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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 멸망사-"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Bawoo 2014. 5. 27. 23:26

 


  60년대 중고등학생 시절, 만화 그리고 영화에서 본 인디언들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백인들 역마차를 공격하여 백인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등 일방적으로 악인으로 묘사된 인물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악역 인디언이 아파치,코만치 족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시절 이런 만화,영화 때문에 인디언들은 나쁜 인간들이라고 세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만화, 영화들이 백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인디언들을 악인으로 모는  역사 왜곡이었던 것이  인디언 입장을 진실되게 조명하는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작은거인'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함께 춤을'이란 영화들이 제작되면서 밝혀졌고 '인디언은 나쁜 인간들이 아니라 백인에 의한 피해자들'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인디언에 대한 영화 자체가 제작이 안되는 시대인 것 같은데 이 책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얼마나 속절없이 당했는가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기록입니다. 오래전에 한번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기 위하여 아예 책을 구입을 했습니다. 소장하고 대를 이어 물려줘도 될만한 책이라는 판단이 서서입니다.

 

 

아래 글은 각 언론사의 책 소개 글입니다.'moon court'란 블로거님의 책 소개 글에서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미국인디언 멸망사 / 저자 디 브라운 / 역자 최준석 /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인디언이 말하는 서부 개척사!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백인들의 끝없는 탐욕이 일으킨 인디언 학살전쟁에서 마누엘리토, 붉은구름, 검은주전자, 앉은소, 매부리코, 작은까마귀, 조셉, 제로니모 등 진정한 평화주의자이자 자연보호주의자였던 인디언 전사들이 부족들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투쟁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을 통해 과거의 인디언이 어떠했는지 앎으로써 현재의 인디언을 명확히 알고, 대지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사고 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생명과 대지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인디언에게 배워야 할 때!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인디언 기록문학의 걸작

“거의 관심권에서 사라졌던 구전口傳 역사의 자료를 가지고, 나는 될 수 있는 한 희생자인 인디언 자신의 말을 인용해 서부 정복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관한 다른 책을 읽을 때 언제나 서쪽을 바라보던 미국인들은 이 책을 읽을 때 동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_초판 서문에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인디언 기록문학,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진보 지식인들의 무수한 양심선언을 이끌어낸 문제작의 부활!


1860년에서 1890년대까지 서부개척기의 미국은 황금과 마차와 총잡이의 시절이었다. 인디언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그들의 땅으로 들어온 백인들은 황금을 위해 땅을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신은 진정 우리에게 축복을 내렸다. 황금은 여기 우리의 발치에 널려 있어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미군 소령의 말이 당시 백인들의 신념을 대변한다. 땅을 빼앗기 위해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명백한 운명’이란 유럽인과 그 후손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지배민족으로서 당연히 인디언의 땅과 삼림과 광산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도 서류에 백인 식으로 서명을 했다. 백인들이 땅 값으로 건넨 것은 인디언들이 신기해하는 ‘구슬 몇 개’가 전부였다. 그 후 30년간 인디언들의 씨를 말릴 때까지, 백인들은 계속 거짓말로 땅을 차지했고, 꾸준히 백인의 말을 믿었던 인디언들은 결국 멸족당한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백인들의 끝없는 탐욕이 일으킨 인디언 학살전쟁에서 마누엘리토, 붉은구름, 검은주전자, 앉은소, 매부리코, 작은까마귀, 조셉, 제로니모 등 진정한 평화주의자이자 자연보호주의자였던 인디언 전사들이 부족들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투쟁을 다룬 기록문학이다. “백인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지역의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으며 어느 부분도 점유할 수 없다. 또한 인디언의 동의 없이는 이 지역을 통행할 수 없다(1868년 조약)”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수없이 파기된 조약에 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디언의 언어와 구술을 최대한 살려 인디언의 입장에서 서부개척시대를 다시 돌아본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책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가 한국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2002년 저자가 사망한 후 유명한 소설가 햄프턴 사이즈의 헌사가 실린 개정판을 번역했다.
2011년에 돌아보는 ‘운디드니’ 역사 현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만물을 만든 그대로 놓아두지만, 백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강이든 산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버린다”는 네즈페르세족 추장 조셉의 한탄과, 어딜 가나 졸졸 따라다니는 남루한 백인 아이들에게 자기가 번 돈을 거의 다 나눠주면서 왜 백인들이 가난한 동족을 버려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앉은소’가 갸우뚱거리며 “백인들은 뭐든 다 만들어내면서도 그걸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군”이라고 했던 말에 강과 산을 마음대로 바꾸고, 이웃들이 조용히 굶어죽어 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2011년 우리의 모습이 오버랜된다.
햄프턴 사이즈의 말대로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인의 현관 문 앞에 도착한 이 책이 기만과 날조로 점철된 미국의 창조신화를 다시 보게 했다면,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그의 유산은 2011년 한국사회의 가장 뼈아픈 지점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보여준다.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메리카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이 우리에게 건넨 메시지는 여전히 유용하면서도, 더욱 강력해졌다.

