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도서관 ♣/- 역사, 정치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 한명기

Bawoo 2014. 10. 15. 23:26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작가
한명기
출판
푸른역사
발매
2009.04.22

리뷰보기

 

저자

한명기
한명기 대학교수

1962년 7월 1일에 태어났다. 현재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조선 초기 학자 권근의 유학 경전 이해에 대한 연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특별연구원으로 있었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조교로 일했으며, 서울대, 서울시립대, 건국대에서 강의했다.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수상하였다. '광해군대의 대북세력과 정국의 동향', '19세기 전반 반봉건항쟁의 성격과 유형', '재조지은'과 조선후기 정치사' 등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동아시아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관심이 많다.

목차

책머리에 / 서설

1장 정묘호란과 조선?후금관계
정묘호란의 성격과 원인 재론 / 정묘호란이 조선에
남긴 영향 / 정묘호란에서 후금이 얻은 것

2장 정묘화약의 균열과 병자호란의 발생 과정
정묘화약의 균열 과정 / 명?후금관계의 변동과 조청관계의 파탄

3장 병자호란과 조청관계
성하지맹 이후 청의 조선 통제책 / 청의 통제정책의 영향과 조선의 대응 / 병자호란에서 청이 얻은 것

4장 정묘호란과 조일관계의 추이
인조반정 직후 대일 접촉 양상과 인식의 변화 조짐 / 1629년 겐보의 상경과 그 파장

5장 병자호란 무렵 조선의 대일 정책과 인식
병자호란 직전 ‘야나가와 이켄’과 조선의 대응 /
병자호란 시기 일본의 동향과 조선의 대응 /
병자호란 이후 청의 존재와 대일인식
6장 병자호란 직후 대청인식의 변화 조짐
병자호란 이전 전통적 ‘오랑캐’ 인식의 흐름 /
위기의식의 대두와 전통적 ‘오랑캐’ 인식의 변화 조짐 /
병자호란 직후 대청인식의 새로운 조짐

7장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피로인 문제 재론
전쟁 피해의 양상과 ‘피로인 문제’의 심각성 /
대규모 피로인 발생의 원인과 주회인 문제 /
피로인들의 고통 / 조선 정부의 ‘피로인 문제’ 대책과 귀결 /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8장 정묘?병자호란 시기 이신과 조청관계
이신 발생의 배경과 청의 활용 / 이신이 조선에 미친 영향

9장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 ‘순치’ 과정
‘찬탈’ 기사의 인지 내막과 인조?효종대의 대응 /
현종?숙종대의 변무 노력 / 영조대의 변무 노력과 그 귀결 / ‘변무 문제’가 조청관계에서 가지는 의미

참고문헌 / 영문초록 / 찾아보기


출판사서평


동아시아아의 관점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재구성
‘상처’로 점철된 조선 대외관계사의 내러티브를 파헤치다


기억과 망각 속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특히 청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병자호란 무렵 청군에게 붙잡힌 조선인 포로는 수십만을 헤아렸다. 1637년 2월, 청군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포로들을 심양으로 연행해 갔다. 끌려가는 도중 수많은 포로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지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여성 포로들의 비극은 특히 처절했다. 많은 여인들이 청군 장졸들의 첩이 되어 노리개 감으로 전락했다. 천신만고 끝에 심양에 도착한 뒤에도 이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선 원정에 나섰던 남편이 조선 여인들을 첩으로 데려오자 만주족 본처들은 질투심에 몸을 떨었다. 본처들 가운데는 조선 여인에게 끓는 물을 퍼붓는 등 고문을 자행하는 자들도 있었다. 내용을 보고받은 청 태종 홍타이지조차 격분했다. “이렇게 잔인한 투기를 일삼는 여인들은 남편이 죽을 때 순사殉死시켜 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이 같은 끔찍한 ‘과거’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병자호란을 정면에서 다루는 것을 기피해 온 경향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역사학계는 대외관계사 연구 자체를 꺼려했다. 오랜 시간 동안 중국과 일본 사이에 치여, 그들로부터 받아야 했던 핍박의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해방 된 나라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 식민사가植民史家들이 의도적으로 깔아뭉갰던 민족의 저력을 다시 탐구하는 것이 시급했던 상황에서 ‘상처’로 점철된 대외관계사를 언급해 봐야 별로 득 될 것이 없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대전란을 겪었던 조선시대의 경우 그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동안 대외관계사 연구에 소극적이었던 학계 풍토에 정면으로 맞서는 의미를 갖는 책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한명기, 푸른역사)가 출간되었다. 저자 한명기는 한중일을 아우르는 대외관계사의 관점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주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묘호란과 조선?후금 관계, 정묘화약의 균열과 병자호란의 발생과정, 병자호란과 조청관계, 정묘호란과 조일관계의 추이, 병자호란 무렵 조선의 대일정책과 인식, 병자호란 직후 대청인식의 변화 조짐,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피로인 문제 재론, 정묘,병자호란 시기 이신貳臣과 조청관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 ‘순치馴致’ 과정 등이 그것이다.


