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량(충남 태안의 마도 해역)의 바닷길은 파도가 격랑하고 바위가 험준해서 배가 뒤집힙니다. 운하를 뚫어야 합니다.”(<고려사> ‘세가·인종’)
1134년(인종 12년), 긴급 상소문이 올라온다. 나라의 곳간을 채울 세곡(稅穀)을 개경으로 운반하려면 안흥량 해역(사진)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해역은 섬들이 흩어져 있고, 수중암초가 지뢰처럼 깔려있으며,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물살이 요동치던 곳이라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결국 천수만~가로림만을 뚫는 운하공사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토목공사는 실패로 끝났다. 고려조 운하공사는 이후 두 차례(1154년·1391년)나 이어졌지만 모두 미완성으로 끝났다. 공사구간이 암반층인 데다 조수가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파는 대로 메워진 것이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의 장자방인 하륜이 나름대로 비책을 꺼냈다.
“고려 때 뚫었던 미완성 구간에 저수지 5곳을 쌓고 저수지마다 소선(小船)을 둡니다. 조운선이 포구에 닿으면 세곡을 5곳 저수지의 소선에 차례로 옮겨실어 이동시키면 됩니다.”
일종의 갑문식 공법을 제시한 것이다. 일각에서 “암반 때문에 공사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회의론을 제기했지만 공사는 강행됐다. 5000명이 동원된 운하공사는 불과 11일(1413년 1월29일~2월10일) 만에 끝났다. 그러나 속도전으로 치러진 운하 공사는 부실·날림의 전형이었다. <태종실록>의 기자는 “백성의 헛심만 쓴 쓸데없는 공사였다”고 평했다.
과연 그랬다. 하륜의 계책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다. 조운선은 암초와 파도 때문에 포구에 정박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저수지를 만들고 소선을 건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두꺼운 암반층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태종실록>은 “(임금의 신임을 받는) 하륜의 계책에 아부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꼬집었다. 충청관찰사 이안우가 비분강개했다.
“관리들은 일시적인 모책(謀策)만 쓰고, 백성들을 위한 계책은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태종실록>)
운하공사는 결국 태종의 결단으로 중단됐다.(1413년 9월) 새삼 4대강 공사의 망령이 떠오른다. 그래도 태종은 조정의 공론을 끝까지 청취하고, 늦었지만 공사중단이란 용단을 내리지 않았던가. 최소한 불통의 리더십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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