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 윤충로 지음 |푸른역사 | 402쪽 | 2만5000원
가난이 싫어 베트남전쟁에 자원한 어떤 군인은 “베트남보다 한국이 지옥”이라고 믿으며 전쟁을 충실히 수행했다. 모범 파월 군인이었던 그는 귀국 후에도 베트남 향수를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참전 군인단체를 결성하고, 군복을 일상복처럼 입고 다니며 옛 전우들과 어울리며 자주 술을 마셨다. 자연스레 가족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결국 이혼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베트남으로 달려갔다. “여기 와 가지고 그 당시에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꿈, 꿈, 꿈속을 헤매는 그런 기분으로 만날 살았어요.” 그는 베트남에서 재혼했고,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고 전쟁 관련 물품을 모으는 취미를 즐기며 산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끝났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종전했을망정 개인 차원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은 흔히 잊혀진 전쟁으로 인식되는데 저자는 이런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은 ‘오래된 현재’다. 이런 주장은 참전 장병 25명의 육성을 통해 뒷받침된다.
책은 생생한 구술 자료를 토대로 국가 차원이 아닌 시민 차원에서 베트남전쟁을 재조명한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흔히 반공주의와 근대화로 압축된다. 하지만 전장을 몸소 체험한 군인 낱낱의 전쟁 기억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국가는 평화의 십자군이니 반공의 첨병이니 하는 수사로 파월 장병을 규정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장병 대다수는 마지못해 끌려가거나 찢어지는 가난을 벗어날 차선책으로 파월을 선택했다. 또 “한국에서 가혹한 군생활을 하느니 차라리…”라는 심정으로 자원하거나 사나이다움을 좇아 전장으로 간 경우도 있다. 이들의 베트남전쟁은 반공주의니 애국주의니 하는 거대담론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돈 준다니까 갔고, 가야 할 형편이니까 갔을 뿐이지, 그 나라에 민주주의를 찾아준다고 간 사람은 아니거든.” 한 군인의 말은 파월 장병의 심리를 포괄한다. 초창기 파월은 강제적이었는데 적잖은 장병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탈영했다. 그리고 어느 전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거기에 반공, 민주, 애국 따위의 이념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베트남전쟁사에서 외면당한 미시적 사건들의 발굴이다. 특히 ‘한진’이라는 기업이 치른 베트남전쟁은 역사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았다. 한진은 베트남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물자 운송을 주로 맡았는데, 화물차 3~4대로 출발해 월남특수를 톡톡히 누리며 급성장했다. 한국인 파월 기술자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또 정치적 기민함으로 전장에서 대박을 터트린 한진은 많은 대기업의 성장사를 압축적으로 은유한다.
국가는 근대화 구호를 요란하게 외쳐댔지만 후방의 시민은 텔레비전, 미제 RCA 라디오, 미군 야전식량 ‘시레이션’ 등을 통해 이를 체감했다. 보릿고개가 흔한 시절 시민 차원에서 파월은 돈 되는 일로 인식됐고, 가난의 돌파구로 비쳤다. 이에 편승한 국가는 경제발전이라는 논리로 전쟁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리는 신화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병사들의 핏값으로 치른 전쟁이 한국 사회를 근대화하기는커녕 개인 및 지역사회에 큰 후유증을 안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베트남전쟁 종전 40여년이 지났지만 그 후유증이 과연 치유됐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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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전쟁·월남붐에 가려진 '군번 없는 군인' 민간 기술자와
참전군인 등의 작은 역사들… 정치·외교 등 기존의 접근과 차별
베트남전쟁의 한국사회사· 윤충로 지음· 푸른역사 발행ㆍ402쪽ㆍ2만5,000원
베트남전쟁(1960~1975)이 끝난 지 올해로 40년, 한국은 이 전쟁을 무심히 돌아볼 수 없다. 당시 파병된 참전군인과 돈 벌러 갔던 노동자들, 전쟁 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목격한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의 기억은 날로 흐릿해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영향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극우단체의 정치집회에 군복을 입고 나타나는 참전 노병들과, 그들을 안쓰럽게 또는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눈길만이 전쟁을 환기시킬 뿐이다. 파월 장병의 뒤를 따라 전장으로 갔던 파월 기술자들은 존재마저 잊혔다.
사회학자 윤충로가 쓴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는 베트남전쟁이 ‘잊힌 전쟁’이 아니라 ‘오래된 현재’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풀기 위해 참전군인과 파월 기술자 등 55명을 만나 구술을 듣고 이를 토대로 베트남전쟁이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를 파헤친다. 정치ㆍ경제ㆍ외교 등 거시적 측면의 접근이 아니라 전쟁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생한 실체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차별된다. 구술을 중심으로 하되 정부의 공식담화문, 국회회의록, 신문, 잡지, 회고록 같은 문헌자료와 참전자나 그들의 가족이 갖고 있는 사진, 위문편지, 계약서, 참전을 독려하는 표어, 노래 등 관련 자료를 폭넓게 활용해 풍부하고 입체적인 성과를 내놓았다.
