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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Gérard David

Bawoo 2014. 8. 15. 23:31

다비트 Gérard David
[Netherlandish Northern Renaissance Painter, ca.1460-1523]



 


Altarpiece of St Michael, central panel
Oil on wood, 66 x 53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제라르 다비트 [Gerard David, 1460?~1523.8.13]

1.플랑드르의 화가. 만기(晩期) 브뤼헤파의 중심적 존재로서 조화 있는 색채와 세밀한 사실표현으로 온화하고 시적인 정취를 계승하였다. 극적인 종교적 주제를 배경으로 한 장중하고 잔잔한 풍경묘사는 자유롭고 넓은 공간을 신선하게 표현하였다.

북(北)네덜란드의 아우데와테르 출생. 하를럼에서 자랐으나 1484년 이후 브뤼헤에서 활동하였고, 1501년에 화가조합장이 되었다. 메물링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사후에는 만기(晩期) 브뤼헤파의 중심적 존재로서 조화 있는 색채와 세밀한 사실표현으로 온화하고 시적인 정취를 계승하였다. 만년에는 안트베르펜에 거주하면서 이 고장의 신흥 화파의 경향을 반영한 작풍을 나타내었다. 극적인 종교적 주제를 배경으로 한 장중하고 잔잔한 풍경묘사는 자유롭고 넓은 공간을 신선하게 표현하였다. 하를럼에서 사망하였다. <네이버 백과>


2.네덜란드 태생 플랑드르 화가 제라르 다비트Gerard David(1460년경~1523)는 고우다 근교 오우데바테르Oudewater에서 태어났고 하를렘에서 게르트겐으로부터 회화를 수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브루게에 정착한 건 1484년이었다.
한스 멤링이 1494년에 타계하자 그가 브루게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위대한 화가들의 시대였던 15세기가 종료되자 브루게의 경제적 중요성도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1500~25년경 브루게는 여전히 미술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약간 작품성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많은 회화 작품이 스페인에 수출되었다.

다비트의 구도는 다른 화가들에게 모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기 그리스도에게 음식을 먹이는 동정녀 The Virgin Feeding the Christ Child with Porridge>의 경우 모사품이 네 점이나 된다. 이런 인기는 그가 그리스도 생애의 각 장면을 가정적이면서 친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다비트의 초기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1498년에 제작한 두쪽 패널화 <캄비세스의 심판 The Judgement of Cambyses-아래 그림 참조>이다. 이 작품은 잔혹한 소재를 천진난만하게 묘사한 것으로 화면 가득 배치된 인물들의 모습은 정밀하게 묘사된 배경의 건축물과 더불어 조화를 이룬다. 르네상스풍의 세부 묘사가 두드러진 1507년에 제작한 세쪽 제단화 <그리스도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는 세 폭의 패널로 된 전체 구도를 통일감 있게 처리해 다비트의 역랑을 시위한다.

이 작품은 나무와 바위가 흩어진 풍경을 중경에 배치하고 세례장면에 입회한 기증자들과 그들의 수호성인을 전경에 배치함으로써 완벽한 조화를 꾀했다. 그는 동시대 화가인 안트베르펜의 퀸텐 메치즈와 마찬가지로 반 에이크 그리고 반 데르 베이덴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구했다.

그렇지만 다비트는 메치즈에 비하면 독창적이지 못했으며, 구도에서도 그에 비해 자유롭지 못했고, 인물들은 거칠고 경직되었으며, 색채는 말년으로 갈수록 온화함을 잃어 갔다. 그러나 풍경 묘사에는 뛰어나 구도는 전통 형식을 따랐더라도 빛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창작을 부여했다. 그의 양식은 추종자 아드리앤 이센브란트Adriaen Ysenbrandt와 벤손에 의해 16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 캄비세스의 심판


네델란드 초기 르네상스 화가 “게라르트 다비트”가 그린 명화 《캄비세스 왕의 심판》이다.
영화 [텔 미 썸싱]에도 나와 영화의 주요 복선임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마치 해부학 교실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사형대에서 역사상 가장 잔혹했다고 알려진 생피박리형(사람의 껍질을 벗기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진행하고 있는 그림이다.
사형대에 누운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끔찍한 죄를 지었기에 이런 잔혹한 벌을 받고 있을까?
이 그림의 배경은 이렇다.
사형대에서 자기의 살갖이 산체로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재판관이다. 이렇게 벗겨진 살갖은 가죽으로 만들어져 다음 재판관이 앉을 의자에 씌워진다.
이 가죽이 씌원진 의자에 앉을 다음 재판관은 의자에 앉을 때마다 이 가죽의 주인이 지은 죄를 상기하리라.
인간의 가장 바깥인 껍데기를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껍데기를 벗겨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 였을것이다.
또 다시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 말라는 국민의 뜻인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잔인한 것은 벌은 받은 재판관의 아들을 다음 재판관으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죽을 씌운 의자에 앉은 고통은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이 재판관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받았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이다.
네델란드에서는 부정부패를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악성 종양으로 여기고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이런 형벌을 만들었고, 그런 역사는 네델란드를 오늘날 까지 부정부패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 출처: 카페 '아름다운 미술관' 및 검색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