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골짜기
가슴 수북이 가랑잎 쌓이고
며칠 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 둔 씨앗 몇개의 화두(話頭)
푹푹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 깊이 어두워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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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밤 깊어
길은 벌써 끊어졌는데
차마 닫아 걸지 못하고
그대에게 열어 둔
외진 마음의 문 한 쪽
헛된 기약 하나
까마득한 별빛처럼 걸어둔 채
삼경 지나도록
등불 끄지 못하고
홀로 바람에 덜컹대고 있는
저 스산한 마음의 문 한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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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사과
못나고 흠집 난 사과만 두세 광주리 담아놓고
그 사과만큼이나 못난 아낙네는 난전에 앉아 있다
지나가던 못난 지게꾼은 잠시 머뭇거리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 짜리 한 장 꺼낸다
파는 장사치도 팔리는 사과도 사는 손님도
모두 똑같이 못나서 실은 아무도 못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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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밭
햇볕이 넘실넘실
사방 팔방 날아온
오만 가지 풀씨
멋대로 자란 풀밭
아무도 돌보지 않은 공터
큰 나무 한 그루 없어
오히려 싱그런 풀꽃들이
자유로이 풍요로이
열린 하늘 아래 넘실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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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차가운 하늘
길은 모두 눈 속에 묻혔고
마을의 마지막 등불도 꺼져
다시 깊고 깊은 겨울이다
바람에 덜컹대는 사립문을 닫아 걸고
한밤내 물결치는 대숲 소리 들으며
가슴 속 무딘 칼 한 자루
푸른 댓잎처럼 벼려
버히리라 저 운수행각 지나온 길
구름처럼 풀어버리지 못한
세간의 꿈도 헛된 인연도
그리고 언 땅처럼 침묵하리라
조향미(1961~ ) 시인
1984년 《전망》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2006) 등이 있음
<자료 출처: 시-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 프로필 및 이미지 - 검색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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