추천의 글
한 역사학자가 말했듯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500만 부가 팔렸고 전세계 십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외적인 성공으로 국민들의 정체성에 가해진 고압의 충격을 전부 설명할 순 없다. 그야말로 디 브라운은 회초리를 들었고, 기만과 날조로 점철된 미국 창조신화의 전모가 태양 아래 드러났다.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 현대 환경운동에 불을 지폈다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같은 방식으로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약탈행위의 진상을 일반 대중에게 알렸다. 1970년대 초에 디 브라운은 한 신문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인디언들이 얼마나 많은 백인들을 거듭 되풀이해 믿었던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신뢰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들은 어느 누구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했다.”
혹자는 디 브라운의 책이 수정주의적이라지만, 정말이지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저 낭만적인 무성영화 필름 속의 인디언이 진짜 인디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에 우리는 디 브라운에게 가없는 빚을 졌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껏 그의 유산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다. _햄프턴 사이즈(소설가)

인디언 추장들의 육성
“백인들은 걸핏하면 우리 고유의 생활을 버리고 자기네처럼 살게 만들려고 한다. 농사를 지으라느니, 열심히 일하라느니. 인디언들은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가 백인들에게 인디언처럼 살라고 했더라면 그들도 반발했을 것이다. 왜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가?” (샌티 수우족의 큰독수리)

“내가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일들이 이 땅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백인들은 우리 땅을 가로질러 갔다. …백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핏자국밖에 남은 게 없다.” (오글라라 수우족의 붉은구름)

“나도 하나의 사람일 뿐이다. 나는 부족의 목소리이다. 그들의 마음을 나는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들은 나에게 백인의 권리를 거부한다. 내 피부는 붉지만 심장은 백인과 똑같다.” (모도크족의 킨트푸애시)

“부당한 일을 수없이 당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있다.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 우리는 다시 화친을 맺으려 하고 있다. 나는 친구들의 충고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치욕스러운 심정은 이 땅을 덮고도 남는다. 한때 나는 끝까지 백인의 친구로 남은 유일한 인디언이라고 자부했지만 백인들이 몰려와 우리 처소를 뒤엎고 말과 모든 재산을 빼앗아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백인을 믿기 어렵게 되었다.” (남부 샤이엔족의 검은주전자)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이 우리에 갇혀 아무 데나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고서 만족하기를 바란다면 강물이 거꾸로 흐르기를 바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네즈페르세족의 조셉 추장)

“이 전쟁은 우리 땅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거저 뺏으려 쳐들어온 자들, 이 땅에서 수없이 못된 짓을 저지른 큰아버지의 자식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우리가 바란 것은 다만 내 땅에서 평화롭게 살며 우리 부족의 행복과 안정을 지키는 것뿐이었지만 큰아버지는 우리를 죽이는 것에만 눈이 벌게진 군인들로 이 땅을 가득 채웠다.” (브룰레 수우족의 점박이꼬리)