베트남으로 가는 백마부대 환송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당시 정권은 자유와 반공의 이름으로 참전을 정당화하고 이를 널리 선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공식적인 기억이 무시했거나 억압한 ‘작은 역사들’이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다. 자유의 이름으로 참전한 ‘반공전쟁’, 전장의 핏값으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경제 전쟁’. 그러나 정작 참전군인들에게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인 게 아니었다. 저자가 만난 구술자들은 강제 차출됐거나, 당시 한국에서 아무 희망도 찾지 못해 돈이라도 벌자고 떠났다고 회고했다. 전장에서는 오직 생존이 목표였고, 용맹은 비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몸짓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연인원 32만 5,000여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5,099명이 죽고 1만 962명이 다쳤다. 그에 비해 당시 2만 4,000여명의 민간 기술자들이 베트남에 취업해 군번 없는 군인이나 다름없이 전장을 경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파월 기술자들이 겪은 전쟁 이야기에 따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파월 기술자는 미국의 군사지원기업 빈넬 등의 직원이 많았는데, 한국 기업에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미군 군수품의 항만 하역과 육로 운송을 맡아 급성장한 한진. 최근 ‘땅콩회항’으로 지탄을 받은 대한한공의 바로 그 한진이다. 당시 ‘월남상사’로 불린 한진상사는 전쟁을 통해 돈더미 위에 올라앉았지만, 노동자 대우는 열악했다. 1971년 서울의 칼 빌딩 방화사건은 철모를 쓰고 실탄과 총을 갖춘 채 운송 차량을 몰아야 하는 위험한 현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귀국한 한진 기술자들이 미불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벌인 항의였다. 이 사건은 베트남 특수에 가려져 있던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 폭발한 사례이자 파월 특수의 끝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벌인 위문편지, 위문단 공연, 파월장병 가족 돕기 같은 갖가지 국가동원 체제의 우스꽝스런 소동 역시 돌아본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한국 사회의 갈등을 다룬 마지막 제 4부다. 그 중에도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중 하나인 기념비는 전쟁의 기억이 ‘기억의 전쟁’으로 둔갑한 오늘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세 개의 기념비를 비교한다. 베트남전쟁 당시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가 차례로 주둔했던 베트남 푸옌성의 한국-베트남평화공원, 참전군인단체인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베트남 하미마을에 세운 위령비, 그리고 관 주도로 강원도가 화천군에 만든 베트남 참전용사 만남의 장이다. 한국의 한 언론사 캠페인으로 세워진 푸옌성의 평화공원은 화해의 제스처로 의미 있는 장소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 될 만큼 관심 밖이다. 하미마을 위령비는 끝나지 않은 전쟁의 증인이다. 베트남 언론인이 쓴 비문에 들어간 민간인 학살이 논란이 되어 한국 측이 위령비를 바꿀 것을 요구하자 주민들은 비문에 손 대지 않고 대신 연꽃 그림판으로 가렸다. 그렇게 일단 ‘봉인’으로 과거사를 묻어 버렸지만, 걷어내면 드러날 진실이 그 아래 있다. 화천의 참전용사 만남의 장은 안보관광 상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근본적인 문제뿐 아니라 베트남인이 보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재현물을 버젓이 세워놨다.
베트남 하미마을의 위령비. 민간인 학살을 기록한 비문을 연꽃 그림판으로 덮어 놓았다. 푸른역사 제공.
베트남전쟁은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서 한국이 경험한 가장 큰 전쟁임에도 정작 당사자의 기억은 간과돼 왔다. 저자는 참전자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가 존재하는 한 베트남전쟁은 여전히 ‘현재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가 됐다”며 “이를 위해서는 참전군인의 노력뿐 아니라 사회의 관심과 배려가 필수”라고, “개인의 성찰에 대한 존중, 망각된 기억의 귀환을 함께할 사회적 성찰과 책임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참혹한 전쟁을 ‘월남붐’과 경제적 성취로 수렴하는 발전주의가 전쟁의 상처에 무감하고 이를 망각하는 사회를 연출했다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적실하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숙제를 던진다. “과거의 문은 그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닫히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우리 안의 신화를 해체하고, 전쟁 피해자의 고통을 직시하고 성찰할 때 한국의 베트남전쟁은 현실이 아니라 역사로 남을 것이다. ”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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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여러 상처를 우리 사회에 남겼다. 한 파월장병이 1965년 서울 동대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어머니한테서 뭔가를 받아 먹고있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베트남 현지에서 군대는 전쟁을 벌였고(맹호부대 기갑연대 작전 모습), 일부 참전 군인은 2000년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에 대해 항의했다. 한진그룹 노동자들은 전장에서 총을 옆에 두고 일을 했다. 푸른역사 제공
한국전쟁 이후 최대·최장 전쟁
베트남전 경험한 ‘작은 사람들’
참전군인, 파월 노동자 만났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뭘 남겼나
‘기억 전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
윤충로 지음/푸른역사·2만5000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라는 베트남전쟁(1960~1975)이 올해 종전 40년을 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4~1973년, 8년 넘는 기간 동안 연인원 32만명의 군인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5099명이 숨졌고, 1만962명이 다쳤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우파 정치집회에 등장하는 파월장병 할아버지들이 그 존재를 상기시킬 뿐이다. 한국전쟁은 지금도 끊임없이 기억이 재생산되는 것에 견줘, 베트남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사회학자인 지은이 윤충로는 베트남전쟁이 ‘오래된 현재’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 지극히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지은이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사회사, 문화사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기존의 연구가 정치와 경제 쪽에 집중된 상황에서, 이런 접근은 우리가 잘 모르는 베트남전쟁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또, 이는 베트남전쟁이라는 틀로 박정희 시대를 조명해보자는 시도이기도 하다. 실제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3년 만에 파병을 단행했고, 나중에 그 ‘핏값’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놨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지은이가 거대담론보다 전쟁을 수행했던 각 주체, 그 가운데서도 ‘작은 사람들’을 불러냈다는 점이 이 책의 큰 특징이자 성과다. 25명(병 21명, 장교 4명)에 대한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것인데, 적은 숫자지만 이마저도 귀중한 게 우리의 베트남전쟁 연구의 현주소다. 전쟁 주체의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동안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의 회고록 등만 알려져 있었다.
