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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Bawoo 2014. 6. 2. 22:02

요즘 정도전이란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 뉴스조차도 안 볼 정도로 티비와는 거리를 둔 생활이라 내용은 잘 모르지만 사실과 허구가 적당히 조합이 된  웰메이드 드라마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각설, 이 책은 읽은지가 꽤 됐습니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절판 된 책을 다시 출간한 것 같은데 도서관

서가에 꽃혀 있기는 역시 오래 됐지요. 아마도 책이 많이 낡아 있을겁니다.ㅎㅎ

이 책을 관심을 갖고 읽게 된 동기는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소장 사학자들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교양 수준의 책을 많이 써내서 읽을거리가 풍부해 진 이유도 있습니다.

신권주의를 주장하다 왕권주의를 주장한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 과연 전문학자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가 궁금했었습니다. 읽은지가 오래되어 책 제목, 읽어야 할 책이라는 기억만 남아 있는데

왕조 국가가 다 그렇듯이 조선왕조도 세종 이후에는 결국은 신권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삼봉선생은 안 죽어도 될 목숨이었는데 시대를 잘못 만나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되나요? ㅎㅎ 아무튼 일독을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저는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다른 분의 책 소개 글입니다. 검색해서 모셔왔는데 출처를 깜빡했습니다.  블로그에 실린 내용을 제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했을 것입니다. 워낙 많은 분들이 알찬  책 소개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써놓으셨네요. 그 중의 한 글이라 생각하시고  읽어보시면 많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 아래 책 소개 글 -

 

이 책은 고려 말기 정도전이 등장할 때부터 정도전이 사망할 때까지 연대순으로 기록됐다. '정도전은 비굴했나' '천민의 피' '삼봉의 신원을

 위하여' '일면 사대, 일면 자주의 삼봉식 외교론' 등 목차에서 역사속 삼봉의 모습과 이에 대한 지은이의 반박이 느껴진다. 저자는 당시의

시대상과 태조실록와 태종실록의 비교, 명의 외교문서 을 통해 정도전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지은이의 고찰속에서 정도전은 조선조 최대의 개혁정치가로 거듭난다. 토지국유제를 주장했던 진보정치인이자, 당대 사대부의 허위의식을

꼬집고 농부를 '은둔군자'로 칭송했던 민본주의자였다. 노비의 신분해방을 주도했고, 말업으로 천시받던 상공업 장려정책을 실시했던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원명교체기의 시대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해 무주공산이던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뛰어난 외교가이자, 고려조의 국교였던 불교를 가장 앞장서 비판해, 새로운 사상의 기틀을 닦았던 혁명적인 사상가였다. 또한 '충(忠)' 대신 '정(正)'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왕권중심주의를 견제했다.

 

21세때 당시 개혁군주로 인기가 높던 공민왕의 일탈행위를 폭군의 비행에 비겨 신랄하게 꼬집었던 대단한 배포를 가진 선비였으며, 병법과

궁중음악, 헌법, 철학, 종교, 경제, 역사, 지방행정 등에 통달했던 대단한 천재였음도 드러난다.

 

조선의 헌법전 초안인 '조선경국전', 역사책 '고려사', 불교비판서 '불씨잡변'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이후 조선의 헌법전인 '경국대전'의 기초가 된 것으로, 조선왕조가 그의 손에 의해 기획됐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건축과 수도 한양도 바로

그의 작품이다.

 

조유식은 고려왕조를 끝까지 지켰던 정몽주가 태종대에 바로 복권되고 공신칭호까지 내려지는 반면, 자신은 역적으로 몰렸던 사례속에서 왜 정도전이 부정적으로 그려졌는지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왕권강화를 추구했던 이방원에게 왕권주의를 부정했던 정도전보다는 고려왕조에

대한 정절을 지켰던 정몽주가 훨씬 이익이었다는 설명이다.

 

고려와 조선왕조의 정권교체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왕조교체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고려건국세력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뛰어났는지가 책 곳곳에서 상세히 기술된다. 흔히 정절의 상징으로 숭상받는 정몽주 또한 고려의 재상으로서 치밀한 정치가였음이 드러난다.

 

그 또한 혁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몰래 암살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30년 동안 가장 가까웠던 동지이자 친구에게도 살해 명령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가장 위험한 것이 하나만 보고 열을 안다고 확신하는 것이라 했다.

 

비록, 정도전이 조선왕조 내내 복권되지 못했던 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진은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고, 손자 문형은 세조 때 우의정, 그 아들 숙지는 이조참판, 그 손자 원준은 성종의 사위가 되었다. 본인은 만고역적이었지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은 조선왕조의

관용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또한 사대부 집안에서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상속했으며, 국가시험에서 서얼출신을 차별하지 않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치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벤트 정치,

가장 친했던 친구와 스승조차에게도 칼을 겨누는 냉혹함, 인신비방이 난무하는 추악한 모습 등. 이러한 모습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정도전을 변명한다.