 17세기 급변하는 동사이아 국제 정세 속 조선의 선택은?
주목되는 것은 정묘?병자호란이 기본적으로 조선과 청 사이의 전쟁이었음에도 저자의 시선이 일본과의 관계에까지 미치고 있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도발하여 조선으로부터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로... 매도되었던 일본은 두 차례 호란을 계기로 발 빠른 행보를 보인다. 위기에 처한 조선에 ‘조총과 화약 등 무기를 원조하겠다’고 접근하는가 하면 조선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교묘히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려는 자세를 보인다.
이 책은 또한 17세기 초 명을 버리고 청으로 투항한 한족漢族 출신 이신貳臣들이 청군의 일원으로 병자호란에 가담하고, 전쟁 이후 청이 조선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실에도 주목했다. 이밖에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복원한 것, 포로로 끌려간 지 각각 28년과 37년 만에 탈출해 돌아왔다가 다시 버림받았던 안추원安秋元과 안단安端의 사례를 발굴해 낸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한중일을 동시에 아우르는 동아시아 전체의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한 점이 돋보인다.


이 책에 따르면 후금(後金-뒤의 청나라)이 조선을 향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향을 사실상 확정한 것은 1633년 6월의 일이었다. 당시 청의 군신들은 조선을 언젠가는 정복하되, 명나라와 몽골을 복속시키기 전까지는 회유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청의 침략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과연 어떻게 했어야 할까? 저자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나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척화파나 주화파 모두 총론總論에서는 그럴듯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지만 전쟁을 피하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각론各論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 한명기는 이 책을 통해 강국 사이에 끼여 있는 상대적인 약소국 조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지혜가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국가의 역량이 너무 미약할 경우, 외교적 지혜를 통해 생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따라서 약체성弱體性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정권들에게 요구되는 절실한 과제이자 덕목임을 환기시킨다. 과거 정권에서 이른바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던 사실, 당장 지금도 남북문제를 포함한 외교정책 전반이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진 메시지는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관점, 다른 해석―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다
저자는 2007년 1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라는 제목으로 병자호란 관련 역사 평설評說을 ≪서울신문≫에 매주 연재한 바 있다. 모두 104회에 걸쳐 원고지 2천매 분량으로 병자호란의 아픔과 교훈을 그려냈던 저자에게 이 책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중을 위한 역사서를 제대로 쓰려면 그 주제와 관련된 학술 연구서를 먼저 쓴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저자에게 이 책은 대중서를 쓰기 위한 바탕이자 원천源泉이기 때문이다. 실제 저자는 과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라는 학술서를 쓴 뒤, 그것을 바탕으로 ≪광해군≫이라는 대중서를 출간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라는 역작을 바탕으로 저자가 앞으로 선보이게 될 대중서 ‘병자호란’은 어떤 모습을 지닐지 자못 궁금하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


