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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롯시니 : `코린트의 포위` 서곡 (Rossin : Le siege de Corinthe Overture)

Bawoo 2014. 4. 6. 10:52

롯시니 : '코린트의 포위' 서곡

Rossini : Le siege de Corinthe Overture 

 

 

Rossini- Le siege de Corinthe Overture

Claudio Abbado (cond)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롯시니 : '코린트의 포위' 서곡

Rossini : Le siege de Corinthe Overture 

Gioacchino Rossini(1792 -1868 ) 이탈리아

 

양친의 순회공연(아버지는 뛰어난 호른 주자였으며, 어머니는 소프라노 가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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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훌륭한 경력을 남겼다)을 따라다니면서 자란 그는 이렇다 할 음악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작곡을 할 수 있었으며, 12세 때는 현악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숙함을 보였다. 모짜르트나 하이든의 악보를 읽음으로써 얻게 된 대위법에 대한 지식은 볼로냐의 음악학교 교장 스타니슬라스 마테이 Stanislas Mattei가 뒤에 가르친 것보다도 이미 많은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는 1804년부터 1810년까지 마테이의 강의를 청강했으며, 옛 작곡가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보다 새로운 작가들의 방법도 배웠다.

 

청년기에는 가수로서 나아가서는 가정교사나 극장의 반주자로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며, 쳄발로 이외에도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호른, 첼로를 연주했고 신포니아, 미사곡, 칸타타, 오페라 데메트리오와 폴리비오, 그리고 다양한 기악곡을 작곡하여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는 상당히 진기했던 화성이나 기악 편성을 배려했다. 1810년에는 결혼 어음(베네치아)에 의해서 북부 지방의 가장 좋은 극장들이 그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었으며, 그는 이들 극장을 위하여 극히 짧은 시간에 몇 개의 가벼운 스타일의 곡을 작곡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명성은 베네치아, 페르라라, 나아가서는 밀라노에서 확립되었고(시금석[1812]), 종교적인 오페라 바빌로니아의 키로스에서는 엄격한 스타일에 관해서도 남다른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813년 21세의 그에게 영광이 주어졌다. 부르스키노씨에 이어서 베네치아는 오페라 세리아 탕크레디 및 드라마 지오코소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에 갈채를 보냈으며, 이들 두 작품은 각기 그 장르의 규칙을 새로이 독특하게 만들어 놓았다. 

 

 

몇 차례 실패를 맛본 다음 롯시니는 흥행주 바르바야 Barbaja의 요청에 의해 나폴리로 갔으며, 그곳에서는 예외적인 많은 조건을 그에게 제공했다(더없이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많은 가수들 특히 다비데 Davide, 노차리 Nozzari, 가르시아 Garcia 같

은 테너 가수와 1822년 결혼하기 전까지 그가 쓴 가장 뛰어난 역들을 맡아 했던 이자벨 콜브란 및 유럽풍의 새로운 취향에 친숙해진 청중들).그는 7년 동안 작곡가, 극장장, 지휘자로서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1815년부터는 비극에도 손을 대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와 이듬해의 오텔로에 의해서 더욱 중후함을 더해갔다. 이들 작품은 오페라 세리아의 통상 구조를 현저하게 확대시킨 것이었다. 1816년 로마에서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상연했다. 첫날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인기는 급속히 높아갔다. 1817년에는 신데렐라와 도둑까치를 상연했는데, 이 두 편의 감상적인 극을 가지고 그는 가벼운 장르에서 벗어나 이후에는 비극 장르의 혁신에 심혈을 기울였다. 새로운 유형의 성악을 확립하고, 이집트의 모세(1818)에서 롯시니 이전에는 아무도 하지 못했던 성악적인 서법에 손질을 가함으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한편, 1819년에는 월터 스코트의 작품에서 호수 위의 미녀의 착상을 얻음으로써 낭만주의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프랑스적인 스타일이 요구하는 점과 가수들의 능력이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롯시니는 우선 대폭적으로 마호메트 2세와 이집트의 모세 두 편의 구작을 개작하여 각각 코린트의 포위(1826)와 모세와 파라오(1827)를 내놓았고, 이어서 오리 백작(1828)이 부아엘디외적인 가벼운 스타일로 씌어졌다. 정치적인 오페라 윌리엄 텔(1829)은 뜻하지 못했던 자연에의 감수성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열광적이고 기대를 갖고 있던 관중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대한 프랑스 오페라의 비길 데 없는 전형이 되었다. 이사벨 콜브란과 헤어진 그는 애정어린 보살핌을 아낌없이 해주는 프랑스 여인 올랭프 펠리시에 Olympe Pelissier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1845년 그녀와 재혼했다. 그는 파리를 위하여 다시 음악의 야회(夜會)(1835)나 스타바트 마테르의 판 중의 하나(개정판 초연 1842)를 작곡했는데, 1836년 볼로냐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았으며 1848년에는 피렌체에 정착했다. 롯시니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자 1855년 파리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는데 노년의 과오라는 제목 아래 모은 200편 정도의 갖가지 작품을 썼으며 프랑스의 음악적 생활에서 빛나는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1860년 바그너를 맞아들였는데, 바그너는 롯시니야말로 파리에서 만난 역량있는 유일한 음악가이다라고 인정했었다.