“오래전에 이 땅은 우리 아버지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강에 가보면 강둑에 미군들의 진지가 보인다. 미군은 내 나무를 자르고 내 들소를 죽이고 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은 터질 것 같다. …백인은 먹지도 않으면서 들짐승을 부질없이 죽일 만큼 철부지가 되었나. 우리 홍인종이 들짐승을 죽일 때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부득이 죽이는 것이다.“ (카이오와족의 사탄타)

“당신들은 집을 지어주고 보건소를 만들어줄 테니 주거지역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원치 않는다. 나는 바람이 거칠 것 없이 불어오고 햇빛을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울타리도 없고 모든 것이 자유롭게 숨 쉬는 곳이다. 벽 안에 갇혀서 죽기보다는 거기서 죽고 싶다.” (얌파리카 코만치족의 열마리곰)

이 책에 쏟아진 언론의 찬사
“이 책만큼 나를 슬프고 수치스럽게 한 책은 없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우리가 진정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번만큼은 깨닫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뉴스위크

이 애타고 가슴 저미는 책을 읽다 보면 정말로 누가 야만인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워싱턴포스트

장엄한 인디언들의 사진이 들어 있는 매혹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기록! -월스트리트저널

독창적이면서 훌륭하다. 심금을 울린다. …손에서 내려놓기 힘들다. -뉴욕타임스

 

 

 

* 인디언들의 피로 물든 美서부개척사 [연합뉴스] 2011.02.22

 

 "내가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일들이 이 땅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백인들은 우리 땅을 가로질러 갔다. (중략) 백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핏자국밖에 남은 게 없다."
오글라라 수우족의 '붉은구름'이라는 인디언이 남긴 말이다.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서부 개척사'는 인디언들에게는 '인디언 멸망사'나 다름없었다.
신간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한겨레출판 펴냄)는 인디언들의 피로 물든 미국 서부 개척사를 기록한 역작이다.

저자인 미국의 논픽션 작가 디 브라운은 백인들의 끝없는 탐욕이 일으킨 인디언 학살 전쟁과 인디언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브라운은 어린 시절 인디언 친구와 서부 영화를 보러 간다.


역마차를 둘러싸고 아귀처럼 달려드는 인디언들. 이때 홀연히 나팔 소리와 함께 먼지를 일으키며 기병대가 나타났다. '좋은' 기병대가 '나쁜' 인디언을 무찌르며 추격전을 벌이자 관객은 환호한다.
그런데 인디언 소년도 덩달아 박수를 친다. 브라운이 "인디언이 죽는데 뭐가 좋아 박수를 치니"라고 물어보자 인디언 소년은 대답한다. "진짜 인디언은 저렇지 않아, 저건 그냥 배우야." 인디언 소년의 이 한마디에 브라운은 깨달았다. 영화나 책에 나오는 인디언은 백인들이 꾸며낸 가짜라는 것을.

'그들(인디언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하다'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인디언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알려준다.

이 책은 1970년 출간된 이후 전 세계 10여 개 언어로 번역돼 500만여 부가 팔려나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에는 2002년에 같은 제목으로 번역 소개됐으며 이번에 출간된 책은 2007년에 나온 영어판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2002년 번역판에 이어 이번에 책을 번역한 최준석 전북대 교수는 2002년 번역판에서의 일부 오역을 수정하고 한글세대를 위해 어려운 한자어 표기를 가능한 한 줄였다고 출판사 측은 밝혔다.

최 교수는 "서부개척사를 뒤집으면 인디언 멸망사가 나타난다"면서 "프런티어 정신(개척 정신)은 백인 입장에서는 모험과 용기 그리고 인내를 의미하는 진취적인

이념이었지만, 당하는 인디언 입장에서는 땅과 목숨을 빼앗아가는 파괴적이고 탐욕적인 정신이었다"고 평가했다.

