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이 터진 것은 한국경제를 위해 잘된 일이다. 적잖은 기업의 3·4세 오너경영자들이 안고 있던 리스크를 민낯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한국 재계가 가족경영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된다면 전화위복이다.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데는 가족경영의 힘이 컸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많은 창업 1세 오너들이 남다른 혜안과 도전정신으로 기업 생태계를 일궜다. 창업주로부터 힘든 경영수업을 받은 오너 2세들도 헌신적으로 일하며 그 기업들을 세계 굴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세대를 거치며 기업들이 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했고, 오너 가문의 지분율은 5% 남짓까지 줄었다. 그럼에도 일반 주주들은 가족경영에 큰 불만이 없었다.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로 기업 가치를 쑥쑥 키웠기 때문이다. 창업주 가문에 경영을 계속 맡기자는 건 일종의 ‘사회적 합의’였다.
하지만 3·4세 경영자들이 등장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데다 경험도 짧아 능력과 품성 모두 1·2세대 같지 않다는 우려에서였다. 이들에게 경제의 미래를 맡기는 게 옳으냐는 소리도 나왔다. 최근 한국 증시의 상승률이 세계 꼴찌권을 헤매고 있는 것을 이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시각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땅콩 회항’ 사건이 터졌다.
외국을 보면 5~6대를 거치면서도 탁월한 성과를 내는 가족경영 기업이 많다. 유럽 쪽이 특히 그렇다. 오너 가문과 사회가 합심해 합리적인 승계 및 경영권 분담 시스템을 정착시킨 결과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롤모델로 삼았던 스웨덴 발렌베리그룹을 보자. 158년 전 창업 이후 오너 가문이 5대째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기업들이 따라 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무엇보다 승계 프로그램이 엄격하다. 발렌베리는 윤리·정도 경영을 표방하며 가문 내의 될성부른 인재들을 치열하게 훈련시킨다. 승계자가 되려면 대학 공부를 스스로 벌어서 하고, 해군 장교로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 그 뒤 그룹에 들어와 경영 능력을 검증받아야 지주회사 회장이 된다.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 참여는 철저히 이사회를 통해 이뤄진다. 신사업 진출과 인수합병(M&A) 등 통 큰 의사결정만 내리고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일임한다.
독일의 BMW도 비슷하다. 오너인 콴트가문은 지분을 47%나 갖고 있지만, 이사회 멤버로서 경영에 참여할 따름이다. 가문이 회장직도 맡지 않는다. 가문의 두 자녀도 대학 졸업 후 BMW의 직원으로 입사해 10년 넘게 경영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똑같이 일해 함께 근무한 직원들도 그들이 오너 일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콴트 가문은 비전 있는 전문경영인을 회장으로 앉히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한국의 가족경영은 어떤가. 시시콜콜한 일상 경영과 인사에까지 오너 가문이 개입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문경영인과 임원, 사외이사들까지 오너 눈치를 보며 충성경쟁 하기 바쁘다. 이런 현상은 3·4세로 경영권이 넘어간 기업에서 더 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한국의 3·4세 오너경영자 중에도 큰 성과를 낼 인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같은 값이면 이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게 좋다. 문제는 자질이 떨어지는 경우다.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기업이 망하면 경제 전체가 흔들리고 국민들이 뒷감당을 해야 한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이 추락하면서 전 국민의 노후가 막막해질 수도 있다.
최선의 방법은 이제 일반 주주들이 나서 기업경영을 견제·감시하는 것이다. 상법상 보장된 ‘1주식, 1의결권’을 있는 그대로 행사하면 그만이다. 주총 의결에 적극 참여해 반대할 것은 반대해야 한다. 허튼 경영을 계속하는 기업에 대해선 기관투자가들이 연합해 사외이사를 파견하는 일도 모색할 만하다. 그렇게 메기를 풀면 가족경영의 역동성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땅콩 회항’ 사건이 터진 뒤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자”고 했다. 그런 내부 개혁이 될까.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 출처: 김광기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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