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여러 상처를 우리 사회에 남겼다. 한 파월장병이 1965년 서울 동대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어머니한테서 뭔가를 받아 먹고있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베트남 현지에서 군대는 전쟁을 벌였고(맹호부대 기갑연대 작전 모습), 일부 참전 군인은 2000년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에 대해 항의했다. 한진그룹 노동자들은 전장에서 총을 옆에 두고 일을 했다.   푸른역사 제공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여러 상처를 우리 사회에 남겼다. 한 파월장병이 1965년 서울 동대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어머니한테서 뭔가를 받아 먹고있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베트남 현지에서 군대는 전쟁을 벌였고(맹호부대 기갑연대 작전 모습), 일부 참전 군인은 2000년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에 대해 항의했다. 한진그룹 노동자들은 전장에서 총을 옆에 두고 일을 했다.  푸른역사 제공
한국전쟁 이후 최대·최장 전쟁
베트남전 경험한 ‘작은 사람들’
참전군인, 파월 노동자 만났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뭘 남겼나
‘기억 전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
윤충로 지음/푸른역사·2만5000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라는 베트남전쟁(1960~1975)이 올해 종전 40년을 맞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4~1973년, 8년 넘는 기간 동안 연인원 32만명의 군인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5099명이 숨졌고, 1만962명이 다쳤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우파 정치집회에 등장하는 파월장병 할아버지들이 그 존재를 상기시킬 뿐이다. 한국전쟁은 지금도 끊임없이 기억이 재생산되는 것에 견줘, 베트남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사회학자인 지은이 윤충로는 베트남전쟁이 ‘오래된 현재’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 지극히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지은이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사회사, 문화사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기존의 연구가 정치와 경제 쪽에 집중된 상황에서, 이런 접근은 우리가 잘 모르는 베트남전쟁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또, 이는 베트남전쟁이라는 틀로 박정희 시대를 조명해보자는 시도이기도 하다. 실제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3년 만에 파병을 단행했고, 나중에 그 ‘핏값’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놨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지은이가 거대담론보다 전쟁을 수행했던 각 주체, 그 가운데서도 ‘작은 사람들’을 불러냈다는 점이 이 책의 큰 특징이자 성과다. 25명(병 21명, 장교 4명)에 대한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것인데, 적은 숫자지만 이마저도 귀중한 게 우리의 베트남전쟁 연구의 현주소다. 전쟁 주체의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동안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의 회고록 등만 알려져 있었다.

실제 전선에서 총을 쏘던 소총수 등의 ‘작은 역사’는 어떠했나. 국가에 의한 강제 차출이 있었고, 일주일을 굶으면서 저항했지만 결국 미군의 파월 수송선을 탔다는 증언도 이 책엔 실렸다. 그러나 파월 일진이 귀국한 1966년부터 상황은 바뀌어, 지원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보릿고개가 이어졌던 시절이었던 만큼, 베트남은 민중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땅’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국가는 반공전쟁을 외쳤지만, 정작 민중들은 가난 탈출의 출구로 전쟁을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전장에선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오직 생존이 목표였다. “내가 꼭 살아와야 되겠다는 그 집념만 있는 거지. 전투가 벌어져도 숨을 수밖에 없는 거야.”(청룡부대 이병 소총수) “자대에서 경비를 하고 있는데 밤에 자해를 했어요. 죽을 거 같으니까. 귀국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맹호부대 일병 소총수)

새로운 전쟁 주체도 발굴해 냈다. 베트남에선 군인 외에 2만4천여명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일을 했다. 이들 가운데 8명을 찾아내 ‘노동자의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군번 없는 군인’으로 전장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식 노동 규율 아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특히, 베트남전쟁을 통해 급속히 신흥재벌로 부상한 한진그룹에 대한 사례 연구는 남한 자본주의 성장사의 일부임에 분명하다.

지금은 대한항공과 ‘땅콩회항’으로 유명하지만, 한진그룹은 베트남에서 미군 군수품 수송으로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한진의 노동자들은 철모를 쓰고 소총과 실탄 240발을 옆에 놓고 운전해야 했다. 노동자 200여명은 1971년 미불 임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서울의 칼빌딩을 점거했고 방화사건까지 터졌다. 농성자들 가운데 13명이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자 전태일이 몸에 불을 놓고 1년 뒤의 일이다.

군인과 노동자들이 미군에 대한 열등감과 현지 베트남인들에 대한 우월감에 빠져 있었다는 증언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월남인들은 게으르고 비위생적이다. 체구도 무척 작다”(한 참전군인)는 이야기는, 우리 속의 식민주의가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방 당시 미군이 우리를 바라보는 태도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이들 참전군인들의 이야기가 ‘현재형’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굵은 주장이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겪은 전쟁은 평생토록 이들의 존재와 의식을 놔주지 않았다. 그런데 1975년 종전 뒤, 전쟁은 급격히 잊혀져 갔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12월 재향군인회를 재편하면서 월남참전전우회를 해체했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1992년 한-베트남 공식 수교와 1999년 <한겨레21>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보도 등이 이어졌다. 이에 그동안 친목모임에 머물렀던 참전군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2000년대 ‘기억의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지은이는 이들이 왜 거리에 나가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미국의 경우 많은 참전군인들이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왜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참전군인들은 지금도 예전처럼 베트남전쟁이 이념전쟁이었다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반공·반북 정서는 냉전적 사고를 가진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 대신, 이들은 명예와 보상을 요구했다. 세상의 모든 전쟁에서 참전군인들은 자신의 죽음이 잊히지 않는 것, 명예롭게 기억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대우해 달라고. 경제성장의 첫 바탕은 우리로 인해 얻은 것 아닌가. 인원이 너무 많다면 우리를 유공자로 해서 명예만이라도.”(한 참전군인)

이런 상황에서 지은이는 베트남전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묻는다. 일종의 과거청산인 셈인데, 사회적 합의의 길은 멀기만 하다. 보수진영은 ‘반공 성전’의 이데올로기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참전군인을 가해자로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단선적 태도는 자칫 이들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지은이는 세곳의 베트남전쟁 기념시설을 살펴보면서 지금도 ‘기억전쟁’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3년 6월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의 팜티호아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았던 할머니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과거 원한은 내가 다 안고 갈 거야. 그러니 한국 친구들 오면 잘 대해줘. 마을 사람들한테 이제 그만 미워하라고 해. 그 불쌍한 것들….” 해답은 이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있는지 모른다.

 

* 한겨레신문 -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