 

이색을 죽이려 하지 않는 정도전은 정도전일 수 없고, 정도전을 죽이려 하지 않는 정몽주 역시 정몽주일 수 없다. 그러한 정도전과 정몽주라면 비록 사제의리와 우정은 지켰을지 몰라도 역사발전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정도전과 정몽주 같은 인간형, 역사는 그들처럼 정치적 선이 분명한 사람들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역사와 개인적 의리 사이에서 저자는 역사를 선택한 인간을 옹호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역사적 발전을 선택한 이를 역사는 평가하지만, 문학작품속에서는 개인적 의리를 지킨 이가 보다 낭만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큰 꿈을 품었던 정도전만큼 행복한 이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 이후 다시 한 번 고토회복의 꿈을

꾸었고, 요순시대 이후 존재하지 않았던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그에게 일신의 안위는 너무나 하찮게 보이지 않았을까.

 

천하를 얻는 꿈을 꾸고 결국 꿈을 이루다-정도전 연보

 

1342 충혜왕 복위 3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남

15세 1357 공민왕 6 이색의 문하에 들어감

21세 1363 공민왕 12 충주 사록(정8품)으로 첫 벼슬길에 오름

24세 1365 공민왕 15 부모상으로 3년간 여막살이

28세 1370 공민왕 19 성균관 박사(정7품)에 임명됨

33세 1375 우왕 1 친원정책을 반대하다 유배됨

41세 1383 우왕 9 함주막사의 이성계를 찾아가 역성혁명을 결의함

46세 1388 우왕 14 밀직부사(정3품) 전제개혁운동 시작함

49세 1391 공양와 2 봉화로 유배됨 과전법 반포됨

50세 1392 태조 1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 창업함

51세 1393 태조 2 종1품 삼사판사에 임명됨

52세 1394 태조 3 조선경국전 완성함. 경상 전라 양광 3도 도총제사에 임명됨

53세 1396 태조 4 고려사 37권 및 경제문감 완성

54세 1396 태조 5 삼사판사에서 물러나고 봉화백으로 봉해짐

56세 1398 태조 7 8월 26일 왕자의 난. 이방원에게 참수당함

 

 1383년 정도전은 동북면도지휘사(지금의 함경도)로 있긴 했지만 사실상 지방호족과 다름없던 이성계를 찾는다. 이 운명적 만남은 9년 뒤인 1392년, 조선 개국이라는 실로 엄청난 결실을 맺는다. 덕장 이성계와 천재적 참모 정도전의 환상적 콤비는 한나라의 왕과 재상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데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정벌을 가다 말고 칼날의 방향을 고려로 돌린 이성계를 욕하는 사학자와 국사

선생님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자.

명태조 주원장은 자신의 사후, 자식과 손자의 보위를 위해 1차적으로 3만명, 약 만 오천 명의 신하를 죽였을 정도로 잔혹한 군주였다. 그런

주원장이 이성계와 정도전이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훈련하고 요동으로 스파이를 파견하고 요동의 여진족을 회유하여 조선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등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의지는 확고했고 이성계는 이런 정도전을 초지일관 지지했다. 저자는 "지난날 외이(外夷)로서 중원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던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고의 원도 외이요 조선도 외이인데, 그들이 이룬 일을 조선이라고 못 이룰 바 있느냐"는 요동출병에 대한 변을

인용하고 있다. 또 저자는 "정도전의 생각은 가히 '화이동일론'이라 평할 만하다. 조선이 중국에 꿀릴 것이 무엇이며, 조선이라고 중원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라는 법이 있느냐는 이 담대한 주장은 조선사 500년에 빛나는 독보적인 자주사상이다'라는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야망으로 가득했던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야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면서 가슴은 따뜻한 인물로도 소개되고 있다. <불씨잡변>을 통해 유교를 국가의 기틀을 잡는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여기엔 교조적 원칙보다는 애민사상과 지식인(정치인)들의 수신(修身)에 무게가 실려있다. 정권을 잡은 이후 지금의 광화문 근처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집을 소유하고 일신이 평안해졌으나 그런 물질적 풍족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때 광개토대왕 이후 잃었던 우리땅을 되찾자는 고토(故土)회복의 일환으로 명과 이방원 일파의 대내외적 협공에도 굴하지 않고 요동정벌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조존(操存), 성찰(省察) 두 가지에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에 담긴 성현의 참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소. 삼십 년 긴 세월 온갖 고난 다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功業) 송현 정자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삼봉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詩)로 저자는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칼을 맞기 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도전이 죽은 지 8일만에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다.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폐서인까지 된지 오백 년 만인 대원군 때 신원됐고, 조선시대 인물들 중 정도전을 위인으로 인정한 인물은 영조와

정조, 그리고 대원군 뿐이라고 한다. '만고의 역적이자 간신'으로 정도전을 규정한 인물은 노론 영수 송시열이었다고.

저자는 이렇게 책을 맺고 있다.

'정도전이 죽은 다음 해 명에서는 주원장의 손자인 2대 황제 혜제와 혜제의 삼촌 연왕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중략… 1399년부터 시작된 내전은 3년의 세월을 끌며 명 조정을 마비시키다가 1402년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연왕이 조카 혜제를 죽이고 3대 영락제로 즉위하고서야 끝을 맺었다. 정도전이 조금만 더 버티고 살아 있었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이 살아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전세계에 차이나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그들은 코리언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재 출간된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