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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의 글로벌 인사이트 Global Insights] 중국과 세계질서 그리고 우리

Bawoo 2014. 9. 1. 09:38

며칠 쉬는 동안 최근에 발간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편집·번역본을 읽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1780년에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사절단의 일원으로 당시 청나라 수도였던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거쳐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지금의 청더)에 이르는 긴 여정에 관해 적은 여행기이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사상을 지녔던 연암의 눈에 비친 당시 중국의 풍물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많다. 특히 중국 황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정사 이하 하인을 포함한 74명의 인원과 말 55필이 동원된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야만 했던 당시의 중·한 관계를 보며 앞으로의 한·중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연암은 “길에서 보니 사방으로부터 공물을 바치는 수레가 만 대는 될 것 같다”고 했다. 이것은 많은 나라의 사절단이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앞다투어 험준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하에 몰려드는 광경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의 일면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아편전쟁(1840~42) 이전까지의 중국은 외교나 국제무역은 중국을 상전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다른 나라들은 세계의 중심국인 중국(Middle Kingdom)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중국을 받들고 조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이것이 바로 과거 오랜 기간 유지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였고 주변국과 다른 나라를 보는 중국의 시각이었다. 이러한 세계질서는 아편전쟁 이후 깨졌고, 중국도 다른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외교와 국제무역을 해야 하는 자존심 상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모’를 겪은 중국이 이제 막강해진 경제력과 살아난 자신감으로 스스로 원하는 세계질서 창출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중국 정부가 추진하기 시작한 위안화의 세계기축통화화 시책과 신개발은행(ND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설립 노력은 이러한 의지를 구체화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중국 정부도 새로운 세계질서 창출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안화의 세계기축통화화 노력만 해도 그렇다. 미국 달러화가 영국의 파운드화를 제치고 세계 제1의 기축통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미국 경제가 영국을 추월한 1872년 이후 5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 특유의 인내력으로 이러한 모든 노력을 앞으로 꾸준히 추진할 것이다.

 중국 경제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빠른 속도의 성장세를 유지하게 될 것이며, 더욱 막강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은 앞으로 세계질서 재편에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 올해 중에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미국의 GDP를 앞설 것으로 세계은행은 내다보고 있다. 시장환율로 추산한 GDP도 앞으로 10년 전후에 미국을 추월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장 추세(연 7~8%)가 유지된다면 이미 거대한 중국 경제는 매 9~10년마다 두 배씩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주변 여건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우선 우리는 현재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세계 경제질서 재편 관련 노력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거부할 필요는 없다. 위안화의 세계기축통화화나 AIIB 창설 노력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다만 우리의 참여는 기존 세계 경제질서와 제도의 대안으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이를 보완 내지 개선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강대국 주변 작은 나라의 자국 정책 결정이 강대국 눈치에 좌우되는 소위 ‘핀란드화’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펼쳐야 한다. 미국과 일본을 위시한 주요 우방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함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이에 더해 개방과 자율 그리고 기업 차원의 선택과 집중으로 중국을 앞서가는 질의 경제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소프트 파워 신장을 위해 문화·예술·교육 분야에도 우리 국민의 창의력이 최대한 살아날 수 있도록 자율과 개방에 기초한 경쟁체제 마련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막강한 중국의 하드 파워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기민한 외교력과 질적으로 앞선 경제 그리고 강력한 소프트 파워의 지렛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중국 경제의 이웃 효과가 제공하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노력도 배가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도 물류·금융·관광·컨벤션, 그리고 교육·R&D·보건·의료 등 서비스산업의 활성화가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다.



* 출처: 중앙일보-사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