들어가기 전에

한국의 역사는 침략을 하기보단 침략을 받은 역사이다. 단군조선부터 시작하여 후기 조선까지 이어져 항상 중원대륙의 한족(漢族)에 의해 국가의 위기를 맞이했다. 21세기인 지금에 중국에는 황제라는 사람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란 국가는 항상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글로벌리즘이란 이름 아래 중국 역시 관료주의적인 사회주의형태에서 국가 내부적인 정치성향은 관료주의는 택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자본주의국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VS 공산주의(국가자본주의 내지 관료주의국가) 대립구도는 해체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아마 그 이전의 중국보다 더 강력하고 위기로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다고 중국을 과거 한국전쟁에서 이북 위로부터 넘어온 적대국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대외 무역에서 절대 제외할 수 없는 국가다. 특히 등소평의 개방정책은 중국의 상품이 외국으로 넘쳐흐르게 되면서 중국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적대국가가 아니라 한국 주변에 있는 무역국가 중에 하나다. 게다가 중국에서 매년 한국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한국 역시 중국으로 유학 내지 관광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추세다. 그런 국제사회의 관계적인 요소에서 중국에 대한 역사적인 관점을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우리가 수 십 년 내지 수 백 년 전의 일이라도 그것이 지금의 우리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되었다고 해도 대한민국 지도는 조선시대의 영역과 거의 흡사하다. 조선의 탄생이 결국 대한민국 영토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 개국군주는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다. 그들은 본래 고려의 신하였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국을 멸망시키고, 조선이란 새로운 국가를 설립한다. 당시 원나라 이후 중원은 명나라라는 강력한 한족국가가 있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대신 명나라라는 국가였다. 한족이란 국가체계는 뛰어난 문인들을 위주로 하였기에 제 아무리 무력이 강한 국가라도 해도, 그 지배논리 내지 국가운영체계에 한족의 문화적 기반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현재 중국은 공산화된 국가라고 하나, 실제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들어가자면 중국은 마르크스의 가르침에 전혀 따른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예전의 봉건사회에서 계급 대신 자본이나 권력의 소유에서 새로운 지배계층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은 세계 어디든 존재하는 국가에서 경제적인 조건만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갈 수 있다. 그렇지만, 빈부격차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 전혀 빈부격차를 줄이지 못하는 지난 세기의 공산주의국가 진영의 모습에서 단순히 우리는 공산진영의 국가이던 중국으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라는 이름이 국가정치에서 겉으로 표방하지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은 아직까지 우리가 마지막 왕을 가진 조선이 있듯이 그들도 명나라와 청나라의 중국이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전쟁의 배경

전쟁이란 단순히 감정이나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단순한 감정과 순간적인 판단이 촉발제가 될 뿐이다. 전쟁의 이유는 바로 국가 내부적으로 경제적인 조건과 환경적인 조건이 중요하며, 특히나 청나라 이전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전쟁이란 이름을 단순히 기마민족의 위상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계성에 의해 진행되었다. 우선 영토의 분류상 한국은 몬순기후로 쌀농사가 매우 적합한 국가이며, 중국은 다양한 기후가 섞여 있으나 대부분 농업이 가능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다르게 후금이던 청나라는 대부분 몽골이나 조선함경도 이북에 위치하고 있기에 농업이 매우 부적합하므로 식량문제가 항상 심각했다. 그들이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식량의 공급이다.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우선 직접 수력이나 채집으로 유지 하던가 혹은 농업이나 축산업을 일으키거나 또는 침략으로 통해 식량을 훔쳐오는 것이다. 후금 인근에 위치한 몽골을 비롯한 대부분 오랑캐부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일정한 터전도 없이 계속 이동을 하면서 가축을 키워 가축의 우유와 고기로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식량을 가져올 수 없기에 후금의 입장에서 조선이나 명나라의 식량무역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식량외교는 유리한 게 아니다. 물물교환 내지 상품을 화폐로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되는 가치로서 교환해야 한다.

