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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 선생 시 모음(1)

Bawoo 2014. 7. 9. 23:20

              

                                                         돌위로 흐르는 샘물

 

 

 

琴曲雖誇妙手彈(금곡수과묘수탄) :   거문고가 비록 뛰어난 연주를 자랑 하더라도

遠輸雲底響珊珊(원수운저향산산) :   멀리 구름 아래로 실어가 울림은 산히 흩어진다

靜無纖垢侵金鏡(정무섬구침금경) :   고요하여 거울에 끼는 가는 때 하나 없어서

時有輕颸觸玉盤(시유경시촉옥반) :   때때로 가볍고 빠른 물살 옥 소반에 밀려온다

嗚咽張良言未用(오열장량언미용) :   오열하는 물 소리 장량의 말이 필요없고

潺湲孫楚枕應寒(잔원손초침응한) :   잔잔히 흐르는 물에 손초의 베개도 차가우리라

尋思堪惜淸冷色(심사감석청냉색) :   생각하니 아까워라, 저 맑고 차가운 물빛

流入滄溟便一般(유입창명편일반) :   넓은 바다로 흘러들면 마찬가지가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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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曉閒望(춘효한망) -봄날 새벽에 한가히 바라보다

 

山面嬾雲風惱散(산면란운풍뇌산) : 산 얼굴에 나른한 구름 바람이 괴로이 흩어버리고

岸頭頑雪日欺銷(안두완설일기소) : 언덕 머리의 완악한 눈을 해가 업신여겨 녹이는구나

獨吟光景情何限(독음광경정하한) : 혼자 읊는 경치가 어찌 내 마음을 막을까

猶賴沙鷗伴寂寥(유뢰사구반적요) : 오히려 백사장 갈매기 의지하여 고독과 친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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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汀(사정) - 백사장

 

 

遠看還似雪花飛(원간환사설화비) :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발이 날리는 듯

弱質由來不自持(약질유내부자지) : 약질이라 언제나 제 몸도 가누지 못하네

聚散只憑潮浪簸(취산지빙조낭파) : 모이고 흩어짐은 밀물에 맡기고

高低況被海風吹(고저황피해풍취) : 높고 낮음은 바닷바람 부는데 달렸어라

煙籠靜練人行絶(연농정련인항절) : 안개가 비단같이 퍼지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日射凝霜鶴步遲(일사응상학보지) : 햇살이 서리에 비친 듯 학의 걸음 더디네

別恨滿懷吟到夜(별한만회음도야) : 떠나는 심정 섭섭하여 밤 늦도록 읊조리는데

那堪又値月圓時(나감우치월원시) : 또 다시 달마져 둥그니 어찌 견딜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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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葉樹(홍엽수) - 단풍나무

 

白雲巖畔立仙妹(백운암반립선매) : 흰 구름 낀 바위가에 선녀가 서있고

一簇煙蘿倚畵圖(일족연라의화도) : 한 줄기 안개 속 댕댕이 그림에 기대어 있다

麗色也知禦世有(여색야지어세유) : 고운 빛 세상의 존재들을 막아낼 줄 알고

閒情長得似君無(한정장득사군무) : 한적한 정은 그대 만한 것이 길이 없을 것이다

宿糚含露疑垂泣(숙장함로의수읍) : 묵은 화장, 머금은 이슬은 눈물을 흘린 듯하고

醉態迎風欲待扶(취태영풍욕대부) : 바람 맞은 취한 모습 부축받기 기다리는 듯하다

吟對寒林却惆愴(음대한림각추창) : 시를 읊으며 차가운 숲 바라보니 쓸쓸하기만 한데

山中猶自辨榮枯(산중유자변영고) : 산중에서는 아직도 저절로 영고성쇠 분별하는구나.

 
최치원(崔致遠)저작자 표시비영리

857(문성왕 19)~ ?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아버지는 견일(肩逸)로 숭복사(崇福寺)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本彼部)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皇龍寺)와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 하고, 5두품이나 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왕에게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다.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뒤 동도(東都:洛陽)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雜詩賦〉 30수 1권 등을 지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5권으로 엮어졌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大崇福寺碑銘〉·〈진감국사비명 眞鑑國師碑銘〉 등을 지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대(下代)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889년(진성왕 3) 재정이 궁핍하여 주군(州郡)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賀正使)로 임명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다. 그뒤 다시 입조사(入朝使)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嘉納)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讓位)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 讓位表〉와 효공왕의 〈사사위표 謝嗣位表〉를 찬술하기도 했다.

 

그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涼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모형(母兄)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지었고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鷄林)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의 가작(假作)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禪師)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다(→ 색인 : 신라의 불교). 특히 〈봉암사지증대사비문 鳳巖寺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 선종사(禪宗史)를 3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 鸞郞碑序〉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羅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 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朗慧和尙)·지증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 四山碑銘〉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사산비명〉·〈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자료 출처: 시-'카페 '한시 속으로'/선생 약력-'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