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Seraphicus Grillparzer, 1791년 1월 15일 ~ 1872년 1월 21일)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다.
괴테, 실러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최초의 고전적인 극작가로서 19세기 초엽의 낭만주의 연극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빈에서는 1808년 이후 낭만주의의 거성 슐레겔이 극문학을 강의하고 있었으며, 운명극의 작가 베르너는 만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빈에서 설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릴파르처의 처녀작 <여자 조상>(1817)은 분명히 낭만주의의 운명극을 본뜬 것이며 또한 오스트리아적 성격이나 비더마이어적인 교훈을 반영하고 있다고는 하나 실재와 가상의 2원(二元)을 테마로 한 <꿈도 인생>(1834)에서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볼 수 있다. 이 표제(表題)는 또한 셰익스피어와 함께 낭만주의의 사람들에 의해 재발견된 칼데론의 작품에 의하고 있다.
그릴파르처는 또한 극시의 운문에서도 독일 고전극으로 확립된 5각 억양격(五脚抑揚格)이 아니라 4각 억양격을 시도하고 있다. 일련의 사극 중 대표작인 <오토카르왕의 행복과 최후(Konig Ottokars Gluck und Ende)>(1825), <합스부르크가(家)의 형제싸움>은 고전적인 작풍이나, 프라그의 전설적 건국을 다루는 <리부사(Libussa)>에서는 그 국민적·국가적 지향(志向)에 있어서 낭만주의와도 통한다. 이 테마는 브렌타노가 <프라그 창립>에서 다룬 것과 같다. 그러나 무한한 확대를 너무 구한 나머지 정통적인 드라마 형식에서 벗어나거나 단편인 채 끝나버리는 낭만극에 비하면 그릴파르처는 완결된 극 형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사포(Sappho)>(1819), <금양모피(金羊毛皮, Das Goldene Vlies)>(1822), <바다의 물결, 사랑의 물결(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1840) 등의 대표작은 차라리 고전적인 경향이 짙다고 하겠다.
그릴파르처의 작품은 희극 <속이는 자에게 재앙 있으라>의 실패(1838) 이후 만년에 재평가를 받기까지 한동안 빈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 시기는 민중극의 전성기이기도 했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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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극들은 뒤늦게야 오스트리아 연극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과묵하며 애국적인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1809년 빚을 남긴 채 죽었고, 재능있는 음악가 집안 출신이던 어머니는 신경쇠약 증세가 매우 심해 10년 뒤에 자살했다.
그릴파르처는 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생애의 대부분을 공직에서 보냈다. 1814년 국세청의 세무사로 시작해 1818년 재무부의 사무관, 그뒤 재무부 문서국의 국장이 되었으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자 1856년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1817년 비극 〈할머니 Die Ahnfrau〉의 첫 공연으로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앞서 무운시(無韻詩)로 썼던 희곡 〈블랑카 폰 카스틸리엔 Blanka von Castilien〉에서는 이미 뒤의 여러 작품에서 나오는 조용하고 전원적인 삶과 행동적인 삶의 대조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장단격(長短格)의 스페인 운문형식으로 쓴 〈할머니〉는 당시 인기있던 운명극의 외적 요소들을 상당히 지니고 있으나,궁극적으로는 등장인물들 자신이 그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단숨에 쓴 비극 〈사포 Sappho〉(1818)는 그의 성숙을 확연히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의 비극적 운명은 평범한 남자와의 불행한 사랑뿐 아니라 삶과 예술을 조화시키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그릴파르처 자신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3부작 〈황금양털 Das Goldene Vlies〉(1821)의 집필은 어머니의 자살과 자신의 병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얻은 이 비극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메데아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염세적이며 절망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영적인 삶과 현실적 삶 사이의 갈등이 어쩔 수 없이 체념과 절망을 낳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비극 〈오토카르 왕의 행운과 최후 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는 심미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이 비극은 1823년에 썼으나 검열에 걸려 1825년까지 공연과 출판이 허용되지 않았다. 줄거리는 오스트리아 역사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합스부르크가(家)의 루돌프(그릴파르처의 인물들 중 죄악과 비극을 피한 최초의 인물)의 부상이 보헤미아의 전제군주 오토카르의 몰락과 대비되기 때문에, 오토카르의 비극적 운명이 인류 전체의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릴파르처는 이 작품과 다음 작품에 대한 평판에 실망하고 검열관의 반대에 용기를 잃게 되었다.