 

문제는 화폐로서 사용되던 것은 지금과 같은 달러 내지 유로 같은 종이화폐가 아니라 금, 은, 보석 등과 같은 귀금속이다. 물물교환이 가능한 것은 가축, 식량, 약재, 무기 등과 같은 그 나라의 살림에 필요한 도구들이다. 화폐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존재하지 않기에 상당량의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화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품 내지 귀금속이 필요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후금의 입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약탈에 의해 자행되는 물자의 귀속에서 물자를 약탈하면 할수록 이에 대한 새로운 물자가 필요하다. 전투에 필요한 물자만큼 그 전투에 참여한 장병과 가족까지 혜택이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후금이 초반에 가난한 국가이고, 전투가 용이한 점은 그들이 문화적인 과잉이 정치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과 달리 병자호란이 괴로운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런 호족들이 가진 문화적인 역량이었다. 홍타이지를 살펴본 조선 사신들은 홍타이지가 매우 호탕하고 남성적이며, 밑의 부하들에게 엄하지만 백성들에겐 매우 관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병자호란 시기에는 후금이 아닌 몽골족의 용병술로 정묘호란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초반에 조선을 침공할 때 거리의 양민들을 손대지 않도록 했지만, 병자호란 시기에는 몽골족들이 약탈과 살인을 즐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전쟁의 시초는 외교적인 갈등이 시작되나, 그 외교적 갈등에는 국가 내부나 혹은 국가이전의 부족에서 자원의 충당에서 시작된다. 물자부족에 대한 충당과 그 충당과정에서 보상이 일어나고, 그 보상 이후 새로운 인원과 물자를 보급하게 되면서 더 큰 물자와 보상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력은 확장되었고, 전쟁의 대상은 국가차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몽골족의 칭기스 칸의 경우 본래 몽골의 작은 부족에서 시작한 점에서 청국 황제인 홍타이지 역시 후금의 부족에서 하나의 족장에 불과했던 점이다. 전쟁의 원인은 결국 부족국가에서 물자의 보충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상대진영과 반목된 계기라고 볼 수 있었다.

 

문화가 물질에 의해 지배받은 것이 청국의 시작이라면 문화가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다. 조선의 경우 이성계 이후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에서 중화주의를 논하면서 소중화 국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른바 사대부들은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주자학이 결국 한족의 유교문화였고, 자신들은 그 문화의 후계자란 사실을 토대로 주변에 있던 일본과 만주족 등을 우습게보았다. 문인들이 중심이 되던 조선사회에서 무인들의 위치는 문인보다 아래였으며, 도원수나 대장군이 위치해도 병조판서와 같은 문인 사대부들이 지금으로 따지면 국방부장관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소중화 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어버이국가 명나라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충성을 기하여 할 것이며,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는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광해군의 경우 처음에 후금과의 관계성에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기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이에서 중립외교로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물질적, 환경적인 조건보다 문화적인 기반이 우위인 사대부에겐 큰 반발이 되었다. 강홍립이 후금과의 전쟁에서 고의적으로 싸우지 않고, 오히려 진형이 불리하여 투항한 것은 광해군은 정치의 우위는 문화보단 물질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조선의 팔도는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그 와중에 우방국인 명나라는 도독 진린을 파병을 보내나, 그들은 왜와 진정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고, 뒤에서 왜와 교섭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구원을 토대로 어버이국가에서 아들국가인 조선을 도왔다는 이유로 충성심을 표한다. 일본이 민가를 약탈하면 큰 빗 하나가 스쳐지나갔다고 하면, 명나라의 군사는 참빗 하나가 지나갔다고 한다. 빗의 날이 세세하고 미세한 참빗처럼 명나라가 조선에 기거하면서 하는 일이라곤 노략질과 병량미를 축내는 것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에 대한 우방의식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치적 무능력을 보여주며, 이와 더불어 그런 후금에 대한 견제성에서 군사력의 한계성과 반정공신들의 이익만 보다가 결국 호란을 당한 것이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에 후금의 요구사항은 그래 과다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내쫓겨나도, 결국 후금은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전선에 눈치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운은 조선을 버리고 또 무시했다.

