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디플레이션 초기에 와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5년차 정도에 진입한 것 같다.”(최경환 경제부총리, 지난달 28일 한 포럼에서)
기준금리 인하 여부를 결정하는 12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거시경제 정책의 키를 쥔 두 수장의 경기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이론적으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마이너스 물가상승률 상태를 말한다.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도 위험하지만 디플레이션은 더 치명적이다. 기업이나 가계나 자신감을 잃고 투자·소비를 줄이면서 ‘저성장→소득 감소→투자·소비 위축’이란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일본이 1990년대 이후 헤어나기 위해 발버둥쳐도 빠져나오지 못한 덫이다. 한국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2012년 11월 1.6%를 기록한 이후 지난달까지 22개월 연속 0~1%대에 머물고 있다. 물가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65년 이래 2% 미만 물가가 지속한 기간으로는 가장 길다. 명목상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는 아니지만 과거 지표와 비교하면 경제에 이상신호가 들어온 건 분명하다.
한국은 과연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본지가 국내 경제전문가 30명에게 긴급 설문한 결과 전체의 60%인 18명이 ‘디플레이션 공포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6명은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디플레이션의 사전적 정의는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뜻하지만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2개월이나 1%대를 지속해 한국은행의 중기 물가 안정 목표(2.5~3.5%)의 하단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사실상 디플레이션으로 봐야 한다”며 “실제로 소비자물가상승률이 0% 이하로 떨어지면 그땐 회복이 정말 어렵게 된다”고 경고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대표도 “서비스 산업 개방, 노동시장 개혁 등 구조 개혁이 지지부진할 경우 성장동력 상실과 추락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의 본격 회복 시기에 대해서도 내년 중(상반기 8명, 하반기 4명)이라는 응답이 12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예측이 어렵다거나 답변을 유보한 응답자도 12명이나 됐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도 절반이 넘는 16명이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 80년대 압도적인 제조업 경쟁력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했던 일본은 85년 엔고를 초래한 ‘플라자합의’를 고비로 부풀대로 부푼 부동산·주식 거품이 터지면서 90년대부터 20년 이상 디플레이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최근 한국이 겪고 있는 상황도 과거 일본의 전철을 밟아 가는 듯한 양상이란 얘기다. 다만 전문가 상당수는 “아직은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며 “일본의 선례를 분석하고 정부와 정치권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피해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원규 우리투자증권 대표는 “일본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비중이 감소하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진 반면 미국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한 2000년대 중반 이후에도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았다”며 “적절한 정책을 실기하지 않는다면 디플레이션은 피해갈 수 있는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아직 디플레이션을 심각하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란 반론도 있다. 곽창호 포스코경영연구소장은 “최근 소비자물가상승률이 한은 목표 수준을 하회하고 있지만 이는 국제 원자재 가격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원화 강세로 수입물가가 하락하는 데 따른 것”이라며 “당장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디플레이션을 피하자면 정치권이든 정부든 일관된 정책 신호를 적기에 시장에 보내야 한다는 데 대해선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김창규·이한길 기자>
설문에 응해 주신 분(가나다순)
◆연구소(9명)= 신한금융미래전략연구소(임병철 소장), 우리금융연구소(주재성 대표), LG경제연구원(김주형 원장), KB금융경영연구소(조경엽 소장), 포스코경영연구소(곽창호 소장), 한국경제연구원(권태신 원장), 하나금융경영연구소(배현기 대표), 한국금융연구원(윤창현 원장), 현대경제연구원(하태형 원장)
◆학계(7명)= 곽노선(서강대), 김기홍(부산대), 성태윤(연세대), 송병락(서울대), 이정희(중앙대), 조준모(성균관대), 한순구(연세대)
◆금융계(14명)= 금융투자협회(박종수 회장), 동부증권(고원종 대표), 딜로이트컨설팅(김경준 대표), 미래에셋자산운용(손동식 주식운용부문 대표), 미래에셋증권(변재상 대표), 삼성증권(김석 대표), 신영자산운용(이상진 대표), 신한금융투자(강대석 대표), 우리투자증권(김원규 대표), KB자산운용(이희권 대표), KTB자산운용(조재민 대표), 트러스톤자산운용(황성택 대표), 한국밸류자산운용(박래신 대표), 한국투자증권(유상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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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 있다 … 정부, 일관성 있는 부양책 펴야"
2014 한국, 1990년대 일본 비교하니
부동산 침체, 고령화, 저출산 닮아
자산 거품 붕괴 현상은 안 나타나
가계부채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소비가 위축됐다는 점도 빼닮았다. 2013년 6월 말 기준 한국의 가계 빚은 980조원으로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90%에 달했다. 일본의 90년대 초반(약 40%)보다 높다. 2000년대 중반 부풀어 올랐던 거품이 꺼지면서 부동산 시장도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 빚은 눈덩이인데 집값은 묶여 있으니 소비 여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배 소장은 “일본도 1990년대 초반 집값이 폭락하며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서울의 집값은 도쿄와 비슷하다”며 “한국의 1인당 소득이 일본의 절반 수준임을 감안하면 주택 가격이 아직도 비싸다”고 덧붙였다. 최경환 경제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이 ‘반짝’ 효과에 그친다면 한국에서도 가계부채 부실로 인한 부동산 시장 추가 붕괴 가능성마저 있다는 얘기다.
원화가치 상승으로 기업의 해외 투자가 늘어난 점도 한국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 요인으로 분석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일본은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로 산업공동화가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여기에 고령화·저출산이 가속화하면서 경제 활력을 더 위축시키고 있다. 배 소장은 “일본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비율이 92년 이후 꾸준히 하락세를 보였는데 한국도 2012년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재 상황이 과거 일본보다는 낫다는 지적도 있다. 공통으로 제시한 근거는 자산 거품 붕괴가 아직 한국에선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은 90년 9월 닛케이지수가 연초 대비 48% 하락했고, 부동산 가격은 91년 정점을 찍은 뒤 급락했다. 자산 거품이 꺼지면서 물가와 경기가 하락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은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아직 기회가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태윤(경제학) 연세대 교수도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94년 일시적 경기 회복을 추세적 경기 회복으로 판단하고 97년 긴축정책을 폈다. 이 같은 정부의 오판이 경기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황성택 트러스톤자산운용 대표는 “한국 기업의 세계 경쟁력도 빼놓을 수 없다”며 “일본 기업은 당시 경쟁력 약화로 해외 시장점유율이 점점 줄어들었던 데 비해 현재 한국의 경쟁력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염지현 기자 >
* 출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