 

 

*프런티어정신에 묻힌 인디언 멸망사 [한겨레] 2011.02.2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최준석 옮김/한겨레출판·2만원.

 

 담담하게 뜬 눈, 꾹 다문 입술, 튀어나온 광대뼈, 5 대 5 가르마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 목에는 나뭇잎 모양의 동물 뼈가 걸렸고, 손에는 깃털로 만든 지휘봉이 들렸다. 책 표지에 등장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이다. 책을 보기 전 당당하게 보였던 모습이, 읽은 뒤에는 슬픔과 처연함으로 다가온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부제처럼 ‘미국 인디언들의 멸망사’를 다룬다. 수천수만년 전 대륙에 건너와 평화롭게 살아가던 원주민들이 19세기 중후반 불과 수십년 사이 절멸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사라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왜 오랫동안 은폐돼 왔을까?

미국 워싱턴의 도서관 사서이자 소설가였던 지은이 디 브라운은 19세기 후반 미국 서부시대의 개막과 발전을 서술한 수천권의 책과 신문, 문서 등을 주목한다. 그는 이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고 현장을 방문해 가며 당시의 역사를 촘촘히 복원한다. 새로 드러난 역사는 낭만적이고 진취적인, 혹은 미국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런티어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탐욕과 거짓, 협잡이 판치고 무자비한 학살과 도륙이 가해지는 비극이었다. 유럽인들은 ‘명백한 운명’이라는 표현으로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새로운 대륙을 자신들이 다스릴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주민의 땅과 숲은 모두 유럽인들의 것이어야 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원주민들은 거리낌없이 죽여도 괜찮았다. 2002년 출간됐다가 절판된 책을 오자를 없애고 표현을 바꿔 복간했다. 

 *원주민의 생생한 기록 바탕 / 서부 개척사 거꾸로 분석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려있는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 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백인들의 총칼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터를 휩쓸던 19세기, 시애틀 추장의 말이 마치 생명의 경전처럼 들리는 이유가 있다. 땅 위의 것은 살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모두의 것임을 오랜 세월 땅에 발 딛고 서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온 이들이라면 다 알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주 오래된 종족이 살고 있었다. 초크타우, 체로키, 수우, 나바호, 이로키족…. 그들은 '수천 년'을 거기서 살아왔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도 아메리카는 평화로운 삶터였다. 그때 유럽에도 사람은 살았는데, 그들의 유토피아는 아메리카 신대륙이었다. 두 대륙의 사람들은 그러나, 땅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달랐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은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에 불타 있었던 바, '한 손에 총, 한 손에 성경'을 든 청교도들이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무려 1억 명에 달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살육했다.

나바호족의 성지인 미국 서부 캐니언 드 칠리(canyon de chilly)도 황금을 찾아 서쪽의 땅을 탐하던 백인들의 탐욕의 대상이었다. 나바호족은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총과 대포를 당해내지 못해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 고난에 찬 '먼길(Long Walk)'은 595㎞에 달했다.

미국 서부 개척사를 거꾸로 본,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가 다시 출간됐다.

저자가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한 회의기록과 원주민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책은 1970년 나온 뒤 전 세계 10여 개 언어로 번역돼 500만여 부가 팔려나갔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결코 야만적이지 않았다는 것, 대대로 내려오는 삶의 터전을 지혜의 힘으로 지켜내려 했을 뿐이라는 것,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총칼에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 지금 우리가 인류의 문명이라 믿는 것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내용의 기록으로 책은 빼곡하다. 누가 야만인이었는지는 거기서 저절로 드러난다. 여전히 소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변함없이 가슴을 울린다.

국내에는 2002년 같은 제목으로 번역 소개됐는데 이번 출간은 2007년에 나온 영어판 개정판을 새로 번역한 것이다.

