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경제민주화 대신 들어간 창조경제는 대선 캠프 때 거론조차 안 됐던 개념”이라며 “경제민주화를 대표공약으로 떠들어놓고 그냥 빼기가 민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국가는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대한민국 헌법 119조 2항)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1987년 헌법에 포함된 ‘경제민주화 조항’이다. 당시 국회 개헌특위에서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았던 김종인(74) 박사가 끝까지 우겨서 들어간 조항이다. 양극화가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이슈로 등장하면서 이 조항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지난 대선의 최대 화두 중 하나였다. 여야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당선과 함께 경제민주화 공약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주도한 김 박사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운명이 됐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 가급적 사람을 피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19일 중앙일보 대회의실에서 진행됐다.
- 경제민주화를 헌법에 명시한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나.
“내가 알기론 없다. 독일 헌법에 명기된 ‘사회적 시장경제’가 어떤 면에서는 경제민주화와 비슷한 의미일 순 있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굳이 헌법에 명문화한 것은 재벌이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인가.
“압축성장 과정에서 한국의 경제·사회 구조는 왜곡될 대로 왜곡됐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막강한 경제세력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예컨대 정부가 재벌들에 대해 뭐라고 하면 재벌들은 위헌이니 자유주의 시장경제 원칙 위배니 뭐니 하며 반발하지 않겠나. 재벌들이 여론 시장과 법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적인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뭐라고 판결하겠나. 그게 뻔히 내다보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있고 없고를 떠나 경제민주화 조항이 우리나라 헌법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도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나.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경제민주화 공약이 선거에 도움이 되니까 얘기했던 것이지 경제민주화가 국가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에 대한 깊은 철학이나 확신은 없었다고 본다.”
- 그럼에도 박 대통령을 믿고 경제민주화에 기대를 건 것은 너무 순진했던 것 아닌가.
“박 대통령만큼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는 정치인은 없다고 봤다. 세종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수정안이 합리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선거 때 국민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원안대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소신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자기 입으로 경제민주화를 약속해 놓고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 사람 보는 눈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래서 국민께 죄송하다고 했다.”
- 결국 귀하도 속고, 국민도 속은 것 아닌가.
“경제민주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당선 후 인수위원회에서 국정과제를 정리하면서 경제민주화를 빼고 대신 창조경제를 집어넣었다. 창조경제는 대선 캠프 때 거론조차 안 됐던 개념이다. 경제민주화를 대표공약으로 떠들어놓고 그냥 빼기가 민망했을 것이다.”
- 박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로서 경제민주화를 핵심 과목으로 잡은 이유가 뭔가.
“일본이나 중국이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해서 동북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50년대에 재벌을 해체했지만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 60년대 들어 거대 경제세력이 다시 등장했다. 그때부터 일본의 재계가 정치·경제·언론을 다 장악했다. 일본 교육은 비판적 능력을 배양하기보다 적응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 모든 게 비판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된 것은 결국 그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 일본 대사관과 언론에서 끊임없이 날 찾아와 ‘왜 경제민주화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더라. 내 대답은 늘 똑같았다. ‘당신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 정부가 바로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압축성장 25년, 정치민주화 25년 이후 왜곡된 나라의 틀을 바꿔주지 않고서 재도약을 한다는 것은 공허한 얘기다.”
- 이미 시장의 권력은 정부에서 재벌로 넘어갔다. 재벌공화국을 되돌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아닌가.
“재벌들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이런 상태로 가는 것이 과연 자신들에게 장기적으로 유리한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역대 정권 모두 재벌을 끼지 않으면 경제가 안 돌아갈 것처럼 말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도 친재벌 쪽으로 갔다. 이명박 정부는 한술 더 떴다.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밀어붙이기 전에는 경제민주화가 어렵다.”
-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 경제 기자회견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경제에 올인하는 모습 보였다.
“말은 많이 했지만 내용은 별로 없었다.”
- 경제혁신과 구조개혁을 강조한 것은 나름 평가할 만하지 않나.
“조선·중공업·석유화학·자동차 등 우리나라 주력 업종의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부문을 구조적으로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가 더 시급한 문제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다. 유가가 지금 추세로 계속 떨어지면 중동에 나가 있는 우리 업체들의 캐시플로(cash flow·유동성)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무 얘기가 없다.”
- 박근혜 정부가 아베노믹스를 따라 한다고 비판했는데.
