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양의 별에 대한 신앙에서 북두칠성은 각별해 천계의 중심으로 상상됐다. 특히 샤머니즘에서는 이 별자리를 죽은 사람의 혼이 돌아가는 곳으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후세의 도교에서는 북두칠성이 인간의 생사와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지금도 시신을 매장할 때 밑바닥에 칠성판을 까는 것은 망자의 혼이 이 별자리로 잘 돌아가라는 의미에서다.
북두칠성의 의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확장됐다. 즉 천계의 중앙인 북두칠성에는 최고신인 옥황상제가 거하는 천궁 곧 자미원(紫微垣)이 존재한다고 상상했던 것이다. 나아가 최고 권력자인 천자가 사는 궁성(宮城)은 자미원 아래의 지상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는데 북경의 자금성(紫禁城)이 바로 그곳인 셈이다. 여기에서 임금은 오방 중에서 중앙이 아니라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굽어본다는 관념이 생겨났다. 임금을 ‘남면존자(南面尊者)’ 곧 남쪽을 바라보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방위 관념을 따랐다. 가령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을 보면 임금이 전각 안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 있고 섬돌 아래에서는 신하들이 각기 품석(品石)에 의거해 북쪽을 향해 기립했다. 이뿐 아니다. 좌·우의 위치 역시 북쪽에서 남쪽을 굽어보고 있는 임금을 중심으로 결정됐다. 예컨대 좌·우의 수군절도사가 있었던 전라도의 경우 그 각각의 본거지인 좌수영(左水營)은 여수에, 우수영(右水營)은 해남에 있었는데 이것은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남쪽을 바라보았을 때의 좌·우 위치였다. 경상도의 유학을 이퇴계(李退溪)를 중심으로 한 강좌(江左)와 조남명(曺南溟)을 필두로 한 강우(江右)의 두 학파로 나눈다. 이 경우에도 임금의 위치에서 내려다봤을 때 두 학자의 활동 반경이 낙동강 좌측이냐 우측이냐에 따라 강좌·강우로 명명했던 것이다.
북두칠성과 관련된 방위 관념은 일찍이 중국에서 기철학과 결합하여 흥미로운 정치적 은유를 낳는다. 북송 시기 역학(易學)의 대가 소옹(邵雍·1011-1077)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소옹이 낙양(洛陽)의 천진교(天津橋) 위를 벗과 거닐다가 문득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벗이 까닭을 묻자 그는 낙양은 북쪽이라 두견새가 없었는데 이제 그 소리가 들리니 조만간 임금이 남쪽 사람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정치가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또 그러한 이유를 묻자 소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하가 다스려질 때엔 땅기운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어지러워질 때엔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한다. 지금 남쪽의 땅기운이 이르렀는데 새들이 그 기운을 먼저 느낀 것이다.(天下將治, 地氣自北而南. 將亂, 自南而北. 今南方地氣至矣, 禽鳥飛類, 得氣之先者也)”(『송원학안(宋元學案)』 ‘백원학안(百源學案)’) 과연 수년 후 신종(神宗)이 남쪽 출신인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해 무리한 개혁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온 조정이 분쟁에 휩싸이자 소옹의 선견(先見)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다.
사실상 최고의 권부(權府)인 청와대가 지난해 문서유출과 암투로 세인을 놀라게 하더니 새해 들어서도 항명과 유언(流言) 등 상식 이하의 해프닝을 빚고 있다. 지금이 봉건왕조 시대는 아니나 제발 북두칠성의 자미원처럼 중심을 잡고 국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 출처: 중앙일보-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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