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漢詩) 마당 ♣/- 중국 漢詩

春夜喜雨( 춘야희우)- 두보(杜甫

Bawoo 2014. 12. 31. 22:15

春夜喜雨 춘야희우

두보(杜甫

봄비에 관한시3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江船火燭明(강선화촉명)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나니

봄이면 초목이 싹트고 자란다

 봄비는 바람따라 몰래밤에들어

     가는게 소리도없이 만물을 적신다.

들길도 구름도 모두 어두운 밤

강가에 배만이 홀로 불 밝혔네

새벽녁 붉게 젖은 곳 보노라면

  금관성에 꽃이 활짝 피었으리니.

 

작품 해설

 이 시는 작가 49~50세에 청뚜에서 지은 작품이다. 봄날의 반가운 비를 제재로 하여 봄날 밤의 서정을 나타낸 시로서, 섬세한 사실적 묘사가 돋보인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짜여 있다.

 수련(首聯)에서는 봄의 서경을, 함련(頷聯)에서는 봄을 맞아 만물이 소생함을 통하여 서정을 나타냈으며, 경련에서는 ‘두루미 어둡고’로써 현실적 감정을 ‘보리 오아 도다’로서 내일에의 희망을 나타내어 대조적 이미지로써 표현하였고, 미련에서는 미래에의 밝은 희망을 감각적․상징적 수법으로 나타냈다.

 전쟁 중에서도 계절의 질서는 잊지 않고 찾아와 너무 반갑고 기쁘다. 좋은 시절의 비는 만물을 생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고단한 자신의 심정을 달래 주는 한숨과 같은 구실까지 하고 있다

=================================================================================

 

좋은 비 시절을 알아 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곧 내리기 시작한다 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스며들어 隨風潛入夜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신다 潤物細無聲

들판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野徑雲俱黑

강 위에 뜬 배의 불만이 밝다 江船火燭明

새벽녘 분홍빛 비에 적은 곳 보니 曉看紅濕處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 花重錦官城

 

* 이 ‘낯선’ 번역은 서울대학교 중문학과 이병한 교수의 것이다.(『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민음사, 2000, 32면)

 

 

   어느 노학자는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로 번역한 바 있다. 험 잡기 같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내리는’이라는 표현은 사려 깊지 않은 것 같다. 시방 시에서 화자는 새벽녘에 일어나 밤 새 내린 비에 젖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 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견해가 있다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니 만물이 생기를 얻게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 것으로 농민들의 마음을 대신한 것이라는 설과, 때맞춰 내린 비에 금관성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니 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향락적인 기대감을 적은 것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어찌 별개의 다른 견해이겠는가. 신경림 시인이 노래한 대로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한 사랑 노래」중에서) 말이다.

 

   여하튼 이 시는 ‘밤-새벽’이라는 시간, ‘들-강’이라는 공간, ‘어둡고 밝은’ 색채의 대비를 전면에 내세워 ‘기쁨[喜]’을 묘사하고 있는데, 기분이 경박하게 달떠 있지 않고 차분해서 좋다. “어젯밤 송당에 비 내려 / 베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昨夜松堂雨, 溪聲一枕西, 平明看庭樹, 宿鳥未離栖”(고려 시대 시인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우야山莊雨夜」)의 분위기와 닮아 있다.

 

   그런데 다른 데는 그리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겠는데, 마지막 구절이 실로 어렵고도 어렵다.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의 원문은 ‘花重錦官城’이다. ‘금관성’을 빼면 ‘화중’만 남는다. ‘꽃들 활짝 피었네’는 사실 『두시언해杜詩諺解』의 ‘고지 해 폣도다’의 직역이므로(‘해’는 ‘많이’의 고어다.) 이 부분 번역의 저작권은 두시의 언해에 참여한 옛 문인학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의역을 감행하였던 것 같다. 이 부분을 황동규 시인은 “꽃이 금관성을 짓누르다”로 해석했다고 한다. 역시 시인다운 상상력이다. ‘활짝’이나 ‘많이’가 지닌 육체적이고 물량적인 해석과는 다른 층위다. 그러나 너무 앞서 간 게 아닐까?

 

   ‘화중’은 글자 그대로 ‘꽃이 무겁다’는 뜻이다. 밤새 비를 온몸으로 맞았을 테니 무거워 고개 숙일 만하다. 실제 ‘화중’은 큰 사전을 보면, ‘비를 흠뻑 머금은 꽃’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 축자 해석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밤새 비 맞아 고개 숙였다고 슬프다니, 고민스럽다니 하는 식의 촌스러운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위의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의 정서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새들은 밤새 내린 봄비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고 말하면 너무 작위적인가?

 

   달리 볼 길은 없을까? 이렇게 답답할 때 상식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은 무겁기도 하지만 거듭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중복이다. 금관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단[錦]을 그 이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봄비마저 내렸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닌가. 그래서 ‘화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역시 너무 초보적인 상상인가?

 

두보(杜甫, 712-770) 당(唐)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린다. 생애의 대부분을 방랑 생활로 지낸 불우한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애가 넘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참고> 두보의 문학관과 두보 문학의 의의

 그의 시는 전란 시대의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하여 사회악에 대한 풍자가 뛰어나며 만년의 작품은 애수에 찬 것이 특징이다. 형식적 기교에 뛰어나고 유교적 현실주의를 표방하는 시성(詩聖)이었다.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 한시(漢詩)의 대가(大家)들에게 선구적 입지를 인정받고 1,400여 편 이상의 수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