   

롯시니는 쇼세 당탱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야회를 열어 새로운 세대의 프랑스의 연주가나 작곡가들(디에메, 플랑테 Planté, 마티아스 Mathias, 생상 등)을 맞아들였다. 그들은 롯시니가 예견할 수 있었던 이 <바그너 이후의 시대>를 확고히 하게 되었으며, 한편 그의 지도를 받은 여류 성악가들은 그 후 그의 성악에 관한 교육이 불

멸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예언적인 소장엄미사(1863)를 남긴 후 그는 186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파리에 매장되었는데, 매우 영광스럽게도 그의 유해는 피렌체로 옮겨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곁에 잠들어 있다. 그 작품에 있어서 베토벤, 슈베르트, 그리고 베버와 동시대의 사람이면서 그들이 모습을 감출 무렵, 롯시니는 모짜르트의 죽음과 음악에 있어서의 참다운 낭만주의의 개화 사이에서 교향곡, 소나타, 그리고 가곡에 대해서 그 세 사람의 작곡가가 펼쳤던 것과 똑같은 투쟁을 오페라의 영역에서 펼쳤다. 그런데 롯시니의 이미지는 어떤 음악학 특히 프랑스에서 이 1세기 동안이나 이탈리아 오페라를 그 속에 가두어 버린 그 경멸에 가장 많이 괴로워한 모습이었다. 롯시니는 그의 음악극 작품의 미학이 시대의 물결에 밀려난 이후 40년 가까이나 살면서 베르디나 독일 작곡가들의 새로운 작품의 극적 요청에 따라서 양성된 가수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많은 그의 오페라가 상연 레퍼토리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사후에도 서정극의 침입이 왕성해지자 롯시니의 비극작품은 시대에 뒤떨어졌고 극적 흥미가 결여된 보칼리즈 같은 노래가 너무 많다는 식으로 잘못 인식되어 버렸다. 이러한 표현은 지금도 종종 비평 속에서 보이며, 상연 목록에 실려 있는 것은 실제로 그의 작품 중 4분의 1도 안 되는 희극작품(특히 세빌리아의 이발사)이며, 그밖에는 덤으로 모세나 그렇지 않으면 작자 자신이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지나치게 영웅숭배적인 방법으로 상연된 윌리엄 텔이 있을 뿐이다. 1930년부터 롯시니의 엄청난 업적의 중요성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19세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롯시니는 그 미학적 이상이었고, 스탕달 같은 사람(그는 1823년 이래 롯시니의 최초의 전기 작가이다)은 꾸며댄 이야기를 썼으며, 그 모방자들은 그 뒤를 이어서 많은 판단을 왜곡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색채적이고 활기찬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나누면서 극히 서정적이고 종종 화려한 이야기 때문에 레치타티보 세코를 추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즉, 본래의 레시타르 칸탄도 recitar cantando의 정신으로 회기했던 것이다(그에게 수다스런 전하 Signor Vacarmini라든가 작은 독일인 Il Tedeschino이라는 별명을 붙인 같은 시대의 사람이 비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야기를 독창, 2중창 또는 몇 사람의 합창과 유연하게 얽어 놓았으며, 때로는 합창대를 개입시켜 중단하기도 했고 발상이 전혀 새로운 장대한 피날레를 구축했다. 그리고 기분의 움직임을 설명하거나 줄거리의 전개에서 떨어져 나가 하나의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었다. 바흐, 헨델, 글룩, 모짜르트 등이 늘 사용했던 것처럼 고립된 소품 pezzo chiuso의 개념에 충실하려 한 점에서도 성공했다. 또한 그는 늘임표나 악절의 수를 줄이고, 종종 그 자신이 개개의 상황에 적합한 장식의 주요 부분을 썼다. 그리고 카스트라토가 사라진 것을 인정하고 성악적 음역의 단계를 완전히 재구성했다(→노래, 가창). 

 

 

롯시니는 매우 엄격한 구조를 갖춘 오페라의 서곡으로 대표되는 소나타 형식의 완전무결한 소우주를 언급하였으며, 베토벤적인 타입의 오케스트라에 풍부한 표현력을 부여하고(샤브란의 마틸데, 에르미오네 등), 호른이나 클라리넷 같은 낭만파의 악기를 즐겨 사용으며, 낭만파적 주제(호수 위의 미녀), 요정극적인 주제(아르미다) 또는 자유주의적 주제(윌리엄 텔)를 도입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멀뚱박사의 사랑방
글쓴이 : 멀뚱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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