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이(김개시)는 원래 선조 때의 궁인이었다. 선조에게 사랑을 입었는데 사람됨이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가 불안할 것이라 여기고는 은밀히 그와 접촉하여 뒷날의 계획을 세웠다. (중략) 광해가 탐욕스럽고 음란하였으므로 개똥이가 안팎에서 제 마음대로 하며 이이첨과 어울렸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가 하면, 대궐 안의 모든 일이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연려실기술’은 상궁 김개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비상한 재주 덕분에 임금의 총애를 얻고 권력을 휘두르다가 끝내 나라를 그르친 악녀다. 드라마 ‘화정’에 등장하는 김개시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 광해와 내통해 선조를 독살하고, 대비에게 저주의 누명을 씌우는 권모술수의 달인이다. 후궁도 아닌 일개 궁녀가, 과연 이런 엄청난 일들을 벌일 수 있었을까? 정말 광해는 김개시에게 놀아나는 바람에 왕좌에서 쫓겨났을까?
‘개시(介屎)’라는 이름은 ‘개똥이’의 한자식 표현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김개시는 천한 노비 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내력은 별로 알려진 바 없다. 그녀가 어린 시절 구중궁궐로 들어간 궁녀였기 때문이다. 궁녀사회는 물음표의 세계다. 사료에도 궁녀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언급되지 않는다. 김개시의 경우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계축일기’ 등에 실리기는 했지만 팩트 없이 의혹을 제기하고 매도하는 수준이다.
선조 독살설만 해도 그렇다. ‘연려실기술’은 ‘선조가 동궁에서 올린 약밥을 먹고 세상을 떠났는데, (독)약으로 임금을 시해하는 참변이 개시의 손에서 나왔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가 광해의 죄목에 부왕(선조)을 죽였다는 항목을 집어넣으며 거꾸로 짜 맞춘 설이다. 정황은 있지만 근거는 미흡하다. 오죽하면 인조가 힘써 이 설을 물리쳤을까. 그는 선조가 위독할 때 자신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며 독살설을 부인했다.
의인왕후(선조의 원비)와 광해에 대한 인목대비 측의 ‘무고(巫蠱 : 무속으로 남을 저주하는 일)’는 또 다른 문제다. 대비의 입장에서 쓴 ‘계축일기’를 보면 이 무고는 모두 날조된 것이며 그 주동자는 김개시라고 주장한다.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이기 위해 꾸민 조작극이라는 것. 광해 정권의 숨은 실세답게 김개시가 특유의 권모술수를 발휘한 걸까? 그러나 조선시대 구중궁궐에서 무고를 둘러싼 암투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김개시는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부풀려진 인물이다. 사실 그녀는 궁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김개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 궁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중기의 궁녀는 대체로 공노비 출신이 많았으며 주종관계가 확실했다. 한 번 처소에 배정되면 그 주인이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켜야 한다. 대전에서는 임금이, 중궁전에서는 왕비가, 대비전에서는 대비가, 동궁에서는 세자가 하늘이다. 업무는 지밀(침실), 침방(의복), 수방(자수), 소주방(식사), 생과방(간식), 세수간(목욕), 세답방(빨래) 등으로 나누고 주인의 시중을 들며 능력을 길러나갔다.
김개시는 동궁에서 광해와 인연을 맺고 대전까지 오랜 세월 함께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를 향한 그녀의 충성심은 일하는 데 거추장스럽다 하여 후궁 자리까지 마다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개시가 인목대비의 대척점에 선 것도 바로 이 주종 간의 의리 때문이다. 그녀는 광해를 위해 대비의 수족을 잘라내고 힘을 무력화시켰다. 심지어 대비전의 궁녀들까지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했다. 인목대비는 이를 갈면서 별렀을 터.
인조반정이 일어난 다음날(1623년 3월 13일), 김개시는 정업원 근처 민가에 숨어 있다가 현장에서 칼을 맞았다. 주인 대신 척살대상 1순위에 오른 것이다. 뒤늦게 반정주역 중 한 사람인 김자점과 거래를 해봤지만 틀어진 모양이다. 광해의 음지에서 권력의 양지를 넘본다 한들 궁녀인 그녀가 발 디딜 곳은 없었다.
* 출처: 머니투데이
<참고>
김개시(金介屎)
?∼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상궁.
미모의 여인도 아니었으나,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인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권세를 힘입어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국정을 크게 문란시켰다.
이에 윤선도(尹善道)·이회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논핵했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는 등 광해군 일대를 통하여 권세를 누리었다.
1623년(광해군 15)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잡혀 참수당했다.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김개시에 대한 평
"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이름이 개시인 김상궁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았고 교활하며 계략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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