 

□ 외교적 상황

조선이란 국가의 한계성은 바로 실리외교를 무시한 것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아무런 방도도 세우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결국 부산 동래와 한양을 함락당한 선조는 아무리 유능한 신하를 두어도 당파논쟁 및 화이론(華夷論)에 지나친 몰입에 현실적 감각을 상실했다. 북인계통의 이순신 같은 무장이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도 반역자로 몰린 이유도 당파논쟁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인의 경우 이후 광해군 시대에 외교정책을 효율적으로 다루어 전쟁의 원인을 피하려고 했다. 처음부터 홍타이지도 조선에 대해 강압적인 침공을 하려던 것은 아니나, 결국 명분이란 것이 실리의 모든 것을 우월할 때 전쟁이란 극단적 상황이 도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광해군은 가도에 위치한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에 대해 견제를 했다는 점이다. 모문룡이 탐욕적이고 자국의 수도에서 멀리 있는 가도에서 변방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재력과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후금, 조선이 필요한 무역의 모든 이권을 챙긴 모문룡은 후금에게 큰 가시거리이고, 조선으로 본다면 막대한 예산을 요구하는 간신배였다. 모문룡에 대한 광해군의 정책은 모문룡을 견제하고 후금과의 중립노선을 지키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인조가 반정에 오르자, 모문룡의 세력에 속한 상관이 인조의 정치적 기반이 약한 점을 이용하여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교섭을 강화했다.

 

인조는 본래 광해군의 조카이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기에 명분이 필요했다. 명나라의 사록에서 인조는 정상적인 왕이 아니라 변란으로 왕이 된 사람이고, 그가 왕위의 안정성을 가지려면 명나라에 의해 책봉을 받아야 하는 점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일개 대군이란 점에서 명나라의 모문룡의 상관으로부터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가 왕으로 추숭되는 것을 성공한다. 덕분에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외교 사다리타기에서 명나라로 가면서 추후에 조선은 홍타이지의 침략을 받고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외교의 실리적인 부분에서 명분이란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아킬레스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명분 뒤로부터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외교정치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의 조선에서 외교정치를 잘 하는 것은 결국 자국을 보존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쇼군으로 되면서 일본 내의 모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척결한다. 그 덕분에 일본 막부는 전쟁보단 에도 중심의 내정위주의 정치로 옮겼으며, 도쿠가와 막부와 더불어 조선의 교역과 외교회복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에는 아직까지 강력한 왜병이 있었고, 조총의 경우 살상력이 매우 높았으며, 항왜(降倭)와 같이 항복한 왜인들은 다른 조선병사와 달리 매우 강한 무술과 돌격능력을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관을 동래에 설치하여 일본과 외교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로는 명과 후금 아래로는 왜국이 있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해온다면 국가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초는 광해군부터 닦아오고, 인조는 후금의 세력이 강하고, 혹시라도 있을 전쟁을 대비하여 왜국의 조총과 염료, 화약을 구입한 것이다.

 

모문룡 사망 이후, 명나라에서 후금에 대한 전반적인 전투태세에서 중간에서 눈치보단 조선이 명으로 붙은 조선에서 일본의 외교는 중요했으나, 문제는 명나라의 국가 존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외교적인 문제보단 자국 내의 정치적 세력의 분할로 인해 파가 갈리어 있었고, 그 이점을 노려 홍타이지는 자신에게 투항한 명나라 장수로서 이간질 작전을 세웠다. 덕분에 중요한 장수가 처형당하는 일을 당하자, 명나라의 군사력은 점차 약해져 갔고, 이 와중에 자국에서 보충 내지 합의에 대한 보완보단 그저 그대로 흘러가는 추세인 것이다.

 

□ 이신의 존재

이신이란 하나의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의 왕을 섬기는 자를 가리킨다. 즉, 원래 명나라의 장수나 인물이었으나, 후금으로 투항하여 홍타이지를 보필한 자들이다. 명나라는 기본적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상황이나 외교적 방술을 잘 알았으며, 전쟁은 반드시 무력으로 인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인들로 통해 정치외교적인 압박과 실리를 넘은 명분으로서 조선을 굴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제 아무리 실리가 중요해도 명분이 존재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거나 혹은 압력을 주어도 한계성이 따르기 때문이다. 명분성에서 인조의 반정 역시 명분에 의해 명나라와 친교외교로 맺은 것처럼 후금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들은 바로 그런 방법으로서 조선을 압박했다.