“최경환 경제팀은 아베노믹스가 나오기 전의 일본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다. 93년부터 일본은 구조적인 문제를 무시하고 경기부양한다고 매년 1000억 달러를 10년 동안 쏟아부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오부치 총리 때는 소비 수요를 늘리겠다며 상품권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 역시 아무 효과 못 보고 웃음거리만 됐다. 아베 총리도 일본 국민의 사기를 높인다고 열심히 돈을 풀었지만 지난 2년간 아무 성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일본이 모르는 게 있다. 일본의 시장구조가 옛날과 다르다는 점이다. 1억3000만이라는 인구가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데 최적의 사이즈였는데 지금은 그 시장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고 있다. 고령화 때문이다. 65세 이상 인구가 25%나 되고, 60세 이상 인구가 가진 저축이 전체 저축의 3분의 2에 달한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 수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기업 유보금이 국내총생산(GDP)의 44%로, 2조 달러가 넘는다. 한국도 34%로 비슷하다. 돈을 갖고도 투자를 않는데 금리 내리고 돈을 푼다고 기업들이 투자를 하겠나. 아베노믹스가 정치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경제를 아는 사람이 보기엔 성공하기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 최경환 팀이다.”
- 얼마전 나온 경기부양책을 보면 과거에 다 나온 것을 포장만 바꿔 다시 내놓은 느낌이다.
“어떤 의미에서 박 대통령이 경제부처 사람들에게 속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권만 잡으면 다 경제 살린다고 난리를 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이제 3% 정도 성장을 하면 정상이라고 봐야 한다. 그 정도면 경기부양이고 뭐고 특별히 할 것도 없다. 박근혜 정부에는 경제기술자만 있지 경제정책가가 없다. 경제정책가는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져야 한다. 변화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서 무엇을 어떻게 바꿀지 종합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게 안 보인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하는 얘기가 많은데 이게 의미 있는 논쟁인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복지는 재정 능력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지 그 범위를 초월해서는 할 수가 없다. 문제는 복지를 정확하게 설계해서 그에 합당한 재원 조달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안 하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 필요하면 복지를 위해 증세도 해야 하나.
“물론이다. 지난 선거 기간 동안에도 그런 얘기를 했다. 초년도에는 이명박 정부가 만들어놓은 예산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증세를 할 수 없지만 집권 후 1년 동안 검토해서 추가 소요가 있으면 부가세 인상 등을 통해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 부자 증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부자 증세로 늘어나는 세입에는 한계가 있다. 그걸로는 복지재정을 충당할 수 없다. 부가세처럼 국민 전체가 부담하는 구조로 가야 한다.”
- 박 대통령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인사인데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나.
“밖에서는 박 대통령이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정치에 참여한 지 15년 동안 자신에게 딱 맞게 익숙해진 시스템을 떠나서는 일을 하기가 굉장히 어렵게 돼 있다. 대선 기간 동안 내가 느낀 게 바로 그거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인적 쇄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런 시스템에 의해 인사를 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그렇다.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해서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대통령 스스로 자각하기 전에는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이 임기 끝까지 이어질 걸로 본다. 성공 여부는 그때 가서 판단할 일이다.”
- 박 대통령 리더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역풍을 맞으며 항해를 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순항을 하려면 바람의 방향에 맞춰 돛대를 바꿔 달아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순항하기 힘들다.”
-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사람이 대통령 비판 대열에 동참하는 것은 모양이 안 좋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지적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팩트를 갖고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지적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 앞으로 어떻게 지낼 생각인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탓인지 사람들 만나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최근에는 사람들을 별로 안 만나고 있다. 얘기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사진=신인섭 기자
[인터뷰 후기] “재벌 자신을 위해서도 경제민주화는 필요”
김 박사를 만나기 전 그가 쓴 책을 다시 읽었다. 대선 한 달 전인 2012년 11월 나온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이다. 책에서 그는 경제민주화는 재벌 죽이기나 재벌 해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암탉이 앞마당에서 이것저것 다 쪼아먹고 다닌다고 잡아다 목을 비틀면 알은 누가 낳느냐는 것이다. 다만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하지 못하는 시장의 문제를 국가의 보이는 손이 해결함으로써 경쟁과 평등의 가치가 조화를 이루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지속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취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은 재벌 자신의 존립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을 열심히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박 대통령 스스로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에 공감해 대표공약으로 채택까지 했지만 당선되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입을 싹 씻었다. 그로 인한 실망감에서 아직도 그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김 박사는 경제민주화의 관점에서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분석한 부분을 추가한 이 책의 증보판을 준비하고 있다.
김종인 박사는 …
1940년 서울 출생. 58년 중앙고 졸업. 64년 한국외대 독일어과 졸업. 69년 독일 뮌스터대 경제학 석사. 72년 뮌스터대 경제학 박사. 73년 서강대(경제학) 교수. 74년 총리실 평가교수단 평가교수. 81년 국보위 재무분과위원. 81년 국회의원(민정당·비례대표) 11·12·14·17대 국회의원. 89년 보건사회부 장관. 90년 청와대 경제수석. 2011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2012년 박근혜 후보 경선 및 대선 캠프 참여,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