실제 전선에서 총을 쏘던 소총수 등의 ‘작은 역사’는 어떠했나. 국가에 의한 강제 차출이 있었고, 일주일을 굶으면서 저항했지만 결국 미군의 파월 수송선을 탔다는 증언도 이 책엔 실렸다. 그러나 파월 일진이 귀국한 1966년부터 상황은 바뀌어, 지원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보릿고개가 이어졌던 시절이었던 만큼, 베트남은 민중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땅’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국가는 반공전쟁을 외쳤지만, 정작 민중들은 가난 탈출의 출구로 전쟁을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전장에선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오직 생존이 목표였다. “내가 꼭 살아와야 되겠다는 그 집념만 있는 거지. 전투가 벌어져도 숨을 수밖에 없는 거야.”(청룡부대 이병 소총수) “자대에서 경비를 하고 있는데 밤에 자해를 했어요. 죽을 거 같으니까. 귀국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맹호부대 일병 소총수)
새로운 전쟁 주체도 발굴해 냈다. 베트남에선 군인 외에 2만4천여명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일을 했다. 이들 가운데 8명을 찾아내 ‘노동자의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군번 없는 군인’으로 전장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식 노동 규율 아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특히, 베트남전쟁을 통해 급속히 신흥재벌로 부상한 한진그룹에 대한 사례 연구는 남한 자본주의 성장사의 일부임에 분명하다.
지금은 대한항공과 ‘땅콩회항’으로 유명하지만, 한진그룹은 베트남에서 미군 군수품 수송으로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한진의 노동자들은 철모를 쓰고 소총과 실탄 240발을 옆에 놓고 운전해야 했다. 노동자 200여명은 1971년 미불 임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서울의 칼빌딩을 점거했고 방화사건까지 터졌다. 농성자들 가운데 13명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자 전태일이 몸에 불을 놓고 1년 뒤의 일이다.
군인과 노동자들이 미군에 대한 열등감과 현지 베트남인들에 대한 우월감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월남인들은 게으르고 비위생적이다. 체구도 무척 작다”(한 참전군인)는 이야기는, 우리 속의 식민주의가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방 당시 미군이 우리를 바라보는 태도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들 참전군인들의 이야기가 ‘현재형’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굵은 주장이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겪은 전쟁은 평생토록 이들의 존재와 의식을 놔주지 않았다. 그런데 1975년 종전 뒤, 전쟁은 급격히 잊혀져 갔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12월 재향군인회를 재편하면서 월남참전전우회를 해체했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1992년 한-베트남 공식 수교와 1999년 <한겨레21>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보도 등이 이어졌다. 이에 그동안 친목모임에 머물렀던 참전군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2000년대 ‘기억의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지은이는 이들이 왜 거리에 나가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미국의 경우 많은 참전군인들이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왜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참전군인들은 지금도 예전처럼 베트남전쟁이 이념전쟁이었다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반공·반북 정서는 냉전적 사고를 가진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 대신, 이들은 명예와 보상을 요구했다. 세상의 모든 전쟁에서 참전군인들은 자신의 죽음이 잊히지 않는 것, 명예롭게 기억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대우해 달라고. 경제성장의 첫 바탕은 우리로 인해 얻은 것 아닌가. 인원이 너무 많다면 우리를 유공자로 해서 명예만이라도.”(한 참전군인)
이런 상황에서 지은이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묻는다. 일종의 과거청산인 셈인데, 사회적 합의의 길은 멀기만 하다. 보수진영은 ‘반공 성전’의 이데올로기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참전군인을 가해자로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단선적 태도는 자칫 이들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지은이는 세곳의 베트남전쟁 기념시설을 살펴보면서 지금도 ‘기억전쟁’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3년 6월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의 팜티호아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았던 할머니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과거 원한은 내가 다 안고 갈 거야. 그러니 한국 친구들 오면 잘 대해줘. 마을 사람들한테 이제 그만 미워하라고 해. 그 불쌍한 것들….” 해답은 이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있는지 모른다.
* 한겨레신문 -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