 

본래 인조가 병자호란 패배로 청국황제인 홍타이지에 삼배구고두례를 할 이유는 없었으나 이 모든 것이 명나라의 이신에 의해 조정되었으며, 조선과 후금의 전쟁에서 밀고 당기는 상황에서 조선에 대해 심한 압력을 주었다. 심지어 척화파에 대한 검색이나 투항 이전 명나라와 밀통하는 자까지 속아내는 효력을 발휘한다. 인조반정의 공신 중에 공신인 승상 최명길이 바로 명나라와 밀정을 나누다가 그 밀정을 나눈 명나라 장수가 청에 투항하는 바람에 실각하게 되는 사례를 알 수 있다.

 

이신의 존재가 그토록 강한 이유는 조선이란 국가가 이때까지 소중화 이었기 때문에 문장력이 부족한 후금이 무력지배로 갈 수 있어도 문화지배가 어려운 부분을 이신들이 보완했고, 때에 따라서는 우수한 성과도 낳았다. 청나라로 연호가 시작되자말자 명나라 이신들은 청나라의 문화 및 정치권에 큰 역할을 맡으며, 홍타이지의 세력을 확장시킨다. 홍타이지 역시 본래 후금에서 버일러라는 한 부족장에 불과하며, 다른 부족장들을 통합하기에는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므로 이신들의 존재로서 자신의 세력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존재는 청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청국에서 문인이 배출되고, 조선으로부터 아버지국가라는 역할을 하면서 특히 강희제 때에 이르러 더 이상 명나라에 의한 그늘에서 초조하게 굴지 않았다. 인조와 효종 시기에 이신들은 끊임없이 조선을 압박했고, 주변에 스파이를 배치하고,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걸었으며, 특히 남한산성 보수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 조선의 피해

개인적으로 조선시대에 북벌론이든 혹은 북학론이든 어느 하나라도 무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효종이 북벌론을 내세우려다가 못한 것이나 혹은 인조 시대에 북학론을 하지 못한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라 볼 수 있다. 인조반정은 결국 사대부들이 가진 성리학적인 중화주의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 시기에 인조반정 이후 후금을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병자호란으로 모조리 굴복하게 되면서 조선 사대부의 정점에 오른 임금이 오랑캐의 수장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을 충격을 피하지 못할 일이었다. 시대적인 흐름을 보지 못하여 명으로부터 인조반정을 인정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변란으로 간주된 것은 큰 오명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실리나 정도보단 이름이나 명분에 집착하던 사대부들은 병자호란의 패배와 명나라의 수복불가능에서 청국이 명국의 모든 것을 대체하면서 자기논리에 대해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청을 부정했으나 청이 명을 흡수하여 명의 문화조차 가지면서 명나라의 소산이 청국에게 맡겨지면서 자신들이 청국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 결국 청국이 어버이국가로 되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인조반정에 당위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날조로 광해군이 모문룡과 친하게 지냈다는 거짓말과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추구한 것에 대한 문제점보단 폐비살제(廢妃殺弟)라는 명분만 내걸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일구어 놓은 결과에 대해 부정하면서 광해군이 이룩한 업적 자체가 있었기에 자신들이 무사한 것을 알게 된 지식인들 사이에선 광해군이란 존재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전쟁의 패배는 수십만 명의 조선 백성들이 후금으로 끌려가고, 가는 도중에 살해당하거나 추위나 배고픔에 죽고, 또는 가서도 병으로 죽게 된다. 도망치다 걸리면 잡혀 죽고, 혹은 도망쳐도 이른바 환향여(還鄕女)가 화냥년이란 이름으로 창녀취급 당하는 것이다.

 

억지로 간 것도 모자라 집안에서 파문당한 여성들을 본다면 피해의 양상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컸다. 남성들은 그저 살해당하겠지만, 여성들은 강제로 겁탈당하거나 또는 후금에 끌려가서 장병들의 첩이 되어 고진 생활을 당하여야 했다. 원처가 있는 후금 집안에 갈 경우 원처가 조선여인에게 못된 짓을 하는데, 뜨거운 물을 얼굴에 뿌리는 행위 등 심하게 괴롭힌 점에서 홍타이지조차도 질투하는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이 죽을 경우 같이 순장할 정도로 엄히 다루었다. 수십만 백성이 끌려가고, 그것도 모자라 왕의 아들부부 그리고 대신관료의 아들조차도 볼모로 끌려가면서 심한 고통을 겪는다.

