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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 - 아버지와 아들 [Otsy i deti]

Bawoo 2014. 11. 27. 23:01

 

아버지와 아들 [Otsy i deti]

 


 

러시아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1862).

투르게네프의 걸작으로 꼽히며 러시아의 구세대와 신세대를 탁월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실질적·유물론적·급진적인 신세대를 일컬어 허무주의자라 이름 붙였고 허무주의적 주인공 바자로프를 통해 보수적 지식인과 진보적 지식인을 모두 비난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측에서 비난을 받아 이후 침체기에 빠졌다.

.

혁명적인 젊은 이들과 지주급의 부모들에 갈등을 그렸다. 물런 지금도 아들이나 부모세대에

생각이 다르고 젊은이들은 좀 개혁적이고 미래 지향적일 것이다.

그 당시의 러시아 정세를 잘 알아야 소설을 이해할수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조건없이 부모님 세대를 따를 것을 강요받았다. 그길에서 벗어나면 장래의 보장도

없고 출세도 불가능했었다. 누가 빨리 어른스러워지는가가 중요했다.

사회를 반대하고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겠지만 겉으로 나타낼수도 없었다.


바자로프 ( 아르까디의 친구, 의대생으로 장질부사에 걸려 죽었다. 사회개혁 운동가 ),

구세대랑 스라브주의자들 ( 보주주의자들 ), 아르까디 ( 뻬쩨르부르그 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오다. 바자로프의 친구 ), 니꼴라이 뻬뜨로비치 끼르사노프 ( 아프까디의 아버지, 지주 ),

빠벨 빼뜨로비치 ( 아르까디의 삼촌, 보수주의자, 바자로프와 격심한 토론을 하고 격투를 했다 ),

니힐리스트 ( 허무주의자들, 무계급, 무질서를 주창함 ), 페니치까 ( 아르까디의 계모 ),

안나 세르게예브나, 까쨔 ( 안나의 동생, 아르까디의 부인이 됨 )


구세대의 부모들을 조롱하고 반대의견을 버릇없이 내세워도 아버지들은 굳건히 아들편에

스는 사랑을 본다.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것보다 더넓은 부모의 사랑이다.

자식들의 생각도 현실에 안먹혀 들어간다는데 고민이 있고 헤어나가기가 어렵다.

사회개혁을 그렇게 서서히 이루어졌다. 물런 그당시 러시아에선 급속도로 변화가 있었지만..


러시아에 시골풍경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당시의 계급차이도 잘 나타내고 있다.

일품은 바지로프와 보수주의자인 삼촌 빠벨 빼뜨로비치의 격열한 토론과 서부활극에서나 보는 총싸움이다.

책은 여러번 읽어야 재미를 느끼지만 어렸을땐 아들에 입장에서 읽었고 나이가 들어 부모에

입장에서 책을 읽게 된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를수밖에 없다. 폭 넗게 본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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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1859년 봄, 대학을 졸업한 알카지가 친구 바자로프를 데리고 아버지 니 콜라이의 농장으로 돌아오면서 신구(新舊) 세대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바 자로프는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이상주의적 공론만을 일삼고 있 는 귀족 파벨(니콜라이의 형)을 증오하고, 파벨은 바자로프의 무례함을 못 마땅하게 여긴다. 니콜라이는 자식들의 세대로부터 낙오된 것을 한탄한다. 그러나 집안의 고용인들은 바자로프에게 호감을 갖는다. 파벨과 바자로프 의 논쟁은 정치, 사상,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개된다.

어느 날 바자로프와 알카지는 도지사 저택의 무도회에서 젊은 미망인 오 딘초와를 알게 된다. 연애를 저속한 장난이라 여기던 바자로프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에 이끌려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만 이성으로 바자로프에 대한 감정을 억제한다. 실망한 바자로프는 알카지 와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그는 아버지의 진료를 도와주면서 나날을 보내 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질부사로 죽은 농민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에 상처를 입고 그것이 패혈증으로 악화된다. 임종이 가까워 온 어 느 날, 오딘초와가 의사를 대동하고 그의 병상을 찾아온다. 그는 죽음의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며 희미해 가는 의식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 며 그 무의미를 비웃는다. 부모에게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않았던 부 모에 대한 깊은 애정과 슬픔도 토로한다. 그는 강한 의지력으로 죽음을 부 정하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한다.