1820~21년 겨울에 만난 카타리나 프뢸리히(1800~79)를 사랑했으나, 예술가는 개인적인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는 신념 때문에 결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시기의 정신적 고통은 일기뿐 아니라 〈비애의 심연 Tristia ex Ponto〉(1835)이라는 제목의 인상적인 연작시에서도 나타난다.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되어 그릴파르처의 가장 훌륭한 비극으로 꼽히는 〈바다와 사랑의 물결 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1831)은 고전적 주제로 돌아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심리적 통찰이 뛰어나 입센의 희곡을 예고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진정한 사명감이 결여된 여사제 헤로는 자신이 한 맹세를 잊고 레안드로스를 맹목적으로 사랑하여, 레안드로스가 죽자 상심한 나머지 죽는다. 이 비극은 생명적 본능의 여파가 인간의 내적 조화와 냉정을 모두 뺏는 것을 보여준다.
〈꿈은 삶이다 Der Traum ein Leben〉(1834)는 스페인 희곡에 대한 깊이 있고 오랜 연구의 소산이다. 오스트리아의 〈파우스트〉로 불리는 이 희곡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데, 야심에 찬 젊은 농부 루스탄이 자신을 죄악에 빠뜨리는 모험들을 꿈꾸다가 깨어나 세속적인 열망의 무상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유일한 희극 〈거짓말쟁이에게 화 있으라! Weh dem, der lügt!〉(1838)는 대중들의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위선자라고 생각할 때에도 주인공은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는 주제가 희극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미묘하고 진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840년대부터는 더이상 희곡을 발표하지 않았고 다른 글도 거의 쓰지 않았으나, 말년에 명성을 얻기 시작해 1861년에는 빈의 상원(귀족원)에 선출되었고, 그의 80회 생일은 국가적 경사였으며, 1872년 그가 빈에서 죽었을 때는 모두 슬퍼했다. 죽은 뒤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비극 3편이 원고더미에서 발견되었다. 〈톨레도의 유대 여인 Die Jüdin von Toledo〉은 스페인적 주제에 바탕을 두고 젊은 유대 여인에 대한 왕의 비극적 사랑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으로 왕비의 명령으로 그녀가 살해된 뒤에야 왕은 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합스부르크가의 형제싸움 Ein Bruderzwist in Habsburg〉은 깊이 있고 감동적인 역사 비극으로 공연에 성공할 수 있는 극적 줄거리는 없지만 황제 루돌프 2세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장 성숙된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리부사 Libussa〉에서는 문명이라는 합리적인 단계를 넘어선 인간의 발전을 예견했다.
스페인 희곡에 관한 평론과 사후 출판된 자서전 외에 가장 뛰어난 산문은 단편소설 〈불쌍한 악사 Der arme Spielmann〉(1848)인데, 가난한 악사가 인생의 실패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남을 도우려 애쓰다가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릴파르처의 작품은 위대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성과를 반영하며 이상주의에 대한 환멸로부터 현실과의 타협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글을 쓰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무대에 올리기에 적절한 희곡을 쓴 보기 드문 극작가였다. 괴테나 실러와는 달리 그는 교양있는 사람이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 모두의 특징을 살려 대화를 썼으며, 또한 구어체와 유머, 대중적인 소극(笑劇)의 요소들을 도입했다. 그의 희곡의 주요한 극적 갈등은 종종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그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해결은 순응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 메테르니히 체제의 검열과 억압에 시달렸던 것이 사실이나 그의 불행은 주로 자신의 성격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데 있었던 듯하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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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친구들의 청에 따라 베토벤 죽음에 대한 추도사를 썼다. 베토벤은 그릴파르처와 함께 "멜루지네(Melusine)"란 오페라를 만들 계획을 세웠었지만 베토벤의 바쁜 일정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슈베르트와도 깊은 친교가 있었던 그릴파르처는 베토벤의 미학적 견해에는 공감을 안 한듯 하다. 베토벤을 방문한 소감을 기록한 글이 있으며 베토벤을 진정으로 사랑했단 기록도 남기고 있다. <이덕희 님의 "왜 베토벤인가"라는 책 262~ 269쪽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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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의 의미
손 위에 하는 것은
존경의 키스
이마 위에 하는 것은
우정의 키스
뺨 위에 하는 것은
감사의 키스
입술 위에 하는 것은
사랑의 키스
감은 눈 위에 하는 것은
기쁨의 키스
손바닥 위에라면
간구의 키스 ...
- 프란츠 그릴파르처, Kiss 중에서<출처:http://blog.naver.com/africaphoto/22013224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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