 

명나라 토벌에서 조선인들을 징병할 때, 만약 전쟁의 결과가 용이하지 않으면 청국에 잡힌 세자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그런다고 청나라와 명나라 전쟁에서 조선병사의 활약이 돋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도정벌 시에 청국은 조선병사의 사격기술을 인정했는데, 명나라 장수는 자기가 패배한 이유는 후금이 아니라 조선의 조총병사라고 힐책했다. 가도의 명나라 관리들이 가도인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심하게 착취하여 이에 대한 불만이 전쟁에서 보이게 되었다. 물론 명나라와 전쟁 중에 아버지국가라는 사상이 백성에게 뿌리박혀 일부 포수는 허공에 사격하거나 혹은 공포탄을 발사하여, 후금의 감독관들은 이들을 적발하여 처형했다.

 

후금에 의해 임금은 욕보이고, 임금의 모습에 실망한 사대부들은 왕을 무시하는 경우가 늘었으며,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지 않기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며, 인조는 반청을 고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준다. 광해군에 대한 반발심에 의해 일어난 인종반정에서 인조의 행동과 인조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보낸 신료들을 보면 그들의 관심사는 정치의 안정보다는 자신의 명분만 내세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집착의식은 후로 갈수록 강해지는데, 당시 광해군을 인정하지 못하는 명분은 영조시대까지 흘러가면서 인조반정이 변란이 아니라는 것으로 돌리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조선을 보면서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그것에 대한 집착성에서 강희제는 당근과 채찍에서 조선이란 국가가 의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조선은 19세기 일본이 침공하고, 서양이 다가오고 있을 때 청국과의 외교정책만을 고수하려 했다. 사실 처음부터 우방은 없었고, 단지 우방을 가장한 적군 내지 동맹국만이 존재한 것이다.

 

 

□ 독서 이후 감상평

어리석은 사대주의 사상은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흘러올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미국에서 친미와 친일의 의미로서 외교적 방도라면 모르지만 친일파는 국가를 좀 먹게 하여 나라를 몰락하게 하였고, 친미파들은 본래 미국이 가진 정치적 가치보다는 그저 미국의 눈치만 보게 되었다. 외교에서 상대국과의 관계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없다. 우선 한국은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한 금속류의 광물이 없다는 점과 무기를 운영할 수 있는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대에서 비상용 내지 전투용 보급물품들은 분명 비치하고 있겠지만, 항공기와 해상운송이 계속 유지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점이고, 최근 전쟁무기는 한 번의 공격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다는 점이다. 전쟁이 나게 되면 상대 국가만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조차도 적대감을 가질 수 있으며, 한국의 경우 대부분 남자들이 징병대상이므로 수많은 현역만이 아니라 예비역 내지 보충역, 민방위까지 전쟁의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나 국가비상 시에 동원령이 반포되면 국민은 더 이상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국가조직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남자 대부분이 예비역으로 전쟁에 참전하면 대한민국 전체인구 1/4 이상 될 것이다. 결국 현재 안보상황이나 국가운영에서 외교적 실리를 명분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논리다. 전쟁에서 이기면 본전이고, 패배하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는 것이다.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에 북한 위의 중국은 우리의 무역 국가이면서도 한편으로 북한에 강한 압력을 불어넣는 국가이며, 일본은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자위대 군사력 합헌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미국과 서양국가의 우방적인 역할에서 무력충돌 내지 그 상황을 만드는 일은 오히려 우리에게 마이너스라는 점이다.

 

실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서 지금의 무력을 생각하면 양쪽 다 심한 피해를 받고, 어느 정부라도 그 명분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실각하게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쿠데타 내지 혁명, 한국은 투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이란 책은 단순히 우리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중원의 명과 청의 교체만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조선에서 어떤 외교정치를 보이고, 그 와중에 다른 국가와 어떤 외교행위를 했고, 그 다른 나라에서 어떤 상황이었냐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정치적인 결정이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