* 작품의 이해

이 작품은 러시아 제정시대의 농노해방과 그에 따르는 러시아 사회의 문 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작자는 여기서 낡은 관습인 귀족문 화와 민주적 문화를 대립시켜 새로운 시대가 도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투르게네프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두 세대에 관한 주제를 통해서,19세 기 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단절의 밑바닥에 놓인 사회적.정치적 문제, 세계관의 대립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 작가는 특히 바자로프를 통하 여 러시아 사회에서 급진적인 인텔리겐차의 모습을 그려 급진적 지식인이 겪는 고뇌와 갈등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860년대 러시아 사회는 혁명운동이 아직 미성숙했고, 혁명가가 존재하 지만 그들의 기반이 아직 확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던 러시아의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당시 러시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모두 괴로움과 회의감에 젖어 있 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바자로프도 조급함과 관념성으로 미숙한 혁명적 지식인의 초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작품의 아우트 라인

1859년의 봄,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지이가 친구 바자로프를 데리고 아버지 니콜라이의 농장으로 돌아온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신구 양세대 (新舊兩世代)의 대립이 시작된다.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이상주의적인 공론만을 능사로 하며, 무의 도식하는 귀족의 취미의 빠아베르(니콜라이의 형)를 바자로프는 증오한다. 빠아레르는 바자로프의 무례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니콜라이는 자식들의 세대로부터 낙오된 것을 한탄한다. 아르카지이는 편견(偏見)을 가지지 않는 자신의 관대한 마음에 자기만족을 하면서, 가정부(家政婦) 페니치카에 대한 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한다. 페니치카나 그밖의 사용인들은 바자로프에 대하여, 자기들과 동일한 평민적인 태도에 호감을 가진다. 빠아레르와 바자로프의 논쟁(論爭)은 정치, 사상,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개된다.


어느 날, 바자로프와 아르카지이는 군청 소재지로 나가, 도지사 저택의 무도회에서 젊은 미망인오찐조와 알게 된다. 연애를 저속한 장난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하는 바자로프도,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에 강하게 매혹되어, 정열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도 크게 마음속의 동요를 느끼지만, 자신의 평화를 지키고자하는 이성이 승리하여, 바자로프의 품속으로 뛰어 들려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 한다.


실망한 바자로프는, 아르카지이와 함께 그의 귀향(歸鄕)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늙은 부모한테로 갔다. 그러나, 부모의 맹목적인 사랑과 지나친 보살핌이 귀찮아서, 곧 실험도구를 남기고 온 아르카지이의 집으로 도피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 실험에 열중하지만, 어느 날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어 빠아베르와 결투 사건이 일어나, 그는 다시 늙은 부모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노부(老父)의 진료(診療)를 도와 주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질부사로 죽은 농민의 시체를 해부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에 상처를 입고, 그것이 패혈증(敗血症)으로 약화된다. 의사인 그는 자기의 증세가 절망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임종이 가까워 온 어느 날, 오진쪼와가 의사를 대동하고 그의 죽음에 임박한 병상을 찾아 온다. 그는 죽음의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며, 희미해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그 무의미를 비웃고, 부모에게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않았던 부모에 대한 깊은 애정과 슬픔을 토로한다. 최후의 의지의 힘을 발휘하여 죽음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외로운 시골의 묘지에서, 바자로프의 무덤 앞에 엎드려 언제까지나 그곳을 떠날 줄 모르는 노부모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슬픔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는다. 무덤 위에 피어 나고 있는 꽃은 자연의 위대한 평화와 영원한 화해를 말해준다고, 작자는 말함으로써 이 소설의 끝을 맺는다.

주인공 하이라이트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라고, 아르카지이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작품 속에 처음으로 나타난 투르게네프의 신조어(新造語)이다. 바자로프는 의사를 지망하는 젊은 자연 과학자로서, 새로운 시대의, 그리고 형성 도상에 있는 온갖 감정적 지적특질을 한 몸에 지닌 투르게네프가 창조한 인물, 말하자면 가까운 장래에 나타날 새로운 인간상(人間像)이다.


사상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도덕, 사회, 예술에 있어서의 체의 귄위를 부정하고, 이성과 논리(論理)와 유용성(有用性)의 한계 내에 있는 것만을 인정하는 「생각하는 리얼리스트」(비평가 비사레프가 붙인 이름)인 바자로프는, 예술에 있어서의 감상주의, 낭만주의, 이상주의, 신비주의 등 일체의 이름(주의)을 부정하고, 한 콀레의 구두가 세익스피어보다 중요하고, 그것이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한 사람의 화공(靴工)이 라파엘로 보다 낫다고 단언하고, 푸시킨의 시( )마저 한가한 자의 시간 보내기 놀이라고 흑평한다.


바자로프에 의하여 상징되는 1860년대의 니힐리스트는, 과학을 신(神)과 바꾸어 놓는 무신론자, 유물주의자이고, 그들이 부르짖는 니힐리즘은 혁명 이론의 허무주의와 달리, 주로 도덕적·정치적·개인적인 일체의 제약, 국가, 사회, 가정의 일체의 귄위에 대한 개인적인 반항이었다.
「페쵸린(레르몬토프의 『현대의 영웅』의 주인공)에게는 지식이 있지만 의지가 없고, 바자로프에게는 의지가 있지만 지식이 없고, 바자로프에게는 의지와 지식이 모두 갖추어 있다. 그에게는 사상과 행동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이것은 비사레프가 지적한 말이다.-영남일보 문학자료에서 <출처: 카페-르네상스 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