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Greco-Persian Wars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가 거의 반세기에 걸쳐 치른 일련의 전쟁(BC 492경~449경).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것은 BC 480~BC 479년 페르시아가 2차례에 걸쳐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을 때였다. 페르시아의 세력은 당시 절정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의 집단 방어는 겉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우열의 차이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 주변에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해방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리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그리스 문화와 정치 체제는 페르시아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BC 522년까지 약 30년 동안 페르시아 왕 키로스와 캄비세스는 영토를 확장해서 그 경계가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에게 해에 이르렀다.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가 패한(BC 546경) 뒤, 페르시아인들은 아나톨리아 해안 주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BC 522년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통합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BC 514년에 그는 유럽 침략을 준비했다. 그는 우선 스키타이를 공격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까지 깊숙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까지 오는 동안 그의 군대는 기진맥진해 더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먼 길을 후퇴하는 동안 스키타이인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자 다리우스는 유럽과 아시아의 접경 부근에 있는 트라키아 남부에 상설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BC 500년에 아나톨리아 해안의 이오니아계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색인 : 이오니아 반란). 페르시아는 BC 492년까지 반란을 진압했지만, 저항이 계속되는 바람에 다리우스는 그리스 본토 침략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여러 도시국가들이 대등한 관계로 협력한 반란 방식은 나중에 그리스 본토 방어의 본보기가 되었다. BC 491년 다리우스가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공격하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서로 싸우고 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싸움을 그쳤다.
약 2만 5,000명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군은 BC 490년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아테네인들은 이 사실을 스파르타에 알려 힘을 합해 침략자와 싸우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종교축제 때문에 파병을 지체했고, 아테네인들은 1만 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군과 맞서야 했다(→ 색인 : 마라톤 전투). 이때 아테네군을 도와준 것은 플라타이아에서 온 1,000명의 지원군뿐이었다.
아테네군을 지휘한 10명의 장군 가운데 가장 용맹한 사람은 밀티아데스였다. 페르시아 기병대가 멀리 있는 동안 그는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스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역사가 헤로도토스의 말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이 6,400명을 잃은 반면에 그리스군의 손실은 192명에 불과했다. 이어서 그리스군은 재빨리 후퇴하여 페르시아군의 아테네 기습을 막았다.
마라톤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본국으로 철수했지만, 10년 뒤에는 훨씬 큰 규모로 다시 그리스 본토를 침공했다. 이번에 페르시아군을 지휘한 사람은 다리우스의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였다. 유례 없이 많은 병력 때문에 그들의 전진은 느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리스인들은 그 동안 충분히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30개 도시국가가 참여한 그리스 동맹이 스파르타의 주도로 결성된 것이다.
육군 지휘권은 스파르타가 맡았고, 해군 지휘권은 아테네가 맡았으며, 각국이 한 표씩 투표권을 갖는 의회가 동맹 전체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테르모필라이 협로에 약 7,000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아르테미시움에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전함 271척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날씨 때문에 많은 병력을 잃고도 그리스군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페르시아군은 480년 8월 3일 동안 그리스군과 싸웠다. 바다에서는 200척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 해군 선발대가 그리스 함대를 기습했다. 그러나 적의 작전을 미리 눈치챈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해군 선발대를 우회하고 본대와 직접 교전했다. 이날 밤 거센 폭풍우가 일어나는 바람에 페르시아 함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리스 함대는 안전한 항구에 대피해 있었다.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라이에서 2일 동안 그리스군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많은 병력을 잃었다(→ 색인 : 테르모필라이 전투). 그러나 2일째 되는 밤, 그리스의 한 반역자가 협로를 우회하여 그리스군 배후로 페르시아 정예부대를 안내했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대부분의 그리스군을 안전한 남쪽으로 급히 대피시키고, 뒤에 남은 스파르타 및 테스피아의 병사들과 함께 테르모필라이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테르모필라이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해군을 공격하여 양쪽이 많은 전함을 잃었다. 크세르크세스 군대는 그들에게 가담한 북부 그리스인들의 도움을 얻어 남쪽으로 행군했다.
9월에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불태웠지만 이때쯤 아테네 시민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난해 있었다. 한편 그리스군은 살라미스 해협에 함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색인 : 살라미스 해전). 테미스토클레스는 후퇴하는 척하며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는 교묘한 전략을 썼다.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의 책략에 넘어갔고, 뒤이어 벌어진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 직후 페르시아 해군은 아시아로 철수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해 겨울에 페르시아로 돌아갔지만, 그의 군대는 BC 479년 여름까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마침내 그리스에서 쫓겨난 것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와 테게아 및 아테네 연합군에 패한 뒤였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함대와 싸우기를 거부하고 배를 해변에 끌어올려둔 채 레오티키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육군에 가담했다.
페르시아의 침략은 플라타이아 전투와 미칼레 전투로 끝났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싸움은 그후에도 30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테네의 주도로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아나톨리아 해안에 있는 이오니아계 도시국가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쳤다. 이들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고, BC 448년경에는 마침내 아테네와 그 동맹국 및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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