최준석 전북대 교수가 지난 2002년 번역판의 일부 오역을 수정하고 한글세대를 위해 어려운 한자어를 최대한 줄였다. 운디드니는 1890년 무참한 학살이 있었던, 인디언의 운명을 결정짓는 '운디드니 사건'의 그곳을 가리킨다. 

 

 

 

 

* 서부개척 역사는 '인디언 학살사' [주간한국] 2011.03.03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2만 원

 

 

각 부족의 생존 위한 투쟁 등 구전 기록문학의 전설 재출간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 네 꼬마 다섯 꼬마 여섯 꼬마 인디언…."

대학 시절 과방에서 '열 꼬마 인디언 보이'(Ten Little Indian Boys)를 불렀다간 즉시 담뱃재가 날아가곤 했다. 사람들이 미국 민요나 동요쯤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노래는 서부개척기에 백인들이 도망치는 인디언 아이들을 죽이며 흥얼거린 노래였으니까.

하지만 히스토리(History)란 단어에서 드러나듯, 역사는 진실이나 정의보다 권력의 편이지 않든가. 아메리카의 희생양 인디언이 오랜 시간, '살인마 인디언 조'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런 편견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디 브라운의 논픽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가 출간되면서부터다.

소설가 햄프턴 사이즈의 헌사를 빌어 소개한다면, 이 책을 관통하는 이념은 명백하고 급진적이다. 앵글로 아메리카인이 서부를 획득했다면 그로 인해 사라진 아파치, 네즈페르세, 유트, 샤이엔, 수우, 나바호족의 입장은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책은 이 문제 제기에서 시작한다.

풍부한 1차 사료에 의거한 이 책은 1970년 첫 출간 이후 전 세계 500만 부 이상 팔리며 출판계 관심권에서 사라졌던 구전 기록문학의 전설이 됐다. 2002년 국내 번역, 출간됐던 이 책이 지난주 재출간됐다.

저자는 인디언 구술 기록을 토대로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400년간 백인이 원주민인 인디언에 가했던 학살을 복원한다. 인디언 인터뷰와 재판기록, 조약회담 기록, 회의록의 인용, 재구성을 통해 다시 본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 즉 서부개척의 역사는 다름 아닌 '인디언 학살사'다.

책은 19 장으로 나뉘어 각 부족의 전투와 생존을 위한 투쟁들, 그들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난 이야기들을 펼친다. 그리고 매 장은 인디언들의 죽음과 초토화된 땅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제로니모, 마누엘리토, 붉은구름, 검은주전자, 앉은소, 매부리코, 작은까마귀 등 전설적인 인디언 영웅들의 최후도 낱낱이 기록된다.

"내가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일들이 이 땅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백인들은 우리 땅을 가로질러 갔다… 백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핏자국밖에 남은 게 없다."

오글라라 수오족의 추장 붉은구름의 말은 서부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백인의 약탈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백인과 싸우겠다고 나선 인디언들은 사냥을 할 때 쓰던 조악한 무기를 들었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이유 없이 굶주린 채 죽어갔고, 또 그 땅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사살됐다.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

제목에 적힌 '운디드니'는 미국 사우스 다코타주 섀넌 카운티에 있는 곳이다. '부상당한 무릎'(운디드 니: Wounded Knee)에서 전쟁이 끝나자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추장인 큰발과 부족민의 주검은 추위에 얼어붙어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구상의 한 종족이 사라져가던 학살의 현장. 운디드니는 그런 슬픈 기억의 장소다. 인디언 기록문학의 걸작으로 꼽힌 이 책은 미국 서부개척사의 인식을 바꾸었다.

 

 

 

 

* 인디언 멸망시킨 미국의 야만성 [주간경향] 2011.03.10

 

 "나는 땅이 내 것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땅을 만든 창조주만이 땅을 처분할 권리가 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내 땅에는 내가 살 권리가 있고 당신네 땅에는 당신이 살 특권이 있다는 것이다.” - 네즈페르세족의 추장

1860~1890년 사이 서부개척시대 미국의 역사는 이 정당한 주장을 거꾸로 해석한 역사다. ‘내 땅에는 내가 살 권리가 있고, 당신네 땅에도 내가 살 특권이 있다.’ 한 인디언은 말한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을 했고, 우리의 땅을 먹었다.” 미국인들은 이 ‘약속’을 집요하고 잔인하게 지켰다.

