙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민윤숙 작가는 이 소설이 자신이 쓴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일생의 역작인 『산청』 속에는 작가가 물려받은 삶과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다. 『산청』은 소설 속 주인공 ‘명주’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혼례를 치르고 남편을 잃는 장면에서부터 출발하여 이후 명주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운명 앞에 무너지고 피해갈 수 없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좌절하며 분투하는 나약하고도 강인한 인간의 모습이 펼쳐진다. 『산청』은 일제시대와 분단, 한국전쟁을 통과하며 살아남은 한 인간의 일대기이자 산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한 집안의 가족사이며 한국의 근현대사이기도 하다. 작가는 질곡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삶을 지키고 가꾸어나가고자 한 ‘명주’를 통해 올곧은 심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거룩한지를 보여준다.
“명주는 열네 살에 청상이 되었다.”
뜻한 바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가꾸어나가는 여정
소설 『산청』은 열네 살 여자아이 명주가 시댁으로부터 신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혼례 후 친정에 머무르고 있던 명주는 그길로 점순과 함께 시댁으로 향하지만 남편 영휘는 병을 이기지 못하여 죽고 명주는 혼자가 된다. 집안어른들이 주선한 혼사였으나 명주는 부모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에 먼저 혼인을 결정했고 영휘를 마음에 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닥친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영휘는 죽기 전 명주에게 “절대 혼자 살 생각”을 하지 말며 “훌훌 털고 일어날 생각”을 하라는 말을 남겼고, 시어른들도 모두 명주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하지만 명주는 영휘의 집에 남기로 결정하며 그들의 가족이 된다. 남편 영휘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시댁에 남는 것을 선택한 명주는 영휘의 동생 영익의 처가 첫아들을 낳자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삼아 키우게 된다. 시아버지 민겸호가 처음 그 아이를 명주의 아들로 삼게 하자고 말하였을 때 명주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받아들인다. 명주는 희식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성심성의껏 기른다. 희식이 자라는 것을 보는 일은 명주가 삶에서 누리게 되는 큰 기쁨이 되기도 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집안에서, 별다른 고난 없이 살아갈 것처럼 보이던 명주의 삶에도 조금씩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개인의 삶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역사와, 남편 없이 혼자 살아가는 여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명주의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작가는 『산청』을 통해 과거 한국사회의 가족상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독자들은 더욱 실감나게 작품에 빠져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해방, 한국전쟁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삶을 뒤흔들어놓는 역사적 사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속에서도 삶은 어떻게 계속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상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운명을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계속 싸우면서 살아간다. 특히 여성으로서 이른 나이에 홀로 되어 세상에 맞서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명주가 감당한 삶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소설 『산청』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으로 떳떳하게 살고자 했던 한 인간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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