1834년 6월 30일 미 연방의회는 ‘인디언과의 교역과 접촉 규제 및 변경 평화 유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조례에 따라 미시시피강 서쪽지역이 인디언 주거지역으로 설정됐고, 백인들은 허가 없이는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결정은 독립 이후 인디언들과 오랜 무력분쟁을 겪은 미국 정부가 내놓은 화평책이었다. 미국인들은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약속들을 했다. 1851년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수우족, 크로우족 등 인디언 부족 추장들이 콜로라도주 덴버 지역에서 백인들과 한 약속도 그 중 하나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인디언 지역에 길을 내고 초소를 내는 데 동의했다. 인근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백인들은 수천명씩 이 지역으로 몰려왔다. 밀려든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들소 사냥터를 잠식했다. 군대는 명목상으로는 백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됐지만, 실제 목적은 인디언들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미군은 먼저 도발하고, 그 도발에 항의해 인디언들이 반격하면 이를 빌미로 삼아 몰살작전을 전개했다.

“그들은 여섯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에게 막대기에 묶은 백기를 들려 보냈다. 그 소녀는 몇 발짝도 가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었다…. 내가 본 죽은 사람은 모두 머리가죽이 벗겨져 있었으며 한 임신한 여자는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태아가 옆구리에 놓여 있었다.” 1860년 무렵 미군이 샌드 크리크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샤이엔족을 급습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이다.

샌드 크리크 지역 샤이엔족들에게 일어난 일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담겨 있는 백인 침탈의 역사 중 일부에 불과하다. 수우족, 나바호족, 아파치족, 카이오와족, 코만치족, 유트족, 제로니모족 등 미국 서부지역의 모든 인디언 부족들이 샤이엔족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1890년 12월 수우족 인디언 150여명이 미 7기병대에 의해 사망한 운디드니 샛강 학살을 마지막으로 서부개척시대 인디언과 백인의 전투는 막을 내린다. 미국인들이 ‘프런티어 정신’이라며 미화한 서부 개척의 실상은 책의 부제 그대로 ‘인디언 멸망사’였다. 책은 그 참담한 기록을 통해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지 묻는다. 지난 2002년 출간됐다 절판된 책을 복간했다.

 

 

* 다시 부활한 인디언 기록문학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디 브라운/한겨레출판/591쪽/20,000) [민중의 소리] 2011.03.14

   생명과 대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다

 

 "한 역사학자가 말했듯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500만 부가 팔렸고 전 세계 십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외적인 성공으로 국민들의 정체성에 가해진 고압의 충격을 전부 설명할 순 없다. 그야말로 디 브라운은 회초리를 들었고, 기만과 날조로 점철된 미국 창조신화의 전모가 태양 아래 드러났다. (중간 생략) 혹자는 디 브라운의 책이 수정주의적이라지만, 정말이지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저 낭만적인 무성영화 필름 속의 인디언이 진짜 인디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에 우리는 디 브라운에게 가없는 빚을 졌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껏 그의 유산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다." _햄프턴 사이즈(소설가) 추천의 글 중에서

백인들이 끝없는 탐욕이 일으킨 인디언 학살전쟁에서 수많은 인디언 전사들이 부족들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투쟁을 다룬 기록문학,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가 새롭게 태어났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인디언의 언어와 구술을 최대한 살려 인디언의 입장에서 서부개척시대를 다시 돌아본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02년 저자 디 브라운이 사망한 후 유명한 소설가 햄프턴 사이즈의 헌사가 실린 개정판이 나왔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번역의 권위자 최준석 교수는 전작에서의 일부 오역을 수정했고, 특히 이십대 젊은 세대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려운 한자어 표기를 가능한 줄였다.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메리카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이 우리들에게 건네는 메세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 백인 말발굽에 밟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만가(挽歌)/ 백영옥 시인 [조선일보] 2011.03.27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어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서로의 피를 나눠 마시면서 우정을 확인한다고 한다. 거기엔 그들만의 특별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피를 되새기며 핏줄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세례 의식. 피의 역사성은 사뭇 섬뜩하고 애잔하다. 특수한 집단의 피가 한꺼번에 번져 넘쳐날 때 역사의 굴곡은 더욱 절박해진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백인들의 말발굽 먼지 속에 파묻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핏빛 만가집이다.

“내가 본 죽은 사람은 모두 머리 가죽이 벗겨져 있었으며 한 임신한 여자는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태아가 옆구리에 놓여 있었다. 솔 대위는 뒤에 태아가 맞다고 했다. 흰영양의 시체는 성기가 잘려 있었다. 나는 한 미군이 그걸 가지고 담배쌈지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성기가 잘려 있는 여자도 있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후 고문, 살인, 전쟁 등 악을 축적하는 기술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게임 같은 전쟁, 칼로 목을 치는 대신 전파로 보이지 않는 혈관을 끊는 식의 변형. 그 표면은 점점 미니멀해졌고, 잔혹함은 현대성을 띠며 점점 무색, 무취해져갔다. 그러나 가장 원형적인 공포는 짓이겨진 피를 요구한다. 전쟁이 끝난 후 승리자는 반드시 지상에 내려와 이미 죽은 여자와 아이의 내장을 저미는 만행을 감행한다. 더 많은 피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샤이엔족 전투 묘사는 그러므로 읽는 이에게 분명한 의사(擬似) 통증을 동반한다. 더구나 그것이 아직 폭력의 상처가 남아 있는 우리 현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늑대와 춤을’ 같은 영화에서나 느꼈을 법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표면적 이해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나아가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의 쾌적함 뒤에 얼마나 땀 냄새나는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으로 사육된 현대판 동물농장의 현실이 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한때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사람의 머리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고, 닥치는 대로 백인 여자를 강간하는 인간백정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침략자들이 욕망의 오물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살포한 엄청난 양의 탈취제의 잔향이었다.

작은 갈까마귀(아라파호족 추장), 붉은 구름, 말을 두려워하는 젊은이, 앉은 소, 흰말, 차는 새, 외로운 늑대, 무딘 칼…. 한 생명의 정체성은 첫 울음과 함께 부여되는 이름과 함께 호흡한다. 그들은 대지와 물과 바람의 자식들이었다. 널려 있는 꽃과 풀에서 신성한 치유의 신을 발견했고, 바람의 습기와 떠도는 구름으로 날씨를 예측했다. 그들은 자연의 모든 것에 생명이 깃들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3인칭이 아닌 2인칭, 즉 ‘그대’라 불렀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만 들소를 사냥했고, 들소를 죽였을 때는 진정 ‘그대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이와 여자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평화의 전사들, 그들은 백인들의 화친조약을 기꺼이 믿고 따랐다. 그 결과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황폐한 불모지로 쫓겨나 자연과 호흡하던 그때의 향수에 시달리며 죽어가야 했다. 운디드니에서의 마지막 광란의 학살이 끝났을 때 35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중 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대부분 동료 미군의 총알이나 기관총의 유탄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지금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다시 읽는 것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파괴되고 부서진 현대적인 도시를 바라보는 두려움이, 인간에 의해 파괴된 과거 한 부족의 멸망사를 보는 것만큼 무섭고 떨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파괴의, 파괴의, 파괴의 도미노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언젠가 내 무릎 바로 앞까지 도달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선의 기술보다 악의 기술이 훨씬 더 빨리 축적된다는 어느 고문 기술자의 말, 안타까움이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을 자꾸 떨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